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79
00378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
잠시 후.
부랑자들이 멀리 사라진 순간, 신상용은 곧바로 몸을 무너뜨렸다. 그와 동시에 아찔한 후유증이 그의 전신을 덮쳤다.
“허억, 허억!”
눈앞이 한순간 핑글 돌아버렸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게 꼭 가슴이 방망이질하는 것 같다. 이윽고 찾아 드는 현기증에, 신상용은 바로 마력 회로를 가라앉혀 소환을 해제하였다.
“크흑…. 크흑….”
간신히 내부를 추스르자, 이번에는 한껏 가열된 마력 회로가 몸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한다.
“후…. 후….”
신상용은 차분히 호흡을 조절했다. 내부는 텅 비어 무척이나 공허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괜찮았다.
이윽고 간신히 숨을 고른 신상용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안현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기절한 상태였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아직 살아있었다.
이유정은 가슴과 옆구리에 손을 얹은 채 고통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다.
안솔은 여전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이내 모두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신상용의 가슴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아, 안솔양.”
“네, 네에?”
“괜찮으십니까?”
“아니요오…. 아까부터 자꾸만 심장이랑…. 몸이 떨려요…. 죄송해요….”
“하, 하하. 괜찮습니다. 이, 이제 적은 물러갔습니다. 그러니 얼른 치료를….”
신상용은 계속 말을 잇기가 힘들어 안현을 응시했다. 뜻을 알아들은 안솔은 이내 한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엉금엉금 기어 안현의 주변으로 다가갔다.
신상용은 대지에 몸을 눕혔다. 이곳이 전장 한복판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저 쉬고 싶었다. 몸에 한 톨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윽고 막 머리를 눕히려는 신상용의 목으로, 뭔가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이유정이 보였다.
“오빠.”
“이, 이유정양?”
“고마워.”
“…….”
고맙다는 말에 신상용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얼굴이 화끈해지고, 속이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오빠 그런 모습 처음 봤어. 멋있더라. 진작에 좀 보여주지.”
“하, 하하.”
이유정의 핀잔 아닌 핀잔에, 신상용은 머쓱하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아서 다행입니다.”
그 말에 이유정은 재회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그때였다.
“일어나세요.”
갑작스레 들린 고요한 음색에 신상용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어느새 앞에 다가온,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한 검후를 볼 수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겨우 적을 물러가게 했을 뿐.”
“아…. 그, 그렇지요. 그래도 지금 상황도 이렇고 적도 보이지 않으니 약간이라도 휴식을….”
“안 돼요.”
신상용의 말도 일견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검후는 딱 잘라 거절했다.
“방금 전…. 놈들이 작정하고 끝까지 몰아쳤으면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도 이강산은 물러나는걸 택했죠. 느낌이 좋지 않아요. 일단 얼른 저 남자를 깨우고 간단히 치료하고 나서, 바로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 알겠습니다.”
검후의 말은 냉정했지만 현실이었다. 신상용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면서 약간이지만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아까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지금은 확실히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이윽고 신상용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확인한 검후가 몸을 돌려 주변을 보려는 찰나, 일순 그녀의 다리가 크게 비틀렸다.
“읔!”
“괘, 괜찮으십니까?”
신상용이 놀라 부축하려고 했지만, 검후는 고개를 저어 손길을 거부했다.
“…안 괜찮아요.”
“그, 그럼 얼른 치료를.”
“치료로 회복될게 아니에요. 고유 능력을 남용한 부작용이니까.”
“고유 능력이요? 아, 아무튼 그래도 안 받는 것보단.”
“능력을 증강하고 온몸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려주는 능력이죠. 잠깐 사용하는 거면 상관없는데, 오랜 시간 동안 발동해서 몸에 무리가 찾아왔어요.”
그것은 예전에 김수현과 대결할 때 잠깐 선보였던 능력이었다. 검후는 귀찮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상세한 설명을 해주고는 신상용을 힐끔 쳐다보았다.
“지금 제 상태가 그래요. 당신도 비슷한 상태 아닌가요?”
그제야 이해가 됐는지 신상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홀가분했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방금 전 전투서 거의 모든 힘을 쏟아 부은 터라, 그에게는 남은 힘이 거의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간신히 옮기는 게 고작일 정도였다. 그런데 검후도 비슷한 상태라면….
“아,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포위망은 어떻게.”
“…몰라요.”
“예, 예?”
그 순간 신상용의 뇌리로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설마 저희와 만나기 전부터 능력을 발동하고 있었던 겁니까?”
“당분간은 능력을 발동할 수 없어요. 아니 마력의 사용도 조심해야 하죠.”
약간 동문서답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인정한 것과 다름없었다. 신상용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동안 검후가 보인 괴물 같은 감지 능력을 이해하면서도 깊은 걱정이 일었다. 간신히 산 하나를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커다란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맴돌자 신상용은 바로 머리를 털었다. 그리고 한창 치료 주문을 외우는 안솔을 응시했다.
안현과 이유정을 치료한다.
일단은 그게 우선이었다.
아무튼 검후의 말대로 팔자 좋게 누워있을 틈은 없어, 신상용은 곧바로 명상의 자세를 잡으며 검후를 응시했다. 등을 보이고는 있었지만, 대지를 디딘 다리에서 미약한 떨림이 보였다.
“으으.”
그때, 미약한 신음이 신상용의 귓가에 들렸다. 그는 반색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살을 가득 찌푸린 채 서서히 눈을 뜨는 안현이 보였다. 안솔이 한결 다행이라는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로 보아, 깨어나는데 지장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윽고 눈을 뜬 안현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바로 입을 열었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어…? 내 장비는?”
“야. 네 장비 저기 있다. 알아서 챙겨오고 그만 좀 비켜. 이제 나 치료받게.”
“장비…. 형이 준 장비….”
“하하. 제,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깨자마자 장비부터 찾는 안현의 행동에 신상용은 피식 웃곤 몸을 일으켰다. 이어서 앞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목이 잘려 널브러진 시체 옆으로 가지런히 나열된 투구, 창, 갑옷 등이 보였다.
일단은 하나씩 옮길 생각에 허리를 숙여 투구를 집으려는 찰나, 마주보는 방향에서 양손으로 갑옷을 집는 가녀린 손길을 확인했다. 신상용은 설핏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흘끗 마주 보는 검후가 보였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창을 집었고, 바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타박. 타박.
– 흐응. 여기는 왜 이렇게 사람이 없나 싶었는데….
그 순간, 막 몸을 일으키려던 신상용과 검후의 몸이 딱 멈췄다.
– 이건 아까 떠돌이들의 시체들…? 이건 예상치 못한 상황인데?
이어서 등 뒤로 들려오는 말에 급히 허리를 피려는 찰나.
– 보아하니…. 아군으로 보이지는 않네.
휘리릭!
뭔가가 바람을 거칠게 찢으며 달려들었다.
팍!
“악!”
“컥!”
그리고 둘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신상용의 몸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이윽고 완전히 시선을 내리자, 자신의 복부를 뚫고 나온 가시 돋친 굵은 채찍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보이는 시선에서 한순간 땅이 멀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금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다.
퍽!
“꺽!”
바닥에 한 번 몸이 부딪치는 순간, 신상용의 목이 크게 꺾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퍽!
두 번.
퍽! 쿠당탕!
그리고 세 번에 이르러서야 몸에 꽂힌 채찍이 쑥 비틀려 빠지더니, 이내 관성의 힘으로 전방으로 쭉 나동그라진다.
“혀, 형?”
“오빠!”
숨이 턱 막히고, 복부에서, 전신에서 아릿한 고통이 밀려들어 온다.
이것은,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뒤늦게 애들이 달려오는 기척이 들렸지만, 이미 신상용은 육체는, 정신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엄습하는 고통에 그는 숨을 쉴 생각도 못한 채 꺽꺽거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상용은 초인적인 인내로 간신히 눈을 떴다. 그리고 힘겹게 고개를 들자,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애들이 보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반대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애들을 조준하는 한 여인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자신의 복부를 꿰뚫은 게 분명한, 피와 살점이 묻어있는 채찍이 들려있었다.
휘리릭!
단 일말의 자비도 없이, 채찍이 휘둘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신상용의 눈에 크게 떠졌다. 분명히 힘은 없었지만 그는 양손으로 대지를 짚고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양손을 크게 벌리며 신상용의 눈이 정면을 응시한다.
안현과, 안솔과, 이유정이 보였다. 그리고.
철썩!
– 어머?
채찍이 가열차게 등을 후려치는 것과 동시에, 점점이 터져 나온 피가 허공을 수놓는다.
그와 동시에, 신상용의 눈앞이 캄캄하게 변했다.
“────!”
“────!”
애들이 고함쳤지만 들리지 않는다. 이미 귀에서는 찡한 소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
잠시 후.
다시 밝아진 신상용의 눈에 천천히 하늘이 넘어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셀 수 있을 만큼, 굉장히 느린 속도였다. 마치 정지라도 한 듯이 시간이 완만하게 흐른다.
그렇게 천천히 넘어가는 하늘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해, 이윽고 신상용의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완전히 정신을 놓기 전, 신상용은 생각했다.
혹시 이게 죽기 직전에 본다는, 인생의 주마등이 아닐까 하고.
곧바로 파노라마처럼 흘러 드는 기억에, 신상용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그 해의 겨울은 추웠다. 정말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었다.
삐뽀. 삐뽀. 삐뽀. 삐뽀.
환한 불길이 솟아오른다. 화염이 치솟고 혈흔이 낭자한 공간.
불길의 원인은 도로의 중앙에 뒤집힌 자동차였다. 차체가 찌그러진 자동차는, 불길에 둘러싸인 채 밤의 도로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차체의 안에는, 두 명의 어른이 웅크려 한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아이는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감싸는 어른을 쳐다보았다. 어른과 아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문득 한 어른이 피 젖은 손으로 아이를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 상용아. 살아남아라. 너만큼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아이는 떨리는 눈망울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아이의 주변이 바뀌었다.
– 얼레리꼴레리. 얼레리꼴레리. 말더듬이래요. 말더듬이래요.
여러 명의 아이들이 한 아이를 둘러싼 채 놀리고 있었다. 애들의 중앙에 있는 아이는 그저 멍한 얼굴로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묵묵히 보던 할아버지가 하신 한 마디.
– 침묵을 지켜라.
아이는 그 말을 지켰다. 스스로도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아무리 노력해도 버릇이 잘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정체는 바로 신상용이었다.
정체를 깨달은 것을 시작으로, 신상용의 뇌리에 기억이 하나씩 하나씩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신상용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애초 소심한 성격과 맞물린 침묵은, 그의 주변을 외롭게 만들었다.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왔고, 그 결과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심할 때는 왕따를 당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렇게 사는 게 익숙하기도 했고, 자신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자신은….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신상용도 하나 참지 못하는 게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이따금 찾아오는 외로움이었다. 어디 하나 의지할 데 없는 그의 주변은 언제나 어둡고, 차가웠다. 마치 겨울처럼.
지구의 계절은 항상 변했다. 그러나 그 해 멈춰버린 신상용 개인의 계절은 언제나 겨울이었다.
발버둥을 쳐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면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 소기의 성과는 있었지만, 결국 원래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어릴 때만큼 심하게는 아니더라도 말은 여전히 더듬었고, 그걸로 인해 무시당하는 경우도 잦았다. 소심한 성격으로 손해 보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애당초 그렇게 혼자서 살아왔으니까.
그리고 홀 플레인으로 입장한 후.
통과의례를 통과하고 나서, 신상용은 근 일주일을 앓았다. 처음에는 왜 이곳에 소환됐는지,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이후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처음 든 생각…. 그것은 바로, 홀 플레인은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라는 것. 유달리 삶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신상용에게, 살아남으려면 세상에 적응해야 했다. 그리고 적응하려면, 자신의 모든걸 바꾸는 게 우선 과제였다.
그러나 신상용의 인생은 홀 플레인에 들어와서도 변하지 않았다.
악착같이 잡일을 해보기도, 무서움을 떨치고 탐험에 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았다.
– 저 사람 너무한 거 아니야? 아무리 마법사라고 하지만 너무 뺀다. 아니 그럴 거면 캐러밴에 왜 끼었어요?
– 말을 더듬어도 주문은 똑바로 외우셔야죠. 죽을뻔했잖아요.
– 연금술을 익힌 마법사는 받지 않습니다.
– 고어 해석? 별로 내키지는 않네요. 고대 유적을 발굴하면 연락 드려보겠습니다.
1년이 지났다.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신상용의 주변에는 그 누구도 서 있지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생각했다. 참고 기다려보면, 봄이 올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돌아온 결과는 현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현대에서도, 홀 플레인에서도 신상용은 여전히 혼자였다. 신상용의 계절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봄이 오는 것을 가만히 기다렸던 게 아니었을까?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자신이 겨울을 나가는 것을 방해했던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들.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이미 자신은 홀 플레인에서 비주류였고 혼자였다. ‘사용자 정보’가 우선되는 세상에,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고 신상용은 크게 마음을 먹었다.
마지막으로, 이제 마지막으로 세상 밖으로 걸어나가 보자고.
그리고 자칫 목숨을 잃을뻔했던 탐험에서, 비로소 한 명의 사용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사용자는 자신과는 사뭇 다른 인간이요, 사용자였다. 언제나 주도적으로 행동하였고, 주변 사람들의 한없는 신뢰를 받았다.
그래. 그 사내는 마치 태양과도 같았다.
신상용은 생각했다. 어쩌면 태양 옆에 있다면 자신의 겨울을 녹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신상용은 모든 것을 무릅쓰고, 처음으로 매달렸다. 항상 순응하고 물러났던 그에게는 처음으로 해보는 매달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 좋습니다.
– 예, 예?
– 사용자 신상용씨의 가입을 환영합니다.
현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언제 끝나나 기다렸던 겨울의 얼음이 서서히 녹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꽁꽁 얼어붙었던 신상용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 들었다.
변화는, 바로 주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사용자 신상용. 너무 무리하시면 안 좋습니다.
– 하, 하하. 리, 리더께서 할 말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 하하하! 그렇군요.
여태껏 아무도 오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주변으로.
– 요호호호. 이봐 이봐! 신상용! 이 스승님께서 말이지. 드디어 중임을 맡았다고.
– 예, 예? 중임이라니요?
– 그래. 중임 말이야 중임. 김수현이 부탁했어. 그것도 직접! 도와줄 거지?
한 명씩.
– 형! 저번에 도와주신 거 고마웠어요! 저희 나름 잘 맞는데요?
– 어휴. 오빠가 다했으면서 생색은.
– 그러게나 말이에요오.
한 명씩.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신상용은 드디어 자신이 있을 곳을, 아니 있어도 된다는 곳을 찾았다는 생각에 기뻐했다.
그래서, 더욱 상심했던 건지도 모른다.
– 이번 인선에서 사용자 신상용은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 비 전투 사용자가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마법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클랜원이 있었다.
연금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설마 이대로 쓸모 없어지는 게 아닐까…. 어쩌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래서 신상용은 전쟁에 참가했다.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 결과….
“───! ───!”
“───! ───!”
“───! ───!”
응?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신상용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비볐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이었는데, 어느덧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걸어가려던 신상용은, 일순 걸음을 멈췄다.
과연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있을까…?
그 순간, 다시금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흘러 든다.
함께 식사를 할 때.
함께 불침번을 설 때.
함께 유적 탐험했을 때.
함께 목숨을 걸고 전투했을 때.
함께 클랜 하우스에 들어갔을 때.
함께 정원에서 즐겁게 축제를 벌일 때.
신상용은 멍하니 기억의 장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때, 한 명이 천천히 등을 돌리었다. 사내는 가볍게 웃고는 슬쩍 발을 비켜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와 동시에 모든 클랜원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어서 오라는 듯한 태도에, 신상용은 이끌리듯이 걸어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비로소 안으로 들어간 순간.
– 사용자 신상용씨의 가입을 환영합니다….
“───! ───!”
“───! ───!”
“───! ───!”
시야가, 다시 하얗게 변하였다.
“…….”
몸에 감각이 없었다. 지금 보는 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윽고 시야가 천천히 흔들렸다. 그러한 흔들림 사이로, 익숙한 세 명의 얼굴이 보였다.
“혀엉! 혀어엉!”
“오빠! 오빠! 대답해! 대답하라고!”
“───. ───. ───. 치료!”
소리치는 안현.
몸을 미친 듯이 흔드는 이유정.
정신 없이 주문을 외우는 안솔.
“형. 살 수 있어요. 살 수 있데요!”
“조금만 참아! 지금 바로 치료 중이니까! 응?”
살 수 있다고?
어렴풋이 들리는 말. 신상용은 서서히 입술을 떼었다.
“다행….”
“어, 어? 다행? 그렇지! 다행이지! 응?”
외침에, 신상용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직 할게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애들한테 사과도 하고 싶었다.
스승님에게 이제는 마수를 소환할 수 있다고 자랑도 하고 싶었다.
이제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반대로, 몸은 서서히 식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상반된 감정 속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신상용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 명을 보았다.
“미안….”
미안합니다.
“정말…. 고마….”
정말 고마웠습니다.
이윽고, 신상용은 웃었다. 그리고 울었다. 웃으면서 울었다.
갑작스레 머릿속으로 어둠이 찾아 든다. 실은 아까부터 자꾸만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해서, 신상용은 잠깐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오빠. 왜 그래? 왜 갑자기 눈을 감아? 응?”
왠지 모르게 홀가분한 기분에, 신상용은 나직이 읊조렸다.
“겨울 지나면…. 봄 온다….”
그 순간 간신히 이어오던 뭔가가, 갑자기 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형…. 형…? 형…!”
신상용은 그대로 눈을 감기 전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라도 다시 눈을 뜰 수 있다면….
“오빠…?”
이제는, 따뜻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
신상용의 눈이 완전히 감기는 것과 함께, 괴어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안현과 이유정이 울부짖는 와중에도, 안솔은 여전히 치료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심장 부근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이미 멎어버린 심장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싸늘하게 식어가는 온기만 느껴질 뿐….
안솔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뻥 뚫린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어느새 그녀의 로브를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신상용의 얼굴은 편안하기 그지없다. 비록 피가 흘러나오고는 있어도, 입술은 분명히 미소 짓고 있었다.
이윽고 안솔은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오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안솔이 한 번 더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오….”
툭.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신상용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두근!
그 순간.
두근두근!
안솔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오전 04:41분 완료했습니다. 그래도 3시간은 잘 수 있겠네요. 하하.
신상용 파트 끝났습니다. 다음 회부터 김수현 등장합니다.
이제 전쟁은 팔부능선은 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남은 거야 뭐…. 역관광라이즈밖에 더 있겠나요.(퍽퍽!)
흠. 28K, 17K, 23K. 총합 68K. 이번 주말에 거의 5회 분량에 가까운 내용을 연재했네요.
그래서 10월 29일(화요일)은 쉴 생각입니다.
이번엔 주말을 반납하고 진짜 하얗게 불태웠거든요. 양해해주시리라 믿어요.(해주실거죠?)
머리가 멍하네요. 일단 자야겠어요.
10월 30일(수요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