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00
00699 시작이 늦었다고 앞서나가지 못하는 건 아니다. =========================================================================
성현민은 말을 하면서 속으로 아차 싶었다. 어찌 보면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거의 100% 확신하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김수현이 자신을 의심하면 끝장이다. 그렇게 생각한 성현민은 문득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김수현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들자 성현민은 눈을 깔아 내렸다.
“흥미로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말. 성현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사용자가 자존심을 세우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고 있고, 애초 그런 거 챙기는 성격도 아니었다. 필요할 때는 확실히 굽힌다. 김수현은 시작부터 확실하게 경고를 날렸고 성현민은 받아들였다.
고요한 홀에 킬킬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보아하니 조성호의 빈 자리를 한 번 차지해보려고 한 것 같은데….”
김수현이 은근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아쉽지 않습니까? 현재 이 상황이요.”
성현민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2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으니까요.”
말을 뱉은 순간 성현민은 속이 뜨끔해지는 걸 느꼈다. 왠지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것만 같았다.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현재 동부는 협상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아니. 그냥 까놓고 말해서 구걸하러 온 입장이다. 살려만 달라고. 동부를 망가트리지 말아 달라고.
성현민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게 어렵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그나마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은 하나. 무조건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거짓이 섞이는 순간 상대방이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돼버린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네요. 아까 총대라는 말은 뭡니까?”
“사용자 김덕필은 흔들자는 계획에는 극렬히 반대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애초 참여도 하지 않았고, 머셔너리 로드가 나타났을 때는 오히려 고소해 했습니다. 마탑 로드의 경우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자신은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냥 기회를 보면서 방관했다고 보시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호. 그러면 한 로드는?”
“저는 두 사용자보다는 직접적으로 참여한 입장입니다. 계획을 발의하지는 않았으나 구체화하는 데 일조했고, 이후 여러 행동에도 가담했습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 성현민은 김수현의 눈치를 살폈다. 김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계획을 발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첫 발의는 누가 했습니까?”
“직접적인 주동자들은 조성호의 측근들입니다. 원하신다면, 직간접적으로 참가한 전원의 명단을 넘기겠습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성현민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사실 거의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이었다. 김수현이 두 눈이 이채를 띠었다.
“흠…. 흐음….”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가 반대쪽으로 살짝 갸웃한다. 마치 무언가 재는 듯한 표정. 그걸 보는 성현민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저 사내는 지금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잠시 후.
흡사 잠자기라도 하듯 가늘게 눈을 뜨고 있던 김수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머셔너리는 산하 클랜을 수십 개까지 둘 생각은 없거든요. 현재는 말이죠.”
“…….”
“물론 이건 우리 입장이고. 그러는 동부야말로 우리 산하로 들어오는 것에 거부감이 없겠습니까?”
“그…!”
‘그렇습니다.’ 라고 말하려던 성현민은 간신히 입을 닫았다. 여기서 해야 하는 말은 무조건적인 ‘Yes.’ 가 아니다. 아까 묻지 않았는가. 아쉽지 않냐고. 말인즉 김수현은 성현민에게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마냥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요. 어쩌면 예전보다 더 올라갈 수 있는, 제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길게 돌려 말하기는 했으나 결국에는 이 소리였다. 나는 쓸모 있는 사용자다. 가치를 입증해 보이겠으니 기회를 달라.
“그래요?”
히죽.
김수현은 슬쩍 웃어 보였다. 그리고 느릿하게 의자에서 일어섰다.
“좋네요.”
“예?”
성현민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김수현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아. 말씀해주신 지원 사항들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받아주시기만 한다면,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이렇게까지 도와주신다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안 그래도 도시 복구 작업에 난항이 많았는데,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건 진심이에요.”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아무튼, 우선은 도시 복구에 집중하는 걸로 하고. 그리고 산하로 들어오는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시죠. 분명히 기회가 있을 겁니다.”
“예. 그러시죠.”
성현민은 그제야 속으로 안도했다. 확답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추후 기회가 있을 거라는 말에 비추어보면, 너희가 하는 걸 보고 결정하겠다. 이렇게 해석할 수는 있다. 어쨌든 여지를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방문은 성과가 있는 셈이다.
그렇게 생각한 성현민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명단 말입니다.”
갑자기 성현민의 온몸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느새 김수현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윽고 김수현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어 성현민과 눈높이를 맞췄다.
“과연 누가 누가 적혀 있을지 참 궁금한데.”
문득 김수현이 성현민의 어깨를 짚었다. 이어서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얼굴이 더욱 가까워졌다. 김수현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성현민의 속에서는 자연스레 긴장감이 샘솟았다.
그리고.
“혹시 명단에 적을 사용자 중에….”
귓가를 간질이는 차갑게 흐리는 음성이 들려온 순간.
“친한 사람, 많습니까?”
성현민은, 전신에 소름이 쫙 돋는 걸 느꼈다.
*
“응? 헐?”
“승윤아 왜? 어서 광장으로 가자니까. 오늘부터 일하기로 했잖아.”
“잠깐만. 오빠. 저거 봐봐.”
“음?”
오빠라 불린 사내가 돌아보자 하승윤이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가리키는 방향에는 구멍 뚫린 터널 하나가 있었다. 두 남녀는 지금 외 도시 남쪽에 있고, 터널의 모양은 둥그런 사선이 아닌 번듯한 직선으로 나 있었다. 말인즉 다른 외 도시가 아닌, 내 도시와 이어지는 터널이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내 도시에는 워프 게이트가 있다.
“어…. 어…?”
터널로 시선을 돌린 사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통로에서 엄청난 인파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중구난방으로 나오는 게 아닌, 사용자의 감독하 질서 정연하게 나오고 있었다. 생김새도 그렇고, 등에 하나씩 커다란 짐을 짊어 맨 것으로 보아 거주민이 분명했다.
갑작스러운 인파에 놀랐는지 하승윤이 입을 뻐끔거렸다.
“뭐, 뭐야? 갑자기?”
“모, 몰라. 우리가 다른 도시에 와 있나?”
사내는 황급히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남쪽 맞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갸우뚱했다. 비단 두 명만 그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인근 사용자 모두가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거주민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계속해서 흘러나오던 인파도 서서히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수는 실로 어마어마해 거의 3000명을 넘을 수준이었다. 하승윤은 어디론가 걸어가는 거주민들을 유심히 보다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신음했다.
“마, 맙소사! 저거 그거 아냐? 마력석이잖아!”
“응? 마, 마력석?”
“맞아. 확실해. 와~. 어떻게 마력석이 저렇게나 많이…. 저거 엄청 비쌀 텐데. 설마 자재로 쓰려는 건가?”
“이쪽 분들은 저를 따라오십니다! 광장으로 가겠습니다!”
그때였다. 하승윤이 부럽다는 투로 끙끙 앓는 동시, 사용자로 보이는 사내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마력석을 짊어진 일부 거주민들이 사내를 따라 걸어갔다.
이윽고 인파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두 남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당연히 광장이었다. 둘 다 오늘부터 도시 복구 작업에 지원할 예정이라 어차피 가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광장에 도착한 순간 사내와 여인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비록 낡기는 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던 광장이 산산이 파헤쳐져 있다. 놀란 숨을 내쉬며 둘러본 하승윤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수십 명의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모두 로브를 걸친 것으로 보아 마법사인 모양인데, 각자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서는 형형색색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력 냄새가 진한데. 폭격이라도 했나 봐.”
사내가 코를 쓱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거주민들이 도착하자 마법사들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자재들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차곡차곡 쌓이는 자재들이 광장을 재건할 자재로 쓰인다는 사실을. 세상에. 그 귀하디 귀한 마력석이 한낱 자재로 쓰인다니!
“아, 아까워…. 그런데 대단해….”
하승윤이 안타까움과 경이가 섞인 눈초리로 광장을 응시했다. 어느덧 광장의 중앙에는, 머리에 ‘안전 제일’ 이라 적힌 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작업을 시작한다는 말을 힘찬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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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