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01
00600 죽도록 싸운 자는 살고, 죽도록 도망친 자는…. =========================================================================
태양이 떠올랐다.
해가 점점 중천으로 떠오르며 그림자도 늘어날 무렵.
야영지 중앙 커다란 천막에는, 한 여인이 천천히 기록을 넘기는 중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스물 중 후반은 돼 보이는 여인은, 기록을 비스듬히 든 채 한 줄 한 줄 세심하게 읽으며 차분히 다리를 꼬았다.
오늘은 밖으로 나갈 일이 없어서 그런 걸까? 예의 전투 갑옷이 아닌 활동성을 강조한 편한 복장을 입은 터라, 매끈한 빛을 흘리는 허벅지 살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그랬다.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한소영이었다.
이틀 전 한소영은 남부 원정대의 공략 종료를 선포했고, 이로써 전체 공략의 팔부능선은 넘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모두 끝났다고 보기는 어려운 터라, 아직 북 대륙에 연락을 한 건 아니었다.
제 3전력인 북부 원정대의 공략을 요청하는 시점은, 어디까지나 요새 건설이 시작된 이후여야만 한다. 그러려면 적당한 장소를 찾는 게 선결 과제였고.
물론 그 작업 또한 거의 끝나가는 중이었다. 이미 괜찮아 보이는 장소는 서너 개 선별해 논 상태였으니, 늦어도 내일까지는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안이 결정된다고 해도, 그래도 모든 일이 끝나는 건 아니다.
아직 한 가지 일이 더 남아 있다. 어쩌면 남부 원정대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도망자’에 대한 처리.
아니, 사실 한소영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미 명백한 필벌(必罰)이나 다름없었다. 상대방 쪽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양해를 구해오고 있었으나, 한소영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상황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홀 플레인에서는 ‘도망자’를 용서한 전례가 전무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인식이 좋은 편이 아니다. 가장 좋게 끝난 게 전투 사용자로서의 완전한 매장이었으니, 가히 어느 수준인지 짐작이 가는가?
탁.
한동안 기록을 살피던 한소영은, 모든 기록을 넘기자마자 책상에 놓고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검지로 볼을 톡톡, 두어 번 두드리더니 곧 결정했다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천막을 나선 한소영의 걸음이 향한 곳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른 지휘관의 천막이었다.
이내 천막 내 기척을 느낀 한소영이 한두 번 미약한 헛기침을 했다. 그러다 아차 한 얼굴을 하더니 재빠르게 몸을 돌려 도로 자신의 천막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30분이 지나고 천막을 나온 한소영의 머리는, 예쁜 줄로 깔끔하게 묶여 내려져 있었다. 말총 머리였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후.
“머셔너리 로드.”
살짝 허리를 굽힌 채 입구를 가리는 장막을 걷으며 들어간 찰나, 한소영의 걸음이 우뚝 멈추고 말았다. 여전히 한 명의 기척이 느껴지고는 있었으나, 천막 내부에 있는 사용자는 김수현이 아니었다.
탁자에 앉은 채 한소영을 흘긋 쳐다보는 여인은, 다름 아닌 그림자 여왕 고연주였다.
딱딱히 굳은 한소영을 보며 고연주가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어머. 총 사령관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예쁘게 하시고 말이에요…? 나 그런 모습 처음 보는 것 같아.”
살며시 올라간 눈매나 목소리는 하나같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아차. 아까도 누가 잠깐 앞까지 왔다가 다시 가버렸는데. 혹시 총 사령관이셨어요?”
혹시 천막을 잘못 들어온 건가 한창 생각하고 있던 한소영은,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도발적인 눈빛을 보내는 고연주를 고요히 마주했다.
잠시 후, 한소영이 장막을 닫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묘하게 눈웃음치던 고연주의 눈썹이 아주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렇게 왕을 찾아온 두 여왕이 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머셔너리 로드와 의논해야 할 일이 있어서 왔어요.”
“음~. 의논~? 좋죠. 그런데 이걸 어째요? 지금 우리 그이가 안 보이는데.”
“…네?”
“그이요, 그이. 우리 바깥양반, 요즘 식사도 잘 안하고 계속 돌아다니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저도 아침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왔는데, 아무래도 한 발 늦었나 봐요. 계속 기다렸는데, 통 보이지가 않으시네~.”
고연주가 탁자를 탁탁 치며 종알거렸다.
그런데, 목소리가 참 얄밉다. 거기다 그이, 바깥양반이라는 표현까지.
한소영이 이런 고연주의 말이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 이미 활성화된 초감각은 고연주의 말 하나하나를 명백한 도발로 전해주고 있었으니까. 굳이 표현해보자면 ‘감히 어딜 넘보니?’ 혹은 ‘건드리기 있기 없기?’ 정도랄까.
사실 그림자 여왕의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공적인 입장을 제외하면, 철혈의 여왕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리가 없다.
그렇잖은가. 초저녁부터 김수현과 만날 때마다 무수한 염문을 뿌려대는데, 머셔너리 클랜의 안주인으로서 기분 나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물론 한소영이라고 고연주의 도발을 기분 좋게 받아넘긴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한소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보이고 있었으나, 손에 약간의 힘이 들어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이윽고 한소영은 고연주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탁자에 마주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처음 듣는 말이군요. 식사도 잘하지 않으시고, 계속 돌아다니신다고요?”
“네~. 나 참. 기가 막히죠? 어제도 휴식은커녕, 지역 탐사하러 나간다고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니까요? 누구더라? 이스탄텔 로우에 누구랑 같이 나간 것 같던데…. 아무튼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요.”
그러자 고연주는 시선을 살그머니 피하고는, 어깨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배배 꼬며 말했다.
이것 또한 도발. 말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말하는 태도나 말투를 보면 한소영을 겨냥했다는 감도 없잖아 있었다.
…그냥 탁 까놓고 말해서, 지시만 띡 내리지 말고, 너네 클랜원 관리 좀 잘하라는 소리였다.
한소영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를 갈다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휴식 지시를 내렸음에도 따르지 않았다면, 그건 개인 문제일 가능성이 크지요.”
“뭐, 따지고 보면 그렇기는 하죠.”
“아무튼 이종학씨는 제가 어제 단단히 혼을 냈으니, 아마 더 이상 어제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것 참 고맙네요.”
고연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순간, 한소영은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드물게도 천연스러운 기색이 약간이나마 엿보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분도 참 안타깝네요.”
“네?”
“아. 그냥 요. 그렇게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아마 저라면 진작에 말렸을 것 같아서. 어쨌든, 같은 클랜이잖아요?”
“……?”
“그렇게 꽉 막힌 분도 아닌 것 같고. 안주인정도 되는 분이 말씀하시면 들을 법도 한데….”
“…하?”
이번에는 고연주의 입술에서 새된 반문이 흘러나왔다.
한소영의 말 또한 크게 문제는 없으나, 역시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여지가 있다.
말인즉 너는 그이, 바깥양반이라고 부르면서 그거 하나 내조하지 못했냐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너 정말 안주인 맞아?’라는 말.
“호호, 호호호호…. 우리 수현이 원래 좀 그런 면이 있어서요. 워낙 겉으로 표현을 안 하시기도 하고, 또 고집도 세요. 그이는 한 번 결정 내린 일은 어지간해서는 번복하지 않아요.”
“흐음. 뭐, 알겠어요.”
한소영 또한 아까 고연주가 그런 것처럼, 어깨를 들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연주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전혀 좋지 못한 미소가.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형! 오늘도 힘세고 좋은 아침!”
누군가 장막을 활짝 젖히며 힘차게 걸어 들어왔다. 한 손에 창을 든 사내는, 어젯밤 이후로 완전히 원기를 회복한 안현이었다.
“누구냐고 묻는다면 내 이름은 안….”
그러나 기세 좋게 천막 안으로 걸어 들어온 안현은, 두 탁자에 앉은 여인을 보는 순간 절로 기세를 꺼트릴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차가운 한기가 사정없이 몸을 휘감아오는 기분이었다.
서로를 지그시 노려보는 두 여인을 보며 안현은 직감할 수 있었다.
아. 여기 있어봤자 득 될 건 없겠구나.
“…저 그냥 나갈게요.”
그렇게 바로 등을 돌리려고 했지만.
“어머. 현이 왔네?”
“기공창술사?”
두 여인이 놓칠세라 안현을 붙잡았다.
불길한 기운. 어느새 닫힌 장막을 바라보며 안현은 속으로 절규했다.
한 발짝만!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됐는데!
“현아. 혹시 우리 그이 못 봤니? 여기 총 사령관 님이 공적으로 볼 일이 있다고 하셔서.”
고연주가 유난히 공적으로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이? 아…. 형이요? 저도 모르죠. 애당초 여기 계신 줄 알고 온 건데요.”
안현은 힘없이 돌아보며 곧바로 회답했다. 그러자 고연주가 잘했다는 양 활짝 미소 지었지만, 반대로 한소영의 눈매가 아주 조금 가늘어졌다.
“아, 안녕하세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
기껏 인사해도 고개만 까닥이는 걸로 대신하는 한소영.
뭔가, 이상하다. 안현은 본능적으로 말조심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대화가 힘들 때는 아예 화제를 돌려버려. 그게 최고의 방법이다.’
한때 김수현에게 받은 기타 교육을 떠올린 안현의 머릿속에, 마침 좋은 생각 하나가 번쩍 떠올랐다.
“아차차. 그런데요. 혹시 형님 오늘 아침 괜찮으셨나요?”
“응? 아니? 못 봐서 모르는데, 괜찮으시냐니?”
“다른 건 아니고, 어제요. 형이랑 잠깐 얘기를 나눴는데…. 조금 힘들어 보이시는 것 같아서요.”
“왜?”
“그냥 중간에 혼잣말로 힘들어 죽겠다고도 하시고, 얼굴빛도 안 좋으시고…. 뭐랄까, 되게 외롭고 힘들어 보이셨어요.”
“…힘들다고, 직접 말씀을 하셨다고?”
그 순간이었다.
그냥 화제나 돌릴 겸 말한 것에 불과했는데,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일순 안현은 말을 잘못한 건가 고민했으나, 이왕 내친 김이었다. 거기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니, 그대로 머리를 움직이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잠시 후.
“불안하네.”
얼굴을 찌푸린 고연주가 탁자를 짚고서 몸을 일으켰다.
“총 사령관. 미안한데 잠깐 자리 좀 비워야겠어요. 수현을 찾아야 할 것 같거든요.”
“…별로 상관없기는 한데. 그냥 기공창술사의 말대로, 혼잣말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요.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그 사람, 어지간해서는 속으로 눌러 담지, 겉으로 표현하는 사람 아니에요. 지금껏 같이 살면서 수현이 힘들다고 말하는 거 들어본 적, 세 번도 안 돼요.”
“…….”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손톱을 씹으며 혀를 찼다.
“설마 또 예전처럼 무리해서 정신이라도 잃은 건가? 완전히 치료된 줄 알았는데. …쯧.”
“…네?”
그리고 이어진 중얼거림을 들은 순간, 한소영도 몸을 일으켰다.
무리?
기절?
사실 반문할 것도 없었다. 초감각은 고연주의 말을 진실이라고 전해주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안현. 너는 부상자 관리소에 가봐. 나는 남문 쪽 경비 초소부터 들러볼 테니까.”
“예, 예.”
고연주가 지시를 내리자, 안현은 곧장 회답하고서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듯이 천막을 나섰다.
이윽고 고연주가 한소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도 같이 찾아볼게요.”
한소영 또한 바로 회답했다.
고연주는 마음에 들지는 않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처음으로 뜻을 맞춘 두 여왕이 서로 동시에 천막을 나섰다.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왕을 모시…. 아니 찾으러.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메모라이즈도 어느새 600회까지 왔네요.
문득, 예전 1부 때 독자 분들과 나눴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로유진 : 개인적인 바람이기는 하지만, 메모라이즈 완결은 600회 정도에서 내고 싶어요!
Reader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eader2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eader3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로유진 : 아니 왜 웃으시는 거죠? 저는 정말로 진심인데요?
Reader : X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가 잘도 600회에 완결하겠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eader2 : 진심이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600회는 무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최소 800회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eader3 : ㄴ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보기에는 1000회도 넘어야 함 ㅋㅋㅋㅋㅋㅋㅋㅋ.
로유진 : (부들부들.) 두고 보세요!
…이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하….
독자 님들 예지력 상승~! ‘- ^*(퍽퍽!)
어흠, 어흐흠.
아무튼 600회 축하해주신 독자 분들 모두에게, 정말로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지금이야 이 꺌꺄라꺙꺙 같은 슬럼프에 허우적거리고는 있지만, 곧 페이스를 되찾으리라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6월도 다 끝났고, 오는 7월 1일부터는 다시 정상적인 시간에, 더 좋은 내용으로 찾아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