MEMORIZE RAW novel - Chapter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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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환희와 차유나의 밀회를 목격한 이후, 나는 둘의 관계를 재조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물증 없는 심증뿐인 의심이긴 해도, 박환희의 연기와 차유나의 반응을 보자 뭔가 감이 오고 있었다.
차유나의 남자 친구인 백한결을 생각하면 고민이 들었지만 일단은 지켜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설프게 터뜨리기보다는, 이 부분을 어떻게 잘 매만지면 내가 원하는 구도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백한결 영입 건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으니 이제는 더욱 상세한 정보를 모아야 할 때였다. 엄밀히 말하면 신규 인원들이 꾸미고 있는 계획의 본질에는 아직 다가가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일상이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통제와 생활 교관 업무를 겸하며 신규 사용자들의 동태를 살피는데 주력했다.
그렇게 외적으로는 조용하지만, 내적으로는 치열한 아카데미의 생활을 보내기 시작했다.
3주차에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그 중에서 한가지를 꼽으라면 박현우와의 식사 약속이 미뤄진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거부한 게 아니라 황금 사자에서 김한별을 통해 의사를 전달해왔다.
그러고 보니 박현우와 성유빈은 가면 갈수록 아카데미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다른 바쁜 일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일이 자못 궁금했고, 한별이를 통해 떠보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죄송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뿐이었다.
가르쳐줄 수 없다라는 것 보다는 정말로 모른다는 뉘앙스가 강했다. 어차피 아예 취소된 게 아니라 미뤄진 일이라고 하니 일단은 기다려보기로 했다.
박환희가 말한 계획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결론적으로 딱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뭔가 위화감은 느껴졌다. 신규 인원들답지 않게 굉장히 조직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네들이 겉으로 보이는 행동들은 신규 사용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도무지 꼬투리를 잡을 건더기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이미 계획에 대한 대부분이 추진되었다는 것. 나는 박환희가 말한 거래라는 단어에서 키워드를 잡을 수 있었다. 신규 인원들 주제에 이렇게 용의주도하게 움직이고, 3주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속도감 있게 일을 추진시켰다.
‘그 놈들 뒤를 봐주는 다른 클랜이 있다.’
박환희는 굉장히 똑똑한 놈이었다. 그 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단순히 신규 인원들만을 규합해 단독 세력을 일으킬 리는 없다. 그런 짓을 벌일만한 클랜을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너무 많이 떠올랐기 때문에 곧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튼 대강 속내를 짐작한 나는, 결국 백한결을 제외한 다른 인원들 모두를 포기하는 초 강수를 두기로 했다. 확실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클랜을 흑막으로 두고 있는 놈들을 건드릴 순 없다. 그리고 몇몇 괜찮은 사용자들은 보였지만 백한결 한 명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대신, 만큼은 어떻게든 뺏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문득 현재 아카데미의 내부 상황이 상당히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환희를 필두로 한 신규 인원들의 계획. 그 뒤를 봐주고 있는 클랜. 황금 사자에서 흘러나오는 불안한 움직임. 김한별. 백한결과 차유나의 관계 등등.
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 이 상황들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알 수 없는 커다란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터질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되려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박살내고 깨부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처절한 암투는 오히려 익숙해 반가울 지경이었다. 설령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흐름 속에서 살아남을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존을 넘어서 그 흐름을 타고,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최대한 이득을 취해야 한다.
그게 바로 사용자 아카데미에서의 내 최종 목표였다.
*
박현우와의 식사 약속(을 빙자한 대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은 교관 업무를 시작한지 한 달 하고도 절반이 넘었을 때야 다시 잡을 수 있었다. 박현우와 성유빈이 바쁜 동안 김한별은 별로 터치를 받지 않았는지, 나름 안정된 모습을 보였었다. 하지만 다시금 이야기를 꺼낼 때 내 눈치를 살피는걸 보니 아직 완전히 떨쳐내진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선선히 승낙함으로써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냥 너도밤나무와의 일로만 부르는 건 아닐 것 같았고, 황금 사자 내부에서 일고 있던 불안한 분위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7주차가 끝나는 시점에 박현우와 다시 대담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무척 많은 일이 있었는지,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박현우는 피로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최근 머셔너리 로드의 교관 업무에 대한 활동 보고를 받았습니다. 통제, 생활 교관들 중 가장 많은 지원과 활동을 하셨더군요. 정말 저희 클랜 산하 교관들이 보기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그저 추천해주신 분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그리 칭찬하시니 부담스럽네요.”
첫 대화의 시작은 훈훈한 분위기로 출발선을 끊었다. 이윽고 우리는 천천히 식사를 하며 조금씩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덕분에 한별이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끔 볼 때마다 항상 머셔너리 로드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귀가 떨어질 지경입니다.”
“오히려 제가 항상 고맙죠. 그녀 덕분에 교관 업무를 더욱 편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여전히 겸손하시군요. 다른 클랜들이 머셔너리 로드에 대한, 그리고 머셔너리 클랜에 대한 평가를 좋게 내리는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일이 바빠 근황도 여쭈지 못했네요. 혹시 지내시는데 따로 불편한 점은 없으신지요. 예를 들어 숙소 생활이라거나….”
뻔히 알고 있으면서 저렇게 물어오니 얄밉기도 하고, 한별이가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씹고 있던 음식을 억지로 목구멍으로 밀어 넣은 후,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서로 성별이 다르다 보니 처음에는 불편함이 없지는 않았지요. 그래도 지금껏 서로 배려하고 양보했기 때문에 크게 거북스럽지는 않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말투에 은근한 날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박현우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아 그렇군요. 그때 하도 상황이 어지러워 그저 평소대로 나눴을 뿐인데, 차마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염치 불구하지만, 앞으로도 한별이를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하하.”
‘곧 죽어도 방을 바꾸겠다고 하지는 않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부에서 쓴 물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통과 의례 시절 예리하고 총명했던 한별의 모습이 떠올리자, 마음 속 씁쓸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 애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내몰린 걸까.
“아. 그러고 보니 머셔너리 로드께 알려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식사 후 가지는 티타임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동안, 박현우는 이 분위기를 반전시킬 묘수가 있는지 잠시 품 속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그는 동그랗게 말린 기록 하나를 내게 건네주었다. 중앙 부분에 황금 사자의 문양이 찍힌 것을 보니 클랜 내부에서 작성한 보고서 같았다. 나는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든 후 차분히 펼쳐보았다.
그리고 상단에 적혀있는 제목을 보는 순간, 눈이 한껏 가늘어짐을 느꼈다.
‘북부 소도시 뮬의 대표 클랜 너도 밤나무와 머셔너리 클랜간의 충돌 보고. 담당 간부 성유빈.’
“이건….”
“일단 계속 읽어보시죠. 얘기는 그 후에.”
호의 어린 얼굴로 미소 짓는 그를 흘끗 바라봤다가, 이내 다시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곳에는 뮬에서 있었던 너도밤나무 클랜과의 충돌이 간략히 적혀있었다. 그것들을 주루룩 읽어 내리자, 곧 하단부, 즉 결론을 적는 곳에 한 줄로 써져 있는 문장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성유빈이 힘을 쓴 건가? 아니야. 그것 말고도….’
조사를 받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일이 정리됐다. 잠깐 동안 생각을 정리한 나는 기록을 다시 건네주며 묘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밤나무 클랜과의 충돌은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산하 클랜원 두 명을 죽인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조사를 받은 기억이 없는데….”
“아. 조사야 흔적으로 판별하기 어려울 때 하는 일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큰 일도 아니었고…. 아무튼 흔적이 잔뜩 남아있어 생각보다 손쉽게 진상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음. 그런데 개인적으로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시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머셔너리 클랜은 떳떳합니다. 숨김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하하. 지금 와서 조사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선공을 당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명분은 확실하거든요. 분명히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의 위력이 담긴 흔적이 몇 개나 발견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굳이 너도밤나무의 산하 클랜원들을 살해하실 필요까지 있었나 싶어서 말이죠.”
“네. 있었습니다.”
단호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박현우의 표정은 침착했다. 하기야 이미 기록으로는 결정이 난 상태였고, 그 또한 마음을 정한 것 같아 보였다. 지금 이 대담은 그저 형식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마치 조금 더 자세한 속사정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말 그대로 개인적인 질문에 불과하다는 티를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첫 만남은 절규의 동굴이란 곳을 탐험한 후 뮬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이미 이 때를 대비해 우리에게 유리하게 말할 수 있는 말들을 잔뜩 준비해두고 있었다. 사실상 준비랄 것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만 말해도 우리가 혐의를 받을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유적 조사가 미뤄진 것부터 앞뒤 정황을 모두 자르고 가입 권유를 한 사실. 그 권유에 은근히 우리가 이루어낸 성과를 탐내고 있었다는 뉘앙스. 0년 차에 불과한 애들을 향해 목숨을 위험하게 할 수준의 위협을 가했다는 점. 반다희의 고연주를 향한 도발. 그리고 10강을 향해 실제 공격을 가한 후, 제압당한 뒤 내 얼굴에 침을 뱉은 것 등등.
마지막으로 차승현에 대한 얘기로 마무리를 짓자, 헛웃음을 흘리는 박현우의 얼굴이 보였다.
“허…. 설마 그런 말들이 오고 간 줄은 몰랐습니다. 그 사용자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울 정도에요. 아. 그런데 그 반다희라는 사용자는 그림자 여왕이 직접 처형을 했다고요?”
“예. 정중한 사과를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제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오히려 언젠가는 저와 고연주를 죽여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녀를 제압하고 있던 고연주가 곧바로 단검을 찔러 넣었습니다.”
“더 볼 것도, 들을 것도 없겠군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그 건에 대해서는 저희 내부적으로 결론을 낸 상태니 더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산하 클랜을 통제하지 못한 저희들이 사과를 드려야겠군요. 휴. 어쩌다 그런 클랜을 대표 클랜으로….”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때는 한창 원정 중이라 차마 신경 쓰지 못하셨을 게 당연합니다.”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뭔가 원하는 게 있군.’
황금 사자는 필요 이상으로 저자세로 나오고 있었다. 물론 조금 더 자세히 파고 들었어도 어차피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긴 했다. 거기다 고연주가 개입되어 있고, 박현우가 인정한대로 명분도 충분했다.
그러나, 어찌됐든 산하 클랜의 일이라 외부적으로 공론화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일을 처리해주었다. 이것은 그들 나름의 분명한 호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황금 사자에서 뭔가 내게 원하는 바가 있다는 소리였다.
다시 기록을 받아 든 박현우는 태연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더니 허리를 똑바로 세우며 입을 열었다.
“그럼 너도밤나무에 관한 건은 이정도로 마무리를 짓고…. 이제 그만 다른 화제로 넘어가고 싶군요. 아니, 본론이라고 해야 옳을까요.”
“…….”
“실은 오늘 머셔너리 로드를 따로 초대한 이유는, 긴히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올게 왔군.’
대충 예상하고 있었지만, 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마치 황금 사자에서 내게 부탁할 일이 있느냐는 듯이. 그는 내 반응을 보고 미약하게 웃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음. 일전에 그림자 여왕에게 출입증을 부여한적이 있잖습니까. 그 이후로 지금껏 두세 번 정도 아카데미를 방문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다음 방문 일정을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왜 궁금해하시는 거죠.”
내 반문은 클랜 로드로써 당연히 갖고 있는 권리였다. 그러나 박현우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내 얼굴을 봤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가 내 얼굴을 봤다가. 뭔가 굉장히 고민하고, 망설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실제로 고연주는 7주차가 지나는 동안 총 두 번 방문했고, 8주차에 다시 한번 방문할 예정이었다.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이렇다 할 일이 없었기에 그냥 보고만 받고, 잠시 같이 시간을 보낸 후 돌려보냈었다.
나는 아쉬울 것 없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차분히 차를 한 모금 삼켰다. 머리가 상쾌해지는 청량한 감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차를 서너 모금 넘겼을 무렵이었다. 비로소, 꾹 닫혀있던 박현우의 무거운 입술이 조금씩 열리는 게 보였다.
“머셔너리 로드. 지금부터 말씀 드리는 것은, 꼭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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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독자 분들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몸이 너무 안 좋네요. ㅜ.ㅠ 후기는 이번 회 생략하고, 리리플은 다음 회와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많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