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64
00663 2. 지옥 왕. =========================================================================
사실 지옥 대공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도망치는 경우도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미물에 불과한 존재라면 모를까. 그간의 반응으로 미루어보면, 지옥 대공은 내게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또한, 정말 일이 잘 풀려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김한별의 의심을 피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렇게 여러모로 곰곰이 따져보자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결국에는 직접 담판을 짓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소리였다.
내 계획을(사실은 계획이랄 것도 없지만.) 들은 김한별은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나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화정이니 겁화니 이런저런 말들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이상, 혼자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한별은 필요 이상의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나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지옥 대공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서.
지옥 대공을 찾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어탑(御榻)을 발견한 순간 그 아래 앉아 있는 붉은 머리칼의 여인을 볼 수 있었다.
한 가지 의외인 건 지옥 대공이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 어탑 앞에는 시꺼먼 갑옷을 입은 형상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부복하고 있었다.
“음?”
“아.”
내 기척을 느낀 걸까? 지옥 대공과 시커먼스가 동시에 나를 돌아본다.
이윽고 투구 안쪽 푹 꺼진 눈구멍을 마주한 순간, 나는 김한별이 언급한 ‘해골 기사’ 를 떠올렸다.
‘그럼 저 검둥이가….’
“호. 조금 더 걸릴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찾아왔구나.”
지옥 대공이 대견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해골 기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퀭한 눈구멍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돌연 허리춤에 걸린 멋들어진 반사광을 번들거리는 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대공이시여. 그럼 저 분이….”
“음.”
지옥 대공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해골 기사는 짧은 탄성을 지르며 완전히 나를 돌아보았다. 애초 뿔 투구를 장착한 상태였거니와 해골이니만큼 표정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에서 왠지 모르게 신기해하는, 혹은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철그렁, 철그렁!
이윽고 갑옷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다가온 해골 기사가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머리를 기울여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기까지.
‘…강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보다 장대한 체구는 물론,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강대한 기운과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긴장된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거슬리는 쇳소리가 귀를 긁는가 싶더니 돌연 해골 기사의 허리가 꾸벅, 절반으로 접혔다.
‘뭐, 뭐지?’
그냥 간단한 인사가 아닌, 허리를 90도 이상으로 굽혔을 정도로 정중한 인사였다. 솔직히 적대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주얼 상 ‘흥. 네가 바로 그놈인가.’ 정도의 인사를 예상한 나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무어라 말도 못하고 있는 동안 해골 기사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리고 양손을 살포시 마주잡고는 딱딱, 이빨을 맞부딪쳤다.
“아…. 저, 처음 뵙겠습니다.”
“?”
“그동안 대공께 말씀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로,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
“아 이런.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토벌의 임무를 부여 받은 제 3군단장 베히모스라고 합니다.”
“???”
아마 내가 안솔과 같은 능력(?)이 있었다면 지금쯤 정수리에 수십 개의 물음표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왜, 왜 이렇게 예의가 바른 거지?’
여태껏 보고 겪어온 마수와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태도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대 악마들마저 포기한 지옥이 이렇게나 개방적인 세상이었나?
그러나 해골 기사는 내 의문은 아랑곳 않은 채 연신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같이 넘어오신 분을 지금껏 성심껏 모시기도 했죠. 하하하.”
그래. 그렇구나. 그건 확실히 고맙기는 한데.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나는 당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뜻을 담아 어탑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지옥 대공은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생글생글 웃고 있을 뿐.
“아차. 그러고 보니 이야기를 하러 오셨군요. 제가 너무 혼자서 떠들었나 봅니다.”
쓰, 쓸데없이 눈치도 빨라.
“그럼 이만 자리를 비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멀리 가지는 말거라.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부를 테니.”
이윽고 해골 기사가 재차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자 지옥 대공이 차분히 말을 덧붙였다.
“기억해주십시오. 저는 제 3군단장 베히모스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해골 기사, 아니 베히모스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시꺼먼 갑옷을 입고 무게만 잡고 있지 않았다면 나름 괜찮은 첫인상을 받았을 텐데.
간신히 혼란을 가라앉힌 후 나는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여기까지 온 이상 전후 사정은 아무래도 좋다. 지금 당면한 목표는 오직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하나뿐이니, 그거 하나만 신경 쓰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눈동자에 가득 힘을 주며 어탑에 앉은 지옥 대공을 한껏….
“계속 그렇게 쳐다보거라. 그럴수록 괴롭혀주고 싶은 마음이 커지니까 말이다.”
노려보려다가, 곧바로 표정을 풀고 말았다. 아까 지옥 대공이 내 얼굴을 핥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자 “풋.”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음, 그럼.”
이윽고 지옥 대공이 미끈한 오른 다리를 쭉 피며 들어올렸다. 이어서 들어올린 허벅지를 왼쪽 허벅지에 살며시 얹고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지긋한 시선을 보냈다. 다리 한 번 참 섹시하게도 꼬는군.
“그대, 이제는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었다 봐도 무방하겠지?”
“…그래.”
그 순간 나를 보며 눈웃음을 짓던 지옥 대공의 두 눈에 갑작스레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너무나 찰나 간에 스치고 지나가 혹시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거라.”
일견 감미롭게 들리는 목소리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묘하게 색정적으로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문득 지옥 대공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더욱 진해진 것만 같은 착시가 일었다.
한순간 아찔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보다는 네가 할 말이 있지 않은가?”
“이 몸이?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자 지옥 대공은 피식 웃더니 거만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사실 그대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하지만 나는 별로 아쉬운 입장이 아니라서 말이다.”
순간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싶었다. 기껏 얘기를 하자고 해놓고 이딴 식으로 반응하면 도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그러나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게, 그 말대로 나는 지금 지옥 대공의 손아귀에 붙잡힌 상태였다. 또한 철저한 약자이기도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구원받은 입장이었다. 결국에는 아쉬운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라는 소리였다.
허나 그렇다고 다짜고짜 보내달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 우선은 지옥 대공의 의도를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목숨을 구해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낯 간지럽구나. 간을 볼 생각이라면 집어치우거라. 혓바닥이 긴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주 단칼에 끊어내는군.
“좋아.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어느새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나는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네가 나를 살려준 이유는 아무래도 이 힘 때문이겠지?”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으나 지옥 대공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턱을 괴고 다리를 꼰 채 나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
“그렇게 생각해보면 상황은 간단해지지. 너는 모종의 이유로 화정의 힘을 원하고 있다. 아닌가?”
“흠.”
본론으로 들어간 이후 지옥 대공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그냥 단순한 콧숨에 불과할 뿐이지만, 나는 무언의 긍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좋아. 그러면….
“네가 원하는 만큼 더 이상 구구절절 늘어놓지는 않겠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말해봐.”
“…응?”
“네가 나를 죽이지 않고 살린 이유 말이야.”
말 그대로였다. 지옥 대공은 나라는 인간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화정을 품고 있었기에 나름 특별한 대우를 받은 거라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지옥 대공이 정말로 화정의 힘을 원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왜 나를 죽이고 화정을 빼앗는다는 아주 간단하고도 손쉬운 방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일까?
이것 또한 몇 가지 이유를 예측할 수는 있겠으나 나는 여기서 말을 아끼기로 했다. 이제는 지옥 대공이 입을 열 차례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지옥 대공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뭐, 그래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다행이야.”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방금 말은 내가 방향을 잘못 잡은 게 아니라는 방증이었으니까. 말인즉 지옥 대공에게는 나를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소리였다.
“세세한걸 따지지 않고 크게 보면, 확실히 그대의 말은 정답에 가깝다 볼 수 있다.”
지옥 대공이 인정했다. 이러면 자연스레 내 목소리가 높아진다. 물론 그렇다고 갑질을 하거나 개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말마따나 세세한 이야기도 들어봐야 모든 게 명확해질 테니까. 하지만 최소한 ‘내가 네가 원하는걸 들어줄 테니, 그 대신 우리를 보내달라.’ 라는 말을 꺼낼 여지는 생긴 셈이다.
“허나.”
그때 돌연 반전을 알리는 단어가 지옥 대공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정작 그대는 지닌 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군. 가까이 오거라.”
그렇게 말한 지옥 대공은 돌연 어탑에 걸친 손을 들어 이리 오라는 듯 검지를 까닥까닥 움직였다. 마치 애완견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으나 속으로 참을 인을 되뇌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약 2미터 정도 거리를 남기고 걸음을 멈추려 했다. 그러나 지옥 대공의 집게 손가락은 더 다가오라는 듯이 계속해서 움직였고, 결국 바로 앞까지 다가가고 나서야 손가락을 접었다.
지옥 대공의 입술이 떼어졌다.
“그러니까….”
잠시 후 살짝 말을 흐린 지옥 대공이 느닷없이 손을 뻗어왔다. 내밀어진 손은 여지없이 내 가슴에,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심장 부근에 닿았다.
지옥 대공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치 무언가를 느끼려는 것처럼.
“태고의 격을 지닌 화정. 영원히 타오르는 정화의 불. 이게 바로 그대가 가진 힘의 정체다.”
한순간 돌연히 마음이 변한 건가 걱정이 들었으나, 이어진 음성은 혹시 모를 심장이 뜯길 걱정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느긋하게 눈을 뜬 지옥 대공은 이번에는 양손을 움직여 내 손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어딘가로 끌고 가려는 듯 느릿하게 당기기 시작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억지로 끌고 가는 느낌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제는커녕 오히려 무척 따뜻한 굉장히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저항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내 오른손은 나긋나긋한 손길에 이끌려 지옥 대공의 봉긋한 가슴으로….
‘어, 어?’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을 때는 이미 한참이나 늦은 상태였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 내 손바닥은 여지없이 지옥 대공의 왼쪽 젖가슴을 감싸듯이 덮었으니까.
이내 손바닥에 물컹하면서도 살살 녹을 듯한…. 아니,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상의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질 즈음.
“느…. 느낌이 어떻느냐?”
마치 첫날밤을 맞이한 새색시마냥, 양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지옥 대공이 수줍은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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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늦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