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00
00599 죽도록 싸운 자는 살고, 죽도록 도망친 자는…. =========================================================================
어두운 구덩이 안.
신재룡이 죽어가고 있다.
‘저는….’
신재룡을 바닥에 눕히며 지그시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
또 하나의 내가 품에서 엘릭서를 꺼내 들었다.
‘신재룡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마개를 열어 병을 기울인다.
엘릭서를 먹이는 또 하나의 나는, 정말로 신재룡을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다. 바로 눈이 떠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보니 밤늦게 돌아온 천막이 그대로 보인다.
중앙에 놓인 탁자, 장막으로 가린 입구, 반듯하게 넣어진 의자 등등. 모든 게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된 일일까? 꿈이라도 꾼 걸까?
문득 살에 닿는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층층이 쌓인 피로감이 전신을 무겁게도 짓누른다.
하지만 나는 잠을 더 자는 것 대신, 침대에서 일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왠지 모르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거니와, 억지로 잠이 든다고 해도 아까와 같은 꿈을 꾸는 건 더는 사양하고 싶었다. 요즘 안 그래도 심경이 복잡한데….
장막을 걷고 밖으로 걸어나가자 아직은 어스름한 새벽 하늘이 보였다.
마침 이 시간대라면, 곧 1차 탐색 조들이 활동할 시간이다. 아직 별다른 지시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구덩이 공략에 참가한 사용자들은 오늘도 가만히 대기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느니 몸을 움직이고 생각도 잊을 겸, 탐색 조에 참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어제도 그랬듯이.
결국 첫 생각으로 아침 일정을 정한 나는 북쪽 초소를 향해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그쪽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어제처럼 밖으로 나가려는 탐색 조들과 마주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 예상은 절반만 들어맞았다.
“목적. 주변 경계 및 요충지 탐사.”
“C – 1조 총원 12명. 탐색 조 이스탄텔 로우의 이종학 외 11명 확인.”
“총 사령관의 허가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나가셔도 좋습니다.”
북쪽 경비를 서고 있던 사용자들이 간단한 확인 절차를 마쳤다. 이종학은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더니 경비들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돌아보며 푹 한숨을 쉰다.
“후. 죄송하지만 말씀은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사용자 이종학.”
“아니요, 안됩니다. 탐사에 도움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정말 감사하나, 이번만큼은 정중히 거절하도록 하지요.”
“…….”
C – 1조 탐색 조장인 이종학이 단호한 목소리는 물론, 머리를 세차게 가로젓기까지 한다. 그 명백한 의사 표현에 나는 머리를 갸웃하고 말았다.
“아니 왜….”
“탐색은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니까요. 그러나 머셔너리 로드는 우리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아시잖습니까.”
“하지만 어제는….”
“머셔너리 로드. 제발.”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으며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는 이종학. 나는 어안이 벙벙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제 탐사 합류를 요청했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호들갑까지 떨면서 환영해주었다.
그러면 아예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하던가.
어제는 기분 좋게 웃으며 같이 나가게 해주었으면서, 왜 오늘은 안 된다고 하는 걸까? 그것도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저 좀 살려주십쇼.”
그때였다.
이종학이 갑자기 내 어깨를 부여잡더니 한없이 애절한 목소리로 도리어 부탁해왔다. 당최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정말로 간절해 보이는 얼굴이라 절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 말입니다. 어제 탐사 다녀오고 우리 클랜 로드한테 엄청 깨진 거, 아십니까?”
응? 깨졌다고? 이종학의 클랜 로드라면…. 당연히 한소영이잖아.
“아니.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왜….”
“머셔너리 로드 때문에요.”
“……?”
“내가 분명 구덩이 공략에 미 참가한 사용자들만 데리고 나가라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엄한 머셔너리 로드는 붙잡고 나가느냐! 이러면서 엄청 욕…. 아니 욕은 하지 않으셨지만!”
갑자기 이종학이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우리 클랜 로드, 한 번 화나면 엄청 무섭단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아니, 모르시겠죠! 당해본 사람만이 아니까요!”
엄청 이라는 말을 연발하고,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억울해하는 이종학.
…그, 그거야 나도 알지. 무감정한 목소리로 잘못한걸 하나하나 세심하게 읊어주고, 그러면서 물끄러미 바라볼 때의 한소영은…. 흠. 좀 무섭군.
“사실 관계를 말씀 드리면 되지 않았을까요? 사용자 이종학이 저를 찾아오신 게 아니라, 제가 직접 찾아와 부탁한 거라고요.”
“예, 그렇죠! 그렇고 말고요! 확실히 그렇게 말씀 드렸습죠! 그런데 그렇게 말하니까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덜컥 받아들였냐고! 그리고!”
벌컥 하소연(?)을 하던 이종학이 돌연 말을 멈추더니 느닷없이 얼굴을 최대한 무표정해 보이도록 가라앉혔다. 그러더니….
잠깐. 저 얼굴은?
“어쨌든 허락하신 건 사용자 이종학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괜히 머셔너리 로드한테 책임 전가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렇게 또 까였다는 말입니다!”
이종학은 한소영의 말투를 흉내 내듯이, 약간 높으면서도 고저 없는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순간 커다란 웃음이 터질 뻔 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설마 한소영이 저렇게 쫑알쫑알 말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랬다고 생각하니 꽤나 웃겼다.
“제가 정말 화가 나는 게 왜인지 아십니까?”
이제는 아예 한풀이를 하려고 하는지, 한 번 터진 이종학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아, 그래요. 아무리 이런 각박한 세상이라고는 하나, 사람이 살면서 걱정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 안 그래도 옆구리가 시려 서러워 죽겠는데, 두 분만 그렇게 뜨듯~하시면 다냐, 바로 이 말입니다!”
“…예?”
“젠장, 솔로 부대 만세! 만세! 만세!”
“…….”
…느닷없이 초점이 상당히 어긋난 말들이 들려왔지만, 나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클을 걸기에는, 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서글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차례 크게 자폭한 이종학은 “흠흠.” 곧 어설프게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군요.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잠시만….”
“모쪼록, 제 입장을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결국 이종학은 머리를 꾸벅 숙이며 힘없이 돌아섰고, 그대로 걸어가버리고 말았다. 서로의 오해를 풀지도 못한 채.
나는 그런 이종학을 붙잡지 못했다. 아니, 붙잡을 수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오해를 푸는 건 이종학을 두 번 죽이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
그렇게 이종학이 떠남으로써 기껏 세워둔 오전 일정이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돌연 서늘한 새벽 공기가 바람에 실려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이렇게 가만히 있기는 싫으니 무어라도 해야 할 텐데. 부상자 관리소라도 가볼까?
문득 신재룡과 헬레나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둘 다 심각한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다행히 적절한 치료를 받아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늘 밤사이, 관리소에서 보내온 전령으로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비록 둘이 깨어나자마자 미약한 어지럼증을 호소한 탓에 별다른 말을 나누지는 못했지만.(안정이 최우선이라는 사제의 말에 거의 떠밀리듯이 나와야만 했다.)
현재 시간이 약간 이르기는 하나, 그래도 지금은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몸을 돌려 부상자 관리소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새벽 이미 한 번 찾아갔던 만큼 두 클랜원이 회복 중인 천막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 클랜 로드?”
그러나 천막 안으로 스리슬쩍 들어간 순간, 나는 약간 의외의 상황과 마주해야만 했다.
헬레나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그 자리는 안솔이 차지한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그리고 옆에 놓인 간이 침대에는, 신재룡이 상반신만 일으킨 채 나를 휘둥그래 쳐다보고 있었다. 허벅지에 놓인 음식 그릇을 보니 아마 한창 식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드, 들어오시죠.”
황급히 입을 닦은 신재룡이 그릇을 소리 나지 않게 치우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도로 나가면 모양새가 조금 그럴 것 같아, 나는 사양 않고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약간은 미안하니 일찍 자리를 비켜주어야겠지.
“아직 시간이 많이 이른데. 배가 많이 고프셨나 보군요.”
“예. 하루 내내 쫄딱 굶었는데 별수야 있겠습니까. 하하하.”
침대 바깥쪽에 걸터앉으며 말하자 멋쩍어하는 얼굴로 웃어 젖힌다. 신재룡의 구김살 없는 미소를 보니 마음이 조금 불편해지는걸 느꼈지만, 간신히 억누르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좋은 현상이지요. 식사를 원한다는 건 건강하다는 증거니까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클랜 로드는 식사하셨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 순간적으로 가슴이 뜨끔해졌다.
엄밀히 말하면…. 그동안 식사를 아주 안 한 건 아니었으나 거의 한두 술 정도 뜬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입맛도 없거니와 속도 거북해 음식이 잘 넘어가지가 않았다.
“그냥…. 아직 식사 시간이 아니라서요.”
“으음. 하기야 그렇겠지요. 그래도 여기는 언제든지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가 돼있는 모양이더라고요.”
“부상자 관리소니까요. 아차. 그나저나 헬레나는 어디간 거죠?”
“헬레나양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깨어난 이후 계속 어지럽다고 갑갑하다고 투덜대더니, 결국에는 산책이라도 하겠다고 나가버렸거든요.”
“말씀대로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요.”
“허허…. 아, 솔양은 방금 잠들었고요. 아마 우리를 밤새 간호하느라 많이 지쳤을 겁니다.”
흠, 그런가. 밤새 간호했다 라.
그러고 보니 안솔과도 하나 이야기할게 있는데…. 그래도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
그래. 어차피 이제 막 2차 공략도 끝났겠다. 당분간 크게 바쁜 일은 없을 테니, 느긋하게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는 잠들어 있는 안솔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도로 신재룡을 응시했다.
“아무튼 좋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특히 현이가 정말 많이 걱정했습니다.”
“이런, 미움 받을 줄 알았는데요. 그래도 걱정해주었다니 기쁘네요. 하하하.”
나는 이제 슬슬 자리를 비켜주기로 마음먹었다. 식사나 산책을 할 정도라면 거의 회복됐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아마 내일쯤이면 완전히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때 남은 일을, 아니 해야 할 일을 처리하면 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푹 쉬게 해주고 싶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 일어나십니까?”
벌써 가냐는 듯한 말투에 나는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예. 아직은 휴식이 우선이기도 하거니와, 음식 다 식겠습니다. 식사 방해해서 미안했습니다.”
“아…. 잠시만요. 클랜 로드.”
“예?”
“가시기 전에…. 실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요.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신재룡이 얼른 입을 열었다. 조금이지만 다급하다 생각되는 목소리였다.
어쨌든 거리낄 것은 없어 나는 가볍게 턱을 까닥거렸다.
“그럼요. 말씀하시죠.”
“그게….”
“……?”
“혹시, 저를 구해주셨을 때, 주변에 다른 사용자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다른 사용자?
나는 의아한 기분을 느끼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있었던가?
아니. 없다.
신재룡에 집중하느라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때 느낀 바로는 파악된 기척은 하나뿐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주변에서는요.”
“음…. 그렇습니까….”
무언가 일이 있는 걸까? 돌연 신재룡의 얼굴에 한 줄기 수심이 어렸다. 하지만 그건 잠시에 불과했다.
“알겠습니다. 괜한걸 물어봐서 죄송했습니다.”
곧 쓰게 웃은 신재룡이 그늘진 어둠을 걷어내며 차분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상관없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리고 바로 천막을 벗어나려는 찰나.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클랜 로드.”
한 번 더, 신재룡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구해주셔서, 감사하다.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채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대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
갑작스럽게 온몸의 힘이 빠지는 듯한, 심한 탈력감이 전신을 엄습해온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도로 복잡해졌다.
그러나 조금씩 비틀거리는걸 느끼면서도, 나는 억지로 다리를 움직였다.
…이제는 또 어디로 가야 하나.
아니 그전에, 나는 왜 아침부터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 걸까.
시간이 흐른다.
멍한 기분으로 하염없이 걷던 와중 문득 얼기설기 세워진 울타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덧 야영지 외곽 부분에 다다른 것이다.
머리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서서히 동이 터오는 푸른 하늘이 보인다. 아직 새벽이 채 가시지 않아 조금은 흐릿하기는 했지만.
나는 천천히 울타리에 걸터앉은 후, 연초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오늘 아침에 꿨던 꿈.
그리고 그에 관한 생각.
사실상 별로 마주하고 싶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의도적으로 방황하며 피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 자신의 내면과 연관된 일이었으니까.
1회 차부터 2회 차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수많은 죄 있는 사용자들을 살해했지만, 한편으로는 죄 없는 사용자들을 살해한 적도 있다.
동료를 살려본 적은 있지만, 그만큼이나 잃어본 적도 많다.
그러한 과정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지울 수 없는 내면의 상처들이 생겨났다.
계속해서 새겨지는 상처들을 견디기 위해서는 스스로 살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하나의 선을 긋고, 흑백 논리로 구분하며, 사용자들을 도구와 연관 짓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하나의 가치관이 생겨나고, 그것을 나만의 모토로 삼아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 활동해왔다.
내가 2회 차로 돌아올 때도 마음먹은 건 단 하나뿐이었다.
무조건 형과 한소영에게만 집중하겠다는 일종의 목적.
그 외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말인즉 다른 사용자는, 사실상 그 목적을 이루려는 일종의 수단으로 생각해온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제, 나는 신재룡을 구했다.
물론 누가 봐도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구했다는 결과 자체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정작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신재룡을 구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때.
그러니까 대비책으로 생각했던 안솔의 기적이 무산되고, 클랜원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머릿속으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그저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됐다.
‘머셔너리 로드. 조금 더 합리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유지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살릴 수 있는지, 살릴 가치가 있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해보고 움직여야만 했다.
심지어, 엘릭서를 사용할 때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내 클랜원들을 구하겠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습니까?’
그래. 그 당시는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잘 몰랐지만, 어쩌면 다른 미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재룡도 구하고 엘릭서도 아끼는, 내가 생각하는 입장에서의 최선의 미래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택은 신재룡의 생존이라는 최선의 결과를 가져왔다. 구하는 모든 과정에서 잠시라도 지체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바로 거기서 전해져 오는 괴리감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 지금에서야 느껴진다. 지금껏 나를 지탱해준 가치관과 180도 다른 그때의 행동이, 서로간의 차이가 극명해지며 비로소 간극이 드러나는 것이다.
다른 사용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박수 쳐줄지도 모르지만…. 그 간극은, 나에게는 지독하기 짝이 없는 모순이었다. 이제껏 이 지옥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해 준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랄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지.
이럴 거면서 안현 앞에서는 무슨 잘난 척을 그렇게 했는지.
치익, 치이익.
“…응?”
돌연 아주 살짝 따뜻해진 기운에 아래를 쳐다보자, 어느새 연초 끝까지 타 들어간 불씨가 손가락에 닿은걸 볼 수 있었다. 너무 생각이 길었던 모양이다.
정신이 돌아오자, 갑작스럽게 목이 타는 기분이 들고 이마에 어지러운 감각이 맴돈다.
그러고 보니 구덩이에서 나온 이후 제대로 휴식했던 적이 있던가?
“…에휴.”
누굴 욕하냐. 내 잘못인데.
절로 한숨이 나왔으나, 일단은 연초를 버리고 밟아 비볐다. 그리고 연초를 추가로 꺼내며 확인 차 시선을 떨어트리려던 찰나, 나도 모르게 머리를 떨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어.”
느닷없이 어지러움이 한층 심해지며, 극심한 현기증과 갑작스러운 수마가 찾아 들었다.
툭!
거의 동시에, 무언가 뜨끈한 액체가 인중을 타고 흘러 지면에 툭 떨어졌다.
작지만, 붉은 핏자국. 반사적으로 코를 훑자 손등에 혈흔이 묻어 나온다.
코피임을 확인한 순간,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에 갑갑함이 물밀듯이 차오른다.
“진짜….”
우선은 현기증부터 안정시킬 생각에, 나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이마를 받쳤다.
“뭐…. 이러냐….”
그리고 밀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해,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자정에 다음 회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