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55
00254 망상의 고원 =========================================================================
시기는 당연히 하나를 꼭 집어 말할 수 없겠지만 기준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망상의 고원에 들어가기 전, 망상의 고원에 들어간 후, 그리고 모든 일을 마치고 망상의 고원에서 나올 때. 시기에 맞춰 일어날 가능성은 두 번째가 가장 낮고,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엇비슷했다.
‘세 번째면…. 조금 재밌어지겠는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는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맞는다면, 그리고 세 번째라면. 아마 망상의 고원에서 나올 때까지 꽤나 귀가 간지러울 것이다.
“형! 준비 끝났어요!”
“아.”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자, 앞쪽에서 안현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새 준비를 끝냈는지 다들 각자의 지점에 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클랜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오묘했는데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방금 전 내 모습은 혼자서 상상에 빠져 실실 웃고 있는 변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리라.
나는 재빨리 얼굴 표정을 정리한 후 예의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흠흠. 지금부터 섬망의 산 안으로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헤헤.”
내가 웃으니까 자기도 마냥 좋은지, 안솔은 방실방실 웃으며 나를 따라 웃었다. 잠시간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섬망의 산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섬망의 산. 여기서 섬망이라 함은 현대에서 의학적 용어로 쓰이는 말입니다. 원래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홀 플레인 에서는 단 하나의 단어로 필드 효과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의식 장애를 말씀하시는 거죠?”
“예. 정답입니다.”
“상품은요?”
고연주는 즉각 대답하고는 살며시 한쪽 눈을 감아 윙크를 보냈다. 그 눈길을 받자, 왠지 모르게 그녀가 원하는 상품이 뭔지 대강이나마 감이 잡혔다.
‘정력을 높여주는 물약이라도 사먹어야 하나….’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나는 진의 선두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섬망의 산, 망상의 고원, 환각의 협곡. 이 세 장소의 무서운 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필드의 효과가 중첩된다는 것이죠. 즉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에….”
안현의 옆에 서자, 녀석은 안솔을 한번 흘끗 보고는 백한결과 김한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리는데, 그 낯빛에는 걱정이라는 감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그의 내심을 짐작할 수 있어 나는 곧바로 말을 이어주었다.
“다른 두 곳과 비교하면 섬망의 산의 필드 효과는 상당히 미약한 편입니다. 몇몇 사용자들은 과잉 행동과 비슷한 모습을 보일 수 있지만, 웬만큼은 조절할 수 있을 겁니다. 혹여라도 못 견디겠다 싶다면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바로 정심단을 꺼내드리겠습니다.”
“네…!”
내 말에 한결 위안을 받은 듯 안현은 약간은 나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이윽고 내가 먼저 한걸음 떼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1차 목적지인 망상의 고원으로의 출발을 알렸다.
*
망상의 고원은 구별을 하자면 산간고원(산맥으로 둘러싸여있는 고원.)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섬망의 산은 하나가 아니다. 다만 초원에 도착하면 처음 보이는 산을 섬망의 산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모습이 너무도 웅장해 이어지는 산들과 비교하면 거의 군계일학 급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고원을 둘러싸고 있는 산맥을 제외한 다른 곳은 필드 효과가 사라진다는 점도 한몫 했다.
섬망의 산은 칠흑의 숲처럼 음침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고나 할까.
한걸음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 아래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산의 초입을 벗어난 지는 오래였다. 현재 우리들의 눈 앞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곳곳이 서있고,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들이 부드러운 흙 갈 빛 바닥을 덮고 있었다.
30분간 비탈진 흙 길을 오르며 나무로 그늘진 곳을 빠져 나오자, 이윽고 뻥 뚫린 하늘이 보인다. 초원에 있을 때만해도 짱짱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조금 더운 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원하게 부는 산바람 덕에 별로 덥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헥! 헥!”
“하응…! 하응…!”
지금껏 했던 행군 중 가장 빠른 급속 행군으로 단숨에 올라서 그런지 뒤를 따르는 클랜원들의 체력이 생각보다 빠르게 떨어지는 모양이다. 나름 근접 계열인 안현과 이유정이 숨을 몰아 쉴 정도니, 고연주를 제외한 다른 클랜원들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문득 느끼건대, 이유정의 기합 또는 신음은 상당히 특이하다. 백 번 양보해 안현의 숨차는 소리는 들을만하고 쳐도, 이유정의 소리는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닌지 그녀의 앞에서 걷는 몇몇 사용자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물들어있는 게 보였다.
“잠시 쉬었다 가자.”
“헉헉. 아이고 살았다.”
“앉지마. 숨만 고르고 갈 거니까. 주변 경계 늦추지 말고.”
“아. 네, 네!”
내 말에 뜨끔한 사람이 많은지, 대부분이 자리에 앉으려다가 엉거주춤 일어나는 모양새를 보였다. 나는 왼쪽으로 굽어져 있는 바위에 몸을 기댄 후 연신 주변의 기척을 느끼는데 주력했다. 고연주도 산을 오르기 전 나와 나눈 이야기를 잊지 않았는지 남몰래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애들의 얼굴은 아직 살만해 보였다. 처음 산을 오를 때는 필드 효과 때문에 은근히 자신 없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스스로도 충분히 조절할 수 있음을 느꼈는지 곧 원래의 자신감을 되찾았다.
‘망상의 고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중첩 효과로 위력이 뻥튀기된다는 게 문제지만.’
어느 지점에서 정심단을 복용해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바위의 겉면을 톡톡 두드리고 있자, 앞에서 누군가 비척비척 다가오는 낌새가 느껴졌다.
“저기…. 오빠.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응? 뭔데.”
고개를 들어올리자 창백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김한별이 있었다. 그녀는 서서히 호흡을 정리하는 중인지 한두 번 배를 들썩이고는 이내 목 울대를 꿀꺽 움직이고 내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섬망의 산에는 괴물이 출현하나요?”
“당연히 출현하지.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오른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아직 한번도 만나지 않아서요. 그럼 혹시 어떤 괴물이 출현하는지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대충 특징이라도 알면 어떤 마법으로 대응할지 미리 준비할 수 있거든요.”
“아아. 까마귀?”
“네?”
“아, 아니다. 잘못 말했네.”
순간적으로 말을 실수하자 고연주가 깔깔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괜히 머쓱한 마음에 볼을 긁적인 후 천천히 설명에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조류 괴물이 등장한다. 특이하게도 산을 자신들의 안방으로 삼는 괴물들인데, 정확한 명칭은 검은머리수리라고 불리는 놈들이었다. 특징이라고 함은 발톱이 날카롭고, 머리가 좋으며, 급강하를 시도해 먹이를 낚아채거나 공격을 시도하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잠시 여담으로 말하자면, 까마귀는 일부 사용자들이 그냥 편하게 사용하는 말이었다.
말로 하는 설명이라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머리가 영리한 김한별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내 깊은 생각에 잠기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곧 출발하려던 마음을 접고 5분만 더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렇게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한 후 우리들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은 타면 탈수록 더욱 가팔라졌고, 종래에는 주변의 지형지물을 짚고 올라가는 일도 잦아졌다. 하지만 나는 길을 바꾸지 않았다. 지금 이 길이 망상의 고원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앞서 들어간 원정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으면 들어가기 전 뭐라도 하나 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현재 내 오감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 중 특히 청각에 마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는데, 한 굽이를 오르자 문득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잡혔다. 그 소리를 따라 가파른 길을 오르자 어느 순간부터 경사도가 다시금 완만해짐이 느껴졌다. 그렇게 200미터를 더 전진한 순간이었다.
“잠시 정지.”
방금 전 걸었던 지형에 비해서는 훨씬 평탄한 지형에 들어서, 나는 손을 들어 클랜원들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수현. 왜 그래요?”
“고연주. 잠시 이리 와보시죠.”
내 말에 나는 듯 달려온 그녀는 곧 내가 가리킨 방향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내 손가락이 지적한 곳에는 여러 흔적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흐응…. 갈렸네요.”
“하나는 이대로 위쪽으로 올라갔고, 나머지 하나는 우회했습니다.”
“이거 조금 애매한데요. 그냥 위쪽으로 올라가는 게 어떨까요? 어차피 이 속도대로 간다고 치면, 한두 시간 후 망상의 고원에 도착할 것 같은데요.”
“음. 잠시만요.”
고연주의 말처럼 어디로 가든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그녀는 내 시선을 받고는 살짝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오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나는 곧바로 그녀가 보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회해서 가봅시다.”
*
우회를 결정한 후 우리들은 반원형으로 휘어진 산길을 따라 행군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뭔가 이상한 기분이 엄습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더없이 상쾌하고 선선했던 공기가 조금씩 눅눅하고 끈적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청명했던 나무와 수풀은 조금씩 드문드문해지고 있었고 부드럽게 밟히던 흙 또한 점점 딱딱해졌다. 하지만, 흔적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동안 흔적을 살피는데 신경을 쏟고 있던 나는, 갑작스레 앞에 보이는, 주변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광경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어. 저건 뭐지.”
“꽃…. 처럼 보이는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안현과 이유정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나는 자세히 그곳을 살폈다. 확실히 이상했다. 전방 70미터쯤 앞에는 꽃이 수북하게 널브러져있었다. 문제는 꽃이 피어있는 게 아니라 줄기가 뚝뚝 끊긴 꽃이 수북하게 쌓여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저 장소에 꽃을 모으기라도 한 것처럼.
‘안솔이 이곳으로 오자고 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텐데…. 방향 탐지인가, 불안 감지인가.’
내가 신호를 보낸 이후로 일행들 사이에서는 쥐 죽은듯한 고요만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전방으로 살짝 손을 구부려 전진 신호를 보냈다. 이내 뒤에서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무기를 뽑는 소리와 함께, 우리들은 서서히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주변은 아무런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을 감도는 이 묘한 기류는 도대체 뭘까.
나는 지금껏 올라왔던 것처럼 빠른 걸음이 아닌, 경계하며 나아가는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 꽃이 모인 곳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육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
“일단 꽃 좀 걷어보자.”
“네.”
안현은 내 지시에 앞으로 나섰고, 창으로 슬슬 꽃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몇 번의 휘두름으로 꽃을 걷어낸 안현은 이윽고 갑자기 미간을 좁히며 안을 자세히 보더니 이내 “헉.” 소리와 함께 재빨리 물러났다.
“혀, 형. 안에….”
“수현. 잠시만요.”
고연주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앞에서 어두운 그림자 몇 개가 땅을 훑더니, 아직 약간 남아있는 꽃 더미를 모두 흩어내었다. 그리고. 이윽고 꽃 더미 아래로 드러난 것을 확인한 순간 클랜원들의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러나 미처 그것을 자세히 보기도전에, 꽃 더미 안에 숨어있던 무언가가 반짝이는 말간 빛을 쏘아 올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마력을 일으켜 그 빛에 저항했고 이내 빛나던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수정구였다. 통신용 수정이 아닌, 기록용 수정구. 그리고 그 수정구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는, 완전하게 썩어버린 시체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시체 하나 발견. 어우. 흔적 좀 살피려고 했더니 시체 훼손이 심하네요.”
“글쎄요. 일단은….”
고연주의 말에 나는 허리를 굽혀 수정구를 주워들었고, 반으로 접혔던 복부를 피며 대답을 마무리 지었다.
“이것부터 보는 게 낫겠죠?”
나는 바로 수정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잠시 지지직 비틀리던 화면이 이내 하나로 고정되더니, 곧 중년의 남성과 함께 중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라도 이 수정구가 발견될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누군가가 이것을 발견해준다면 초면에 염치불구하고 꼭 하나의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이 수정구를 남부 도시 모니카로 가져가주십시오.)
“…….”
(아. 노파심에 먼저 말씀 드립니다. 먼저 잠시 주변을 살펴보시는걸 권장 드립니다. 혹시나 이 수정구를 발견한 장소가 여전히 음침한 섬망의 산 한가운데라면…. 뭐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만 말이죠. 하하. 아. 혹시 구조대이신가요? 구조대든, 아니면 탐험에 나온 사용자든 좋습니다. 일단은….)
나는 수정구를 가까이 가져와 들었다. 화면에는 척 봐도 두터운 장갑을 입은 남성 한 명이 나무에 기대어 쓰러져있었다. 그리고 화면 뒤로 보이는, 아주 조금 보이는 지형을 분석하자 이곳과 아주 흡사한 곳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화면의 남성이 입가에 몇 줄기 피를 흘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세 번의 기침을 한 후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이 빌어먹을 산에서 바로 내려가세요. 지금 바로, 뒤도 돌아보지 말고요. 어서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조금씩 체력이 달리는 게 느껴지네요. 목요일, 금요일에 중요한 시험이 있는지라 준비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과연 저 남자는 어떤 일을 겪었을까요? 하하하. 아무튼, 저는 다시 시험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다들 재밌게 읽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