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76
00675 3. 한편, 같은 시각. =========================================================================
장내 가장 깊숙한 장소까지 들어간 이후.
베히모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 순간, 나는 빛무리가 폭사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쏘아지는 붉은 빛 줄기는 용암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기암괴석을 곧바로 쳤고, 이내 둘레를 두르듯이 감싸며 환한 빛을 분사했다.
깡!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붉은 빛 때문이 아닌, 기암괴석 자체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맑은 철성을 내는 광경을. 이내 둘레를 감싸는 빛이 흡수되듯이 사그라지고, 동시에 우두둑 소리가 나며 기암괴석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정말이지 굉장한 기세였다. 비단 보이는 부분에만 겁화를 방출하는 게 아닌지, 기암괴석 사방에 흐르는 용암이 선명한 빛을 발하며 물결을 일렁였다. 이 정도라면 해일이 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기세였으나, 이상하게도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빛무리로 일어나는 현상만 제외하면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몇 차례나 겁화가 작열하고 사그라질 때마다 맑은 철성이 울렸고, 그에 따라 기암괴석의 크기가 점차 줄어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됐을 무렵, 기암괴석이 가리고 있던 붉은 빛을 방출하는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찬연한 빛이 감도는 사이로 자태를 드러낸 여인은 당연히 게헨나였다. 겉모습은 이전과 거의 다를 바 없으나 딱 하나, 풍성하게 늘어트렸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묶어 넘겼다. 고요하면서도 진지한 눈으로 기암괴석을 다루는 모습을 나는 넋을 잃고 응시했다.
“허…. 설마….”
그때 바로 옆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베히모스는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거듭 탄식을 터뜨렸다. 무에 그리 안타까운지 이따금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까지.
“우선은 나갑시다. 아직 작업이 끝나지 않고 막바지에 이른 이상,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냥 조용히 구경만하면 안될까요?”
“이미 우리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럼에도 저러시는 건, 지금 그 정도로 집중하고 있다는 겁니다.”
“…….”
하기야 생각해보면 그렇다. 겁화의 파괴력은 화정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로 어마어마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저 기암괴석은 도대체 어떤 물질인지, 겁화를 상대로 어느 정도 견뎌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그 말이 맞는다는 생각에 나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리고 베히모스의 손에 이끌려 약 50 미터 정도 걸음을 되돌렸다.
돌아가는 와중에도 베히모스는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 무언가 굉장히 아깝다는 듯이 “어떻게 저런….” 이나 “정말 너무하시네….” 등등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당최 왜 저러는지를 몰라 멍청한 기분으로 쳐다보고 있자, 돌연 베히모스가 쩝 입맛을 다시며 걸음을 멈췄다.
“에….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설명을 드려야 할지….”
정말 곤란하다는 듯 인중 부분을 툭툭 건드리던(도저히 긁는다고 볼 수가 없었다.) 베히모스는, 갑자기 용암이 흐르는 강에 몸을 빠트렸다. 그리고 첨벙거리며 어딘가로 걸어가기까지. 나보고는 몸이 녹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면서 자기는 잘도 걸어간다.
그리 멀리 가지 않고 몸을 멈춘 베히모스는, 재차 몸을 돌려 나를 보며 팔을 뻗었다. 이내 베히모스가 손을 얹은 그 무언가는, 다름 아닌 피를 머금은 듯 시뻘겋기 그지없는 기암괴석이었다.
“신열석, 활화석…. 지금 보시는 암석에는 많은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암석을 일컫는 정확한 명칭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름없는 돌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느닷없이 베히모스의 음성이 진지해졌다.
“이름없는 돌이요?”
조심스레 반문하자 고개를 크게 끄덕인 베히모스는, 곧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야장에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이 일대는 용암과 황무지로 이루어졌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거의 대부분이 용암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간단하게 생각해봅시다. 기본적으로 용암이라는 건 엄청나게 뜨겁지 않습니까? 흘러 지나치는 모든 것을 녹여버릴 정도로요. 그런데 이거 말입니다. 이거요.”
베히모스는 얹은 손을 움직여 툭툭 두들기며 기암괴석을 강조했다.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 뜨거운 용암 속에서 이 암석이 이렇게나 굳건히 머무를 수 있다는 게요. 아. 물론 그렇게 따지면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지면도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쏟아지는 용암 폭포의 특성상, 아마 끝없이 녹아내려 진작 구멍이 뚫리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궁금하기는 했다. 잠깐 흐르다 마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계속해서 용암이 쏟아지고 흐르는데, 여기 지면은 어떻게 견뎌내는 것일까? 고작 황무지에 불과한데.
“그 비밀은 말입니다. 바로 이 대 초열이라는 구간에 있습니다. 즉 세상이 살아있음으로써 이 장소가 견딜 수 있도록 나름대로 조정을 한다는 말이죠.”
한순간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무간 구간을 떠올리자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게헨나의 표현을 빌려보면 무간은 왕의 탄생과 최후를 함께하는 세상이라고 한다. 즉 왕의 시작과 끝을 인지하는 일종의 의지 혹은 자아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면 무간이 그렇듯이 다른 구간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대 초열이라는 세상은 용암을 받치는 이 장소가 무너지는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용암을 부정하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이 지역 일대로 모종의 기운을 집중시켰고, 그 기운은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대공께서 이 장소를 괜히 야장으로 선택하신 게 아닙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조금씩 흥미가 돋는걸 느꼈다.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궁금한 부분이 생겨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허나 대 초열이라는 세상이 의지가 있다는 건 둘째치고서 라도, 이 장소가 무너지는걸 원하지 않는다는, 여기에 일대에 기운이 흐른다는 사실은 어떻게 밝혀내신 거죠?”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부왕(父王)께서는 지금 바로 그 증거를 보고 계십니다.”
그러자 이를 한 번 딱 부딪친 베히모스가 기암괴석을 크게 두드렸다. 그나저나 부왕이라. 그 말은 조금 낯간지러운데 말이지.
“이건 저도 정말 가끔 보는 광경인데요. 어느 날 보면 용암이 흐르는 수면에서 지면이 불쑥 올라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크기를 더해가, 어느 순간 이와 같은 형태를 갖춥니다.”
“지면이 스스로 융기한다는 말씀이로군요.”
“그렇죠. 그 사실로 추정해보면, 저는 이 장소에 흐르는 기운의 정체를 흡수와 동화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흐르는 용암을 흡수해서 동화 작용을 거친다는 뜻이죠. 그렇게 보면 이 암석은 일종의 결정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흡수와 동화? 결정체?”
“네네. 생각해보세요. 수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용암이 흐르던 대지입니다. 그 인고의 시간 동안 언제까지고 용암을 흡수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동안 모은 용암의 정수를, 이렇게 외부로 발출함으로써 순환 작용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지요.”
“흠.”
무언가 조금 복잡해지는 것 같아 나는 팔짱을 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도 보기는 했지만, 확실히 베히모스의 말대로 용암의 바다에는 기암괴석들이 드문드문 솟아나 있었다.
“한 마디로 정리해보면, 이 암석은 인고의 세월 동안 결정화된 대 초열의 의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음음.”
기나긴 설명을 마치고 나와 같이 팔짱을 끼는 베히모스. 고개를 끄덕이며 매듭짓는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싱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해야 돌덩이가 일종의 의지를 갖고 있다는 말이 자못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베히모스는 양손을 허리에 척하니 대고서 새초롬한(?) 안광을 빛냈다.
“어라? 못 믿으시는 것 같은데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못 믿겠다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100% 믿겠다는 것도 아니고. 또한 개인적으로 직접 경험하지 못한 건 믿지 않거니와, 아직 이 세상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만큼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거지. 이러나저러나, 나는 넙죽 받기만 하면 되는 입장이다. 말인즉 제일 중요한 건 재료에 얽힌 유래가 아닌 결과물의 성능이랄까. …이런, 너무 속물적인가?
“아무래도 못 믿으시는 것 같은데, 이번에도 제가 증거를 보여드리죠.”
“증거요?”
“이 돌이 대 초열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그게 가능합니까? 갑자기 입이 생겨 말이라도 하나요?”
그러자 “저는 가능합니다.” 라고 힘주어 말한 베히모스는, 갑자기 옆구리를 굽혀 기암괴석 쪽으로 귀를 가까이 했다. 그리고 장갑까지 동원해 무언가 자세히 듣는 자세를 잡더니 “으음.” 진중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윽고 베히모스는 여전히 기암괴석에 귀를 기울인 채 입을 벌렸다.
“허. 이 기암괴석이 부왕을 보며 이런 의지를 전달하고 있군요.”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베히모스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탓에 혹시나 하는 애매한 기분이 들 즈음.
“이 빌어먹을 인간 노오오옴.”
예의 거슬리는 음성이…. 뭐?
“감히 우리 대공 님의 마음을 뺏어가다니이. 그것도 모자라 몸도, 그리고 처음도 뺏어가다니이. 제엔장, 부럽구나아아. 부럽단 말이다아아아.”
그때였다.
“저주할 테다아아. 부러우니까 저주할 테다아아. 정말 미칠 정도로 부러워서 죽을 것 같으니, 너도 저주해서 죽여버릴 테다아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꽥!”
쾅!
차마 ‘다.’ 로 말을 끝내기도 전, 베히모스의 비명과 어디선가 흘러 든 커다란 굉음이 동시에 겹쳤다. 얼떨결에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베히모스는 어느새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내 눈은 그 사이 일어난 변화를 잡아낼 수 없었다.
“누가 지금 네 속마음을 말하라고 했느냐”
이어서 귓가로 들려오는 고고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 시선을 돌리자, 언제 나왔는지 게헨나가 오연히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언제 처박혔는지, 낭떠러지 절벽에 머리가 박힌 채 온몸을 바둥거리는 베히모스까지. 그러니까 게헨나가 힘을 쓴 건가?
이윽고 베히모스는 절벽에 처박혔던 머리를 간신히 빼내고서 투구를 쓱쓱 문질렀다.
“대공. 정말 너무하십니다. 갑자기 기습이라니요.”
“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기가 차서 그랬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그, 그렇군요. 그건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라도 너무하십니다.”
“또 무어가 너무하다는 것이냐.”
“후후. 저는 봤지요.”
“봤다?”
베히모스의 음성에 게헨나가 살그머니 두 눈을 치떴다. 그러자 얼른 몸을 일으킨 베히모스는 낭떠러지 방향을 가리켰다. 게헨나의 의문 어린 시선이 나와 베히모스를 번갈아 향한다.
베히모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작업하신 거, 여기 일대 중에서 가장 큰 기암괴석으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그거 있잖습니까. 그거.”
게헨나는 그게 어쨌냐는 표정으로 가볍게 수긍했다.
“그래. 헌데?”
“하. 역시나.”
그러자 힘 빠지는 소리를 흘린 베히모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게헨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낯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왜…?”
“정말 너무하십니다. 그 기암괴석은 가히 수 천년 동안 융기해온, 말 그대로 대 초열의 산 증인인데….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군단장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
“저희가 몇 번이나 달라고 애원했는데도 지금껏 철저하게 무시하시다가…. 갑자기 부왕이 나타나셨다고 그걸 홀랑 갖다 바치시는….”
그 순간.
휙!
첨벙!
또 한 번 눈을 감았다 뜨자, 베히모스가 사라짐과 동시에 무언가가 수면으로 세차게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안 봐도 뻔하다. 아마 게헨나가 용암으로 던져버렸을 테지.
그런데 아까 보니까 용암에 잘만 들어가던데. 입을 막기로는 부족하지 않나?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내 생각이 철저한 오산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문득 용암을 쳐다보는 게헨나의 두 눈이 붉은 빛을 발하더니.
치이이이이이이익!
“후후. 이것쯤은…? 아악! 아아아악!”
용암이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소리와 베히모스의 비명이 겹쳐서 들려왔다. 한층 강렬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용암의 바다 속에서, 베히모스는 낙지라도 빙의 된 듯 꿈틀꿈틀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흠, 흐흠.”
그러나 게헨나는 전혀 아랑곳 않은 표정으로 다가왔고, 강제로 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저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나저나, 많이 기다렸느냐. 잠은 또 잘 잤고?”
“아아아악! 대공!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엄청 뜨겁다고요! 아아아악!”
“어흠.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우선….”
“아흑! 알았어요! 앞으로 장난 안칠게요! 원래는 어제 무간에서 나오신 후, 부왕이 잠드신 내내 그 어느 때보다 열과 성을 다해 작업했다는 말도 하려고 했는데! 안 하겠습니다! 아흐흐흑!”
…게헨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맵시 있게 머리를 쓸어 넘기자, 깔끔하게 묶었던 머리카락이 단번에 풀리며 예전처럼 풍성하게 흘러 넘친다.
잠시 후.
“그대. 잠시 이것 좀 구경하고 있거라.”
게헨나가 싱긋 웃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오른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내 품에 억지로 안기고서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런 게헨나의 왼손에는 어느새 두 갈래로 나뉜 불의 채찍이 들려져 있었다.
그나저나 나한테 준 건 도대체 뭐지…?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작품 후기 ============================
집안에 경조사가 겹쳤네요. 이번 주 토요일이 작은 사촌 누나 결혼식이라서 하루 전날인 19일에 대전으로 내려가볼 예정이었는데…. 창원으로 먼저 갈 일이 생겼습니다. 마음이 심란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