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47
00446 최후의 요새. =========================================================================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주변에 흐르는 적막함처럼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그냥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오직 천천히, 거의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는 유정이만이 보이고 있었다.
잠시 후, 유정은 무릎을 꿇은 상태로 조각난 고철을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다. 천천히 팔을 뻗어 사방으로 뿌려진 조각을 주워담는다. 그런 유정의 손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떨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발을 들었다. 그리고 고철로 변한 조각 하나를 가볍게 걷어찼다. 유정이 한별이한테 그랬던 것처럼.
땡그랑!
조각난 쇠붙이는 데구루루 굴러가 다른 조각과 부딪쳤다.
“아…?”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탄식에 가까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순간 유정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 막 조각을 잡으려던 손이 차마 잡지 못하고 지나쳐 그대로 땅을 짚었다. 그 상태로 굳어버린 것처럼 유정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 ───. ───.”
누군가 조용히 웅얼거리는 소리가 주변에 흐르는 침묵을 깨었다. 그 순간 번뜩 정신이 들어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되비침!”
한결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아니. 이제 모두 외워 막 발현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윽고 한결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와 우리 전부를 부드럽게 휘감아 들었다. 마력이 흐르는 웅혼한 소리가 귓가를 웅웅 울렸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주변으로 반들반들한 광택이 흐르는 반구형의 보호막이 세워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딱 세 번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뭔가 달라진 세상이 눈에 밟혔다.
문득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깨어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텅 비어있던 머릿속으로 하나 둘 생각이 떠오르고, 차갑게 일어난 가슴이 착 가라앉는다.
‘설마….’
나는 차분히 얼굴을 매만져보았다. 그리고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클랜원들 또한 하나같이 아차 한 얼굴이 되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 번갈아 보는 중이었다.
나는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유정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모아놓은 양손에는 아직도 고철 조각들이 올려져 있다.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서글프게 빛나는 게,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듯한 모습이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누군가 내가 오랫동안 애용해온 무기를 부러뜨렸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너무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화가 나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아마도…. 설마 설마 했지만, 나에게도 필드 효과가 적용된 듯싶었다.
“사용자 이유정. 일어나세요.”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차소림은 나를 한 번 보고는 유정에게 다가가 차분히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기다란 한숨과 함께 클랜원들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곳은 빠르게 지나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들 재정비에 들어가세요.”
지시를 내리자 클랜원들이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클랜원은 무기를 점검하고 어떤 클랜원은 사제에게 부상을 치료받는다.
신재룡은 치료 주문을 외우면서도 한결이가 걱정되는지 연신 흘끗흘끗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가보겠다는 의미로 신재룡의 어깨를 짚은 뒤, 계속 주문을 유지하고 있는 한결에게로 다가갔다.
한결의 얼굴은 파리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뜻 모를 비장함이 감도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니?”
“네. 괜찮아요.”
“무리할 필요는 없단다.”
“아니요. 이제 다 기억났으니까…. 정말로 괜찮아요.”
단호한 목소리였다. 솔직히 전혀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절대 해제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한두 번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한결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래.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능력을 사용할 생각을 한 거야?”
“…그때와 똑같았으니까요.”
“똑같아?”
“네. 그때도 갑자기 서로한테 험악하게 굴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또 이러니까…. 아, 여기 뭔가 나쁜 효과가 있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험악하다 라. 나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잘했다는 뜻으로 한결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었다. 한결은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더니 조심스레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형님…. 현이 형님은 잘 계시겠죠? 구할 수 있겠죠?”
“클랜 로드. 재정비를 마쳤습니다.”
질문과 동시에 선유운에게서 정비를 마쳤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어떤 대답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안현의 생사에 대해서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한결아. 몸에 부담은 가겠지만…. 견딜 수 있다면, 오늘 하루 이 보호막을 몇 번만 더 사용할 수 있을까?”
“아니요. 몇 번이 아니라 계속 지속할 수도 있어요.”
“하루 동안 지속하는 건 불가능해. 일단은 해제하렴. 내가 나중에 필요할 때 따로 부탁하마.”
“네 형님. 저 이제 정말 괜찮아요.”
한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차분히 몸을 돌렸다. 어느새 정비를 마친 클랜원들이 한 곳에 모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어깨가 축 늘어진 유정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놀려 선두로 이동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는 강행군을 할 예정이니, 다들 낙오 없이 잘 따라와주시길.”
‘일단은 빠르게 지나치는데 중점을 두자.’
어서 이 지역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곧바로 행군을 시작했다.
*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고작 사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한 달처럼 느껴지는 사흘이었다고나 할까.
한결에게 말했던 대로 우리는 하루 만에 ‘증오의 대지’를 통과할 수 있었다. 원래는 못해도 이틀은 걸리는 거리였으나, 최대한 강행군을 한 결과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통과 도중 위험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한결의 능력을 사용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패착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상황이 급했고 한결의 상태를 예상치 못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준비를 소홀히 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어찌어찌 ‘증오의 대지’를 벗어난 우리는 곧바로 네 번째 관문인 ‘공포와 환영의 대지’로 들어서게 되었다.
공포와 환영의 대지.
사실상 유적이 있는 장소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관문인 만큼 악명도 매우 높은 지역인데, 정확히는 사용자의 감정에 혼란을 일으키고 마음속에 내재된 공포를 읽어, 그것을 환영으로 구체화하는 무시무시한 필드 효과를 지닌 지역이었다.
가볍게 예를 들어보면, 안솔이 용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것을 두려워한다고 가정해보자.
만일 안솔이 이 지역의 필드 효과에 먹혔다면 아마 우리는 갑자기 출현한 용을 상대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기야 실체는 망인들로 이루어진 환영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 힘은 절대로 무시할게 못되었다.
하여, 그러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나는 마지막 지역으로 들어서며 지금껏 아끼고 아껴온 정심단을 사용했다.
꽤 질이 좋은 것들이라 한 알만 복용해도 웬만한 혼란은 방어할 수 있고, 지속 시간도 긴 편이다. 물론 자주 복용하면 전혀 좋을 게 없는 각성제의 일종이었지만, 수월하게 통과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우우우우우우….
생각 도중 멀리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시선을 들자 칠흑 색으로 칠해진 숲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고요한 밤. 야영지 주변은 조용하다. 이따금 어디선가 우는 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그 소리는 미약한 정도라 오히려 밤의 정적이 두드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무 의미는 없었다. 그냥 복잡한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해보고 싶었다.
“오빠. 불침번 교대 시간이에요.”
그때, 사분사분한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었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한별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멍하니 머리를 끄덕였다.
“…음.”
“오빠?”
“아. 너희 먼저 들어가.”
“네?”
일순간 이대로 잘까 고민했지만, 조금 더 생각하고 싶은 게 있었다.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먼저들 들어가라고. 조금 생각할게 있으니까….”
“그럼…. 계속 불침번을 서시려고요?”
“응. 다음 불침번들도 깨우지 말고 그냥 자게 나둬. 혼자 서도 충분하니까.”
“이미 깨웠는데….”
한별은 조심스럽게 말을 흐렸지만, 나는 더 말을 걸지 말라는 의미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잠시 후, 한별을 비롯한 다른 불침번들이 조심조심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마력 감지를 점검한 후 재차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 이후, ‘공포와 환영의 대지’로 들어온 지도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내일 오전쯤 우리는 이 마지막 지역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로소 유적이 있는 장소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문득 참 징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탐험 같으면 벌써 유적에 도착해 공략을 끝내고 룰루랄라 돌아가고 있을 것 같은데, 여기는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지역인지 공략은커녕 아직 유적에도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 도착하고 나서도 문제다. 통과의례에 불과한 지역이 이렇게나 까다로운데, 안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이 들기도 하였다.
물론 내가 이런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한 명 때문이었다.
‘하여간 안현…. 이 자식….’
바스락.
조용히 안현을 씹고 있을 무렵 나는 반사적으로 상념에서 깨었다. 등 뒤로 마른 잎을 밟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차분히 감지에 집중하자 뒤에서 누군가 우물쭈물하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
“…….”
눈에 보이는 인영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인의 형상이었다.
내가 돌아본 것을 알았는지 여인은 잠깐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여인은 곧 서서히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앞쪽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천천히 걸어오던 기척이 다시 멈췄다.
“저…. 오빠….”
낮은 음성이었지만, 어딘가 남아있는 뾰족한 음색은 유정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증오의 대지’에서 일이 있은 후로, 나와 유정은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유정은 꽤 큰 충격을 받은듯했고 나도 별로 말하고 싶은 입장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말을 거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대답하지 않았다.
“크, 클랜 로드님….”
순간 웃을뻔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타닥, 타닥타닥!
불똥이 튀겼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은 발간 빛을 비추어 주변을 밝게 조명하고 있었다.
유정은 계속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마음을 정한 듯, 나와 마주보는 방향으로 걸어가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을 보아하니 약간은 안됐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제나저제나 나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사용자고, 통과의례를 같이한 사용자고, 나를 친 오빠처럼 정말 좋아해주는 사용자고, 또한 내 말을 가장 잘 따르는 사용자였다.
유정이 어떤 사용자인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스쿠렙프를 부러뜨린 건 후회하지 않는다. 상황상 과했다는 점은 있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유정이를 처음 봤을 때처럼 생각했으면, 어떻게 변하든 간에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욱 상태가 이상해지도록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편이 전투에는 더 도움이 되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생각이 변했다. 유정이는 더는 내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나중에 지구로 같이 돌아가고 싶은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기세 좋게 타오르던 불길이 약간은 죽은듯한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손을 더듬자 쌓아놓은 나뭇가지가 몇 개가 잡혔다. 그것을 모닥불 안으로 던져 넣자, 사그라지던 불길이 다시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르륵!
불길에 비치는 유정의 모습은, 무릎을 꼭 안은 상태로 물끄러미 모닥불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쪽 무릎에 살며시 얼굴을 기대더니 살그머니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유정의 마른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 작품 후기 ============================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내 그대로 묘사하는 게 습관이 된 터라, 아직 빠르게 적는 진행이 익숙하지는 않네요. 적으면서 몇몇 부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계속 적다 보면 익숙해질 거라 생각이 듭니다 🙂
유정에게 있어 스쿠렙프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에요. 단순히 성능을 떠나서, 수현이 자신에게 신경 써주며 준 첫 물건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이전 회에 이 부분을 말씀해주신분이 딱 한 분 계셨는데, 솔직히 매우 기뻤습니다. 그 부분을 그렇게 상세히 기억해주신다는 게 놀랍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굉장히 감사하기도 했어요. 헤헤. (__ )*
아마 내일이면 요새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이제 고생은 거의 끝났다고 보셔도 됩니다. 솔직히 중간중간 구상해 논 고난은 거의 수정하거나 삭제하기는 했지만, 보상은 그대로 놔두었으니 약간 날로 먹는 감도 없잖아 있네요. 하하하.
PS. 요즘 축전을 그려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파슈파티 님, 고장난선풍기 님 감사합니다! 😀 두 분의 축전은 제 뜰에 오시면 볼 수 있습니다!
*
1. 이름(Name) : 차소림(6년 차)
2. 클래스(Class) : 아르쿠스 발키리(Secret, Arcus Valkyri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섬광(閃光), 전투 처녀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7)
7. 신장 • 체중 : 170.7cm • 53.7kg
8. 성향 : 질서 • 신념(Lawful • Belief)
1. 채홍 • 홍예(彩虹 • 虹霓)(Rank : EX)
1. 아르쿠스의 보살핌(Rank : B Plus)
1. 아르쿠스 발키리 창술(Rank : S Zero)
2. 천광(天光)(Rank : A Plus)
3. 발할라의 가호(Rank : A Plus Plus Plus)
(변경 전) [근력 89] [내구 83] [민첩 95] [체력 88] [마력 91] [행운 77] (변경 후) [근력 91] [내구 85] [민첩 97] [체력 89] [마력 92] [행운 84]
『아르쿠스 발키리 세트 권능 : 무지개 오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