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38
00737 비명의 초원. =========================================================================
–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군. 왜 나를 살려주는 거요?
– 죽고 싶나?
– 죽고 싶다고는 안 했소.
– 흐흐, 그럼 조용히 입을 닫는 게 좋을 거야. 보아하니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 알고 있소. 보아하니 왕국 외곽을 겉도는 야만 부족 같구려. 그대는 이 부족을 이끄는 왕이겠지.
– …아는데 이러나?
– 말했잖소. 죽고 싶지는 않으나 죽여도 상관은 없소.
–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아는 왕국 놈들이 아닌 것 같아서.
– 아, 내 태도를 말하는 거요? 이상할 것 없소. 왕국 내 모든 인간이 그대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오.
– 그러니까, 너는 아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 못 믿을 건 또 뭐 있겠소? 내가 목숨을 구걸하기라도 했소? 그리고, 빅토리아 왕국에서도 그대들을 배척하지 않은 역사는 있을 텐데.
– …물론 없지는 않지. 선왕 되는 사람이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를 받아들였으니까. 허나 그 점을 빌미 삼아, 얼마 전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나? 알기로는 야만 부족과는 같은 지붕 아래 살 수 없다는 명분으로 선왕을 살해하고….
– 아아, 맞소. 왕국의 사정을 상당히 잘 알고 있군. 한데,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소만.
– 그게 뭔데?
– 그 되지도 않은 명분으로 살해당한 선왕이, 바로 내 친부라는 점이오.
– …엉?
신 대륙 아틀란타(북 도시 비밀 도서관), ‘빅토리아 왕조 실록 – 18대 황제(147 ~ 147)’ 中 ‘폐(廢) 태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이후.’
*
푸확!
갑자기 사방에서 흙더미가 솟구치는 동시,
“꺄아아악!”
“아아아악!”
두 여인의 비명이 겹쳤다. 어떻게 된 걸까. 안솔이 사정없이 지면을 구르고, 사라의 몸이 삽시간에 허공으로 치솟는다. 이윽고 사라의 복부를 관통한 무언가 뾰족한 것을 발견한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무검을 뽑아 들고 있는 힘껏 외쳤다.
“기습이다! 전투 준비!”
“────. ────. 멀티플렉스 라이트(Multiplex Light)!”
거의 동시에 한소영의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예닐곱 개의 빛무리가 곧장 공중에 떠오르더니 환하게 타오르며 사방을 비췄다. 이내 야영지 일대의 시야를 확보한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건, 꼬챙이 같은 것에 꿰인 채 고통스러워하는 사라를 주둥이 안으로 밀어 넣는 웬 거대한 흙색 괴물이었다.
그때였다. 돌연히 빛나는 화살이 어둠을 가르며 날아간다.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주둥이에 명중했고, 괴물은 크게 비틀거리며 주춤 걸음을 물렸다.
“아직 사라를 놓지 않았어요!”
임한나가 황급히 외친 찰나, 어질러진 침낭 속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남다은이 얄따란 레이피어를 들고 비호처럼 몸을 날린다.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우선 땅에 나동그라진 안솔의 안전을 확보한 후, 곧장 시선을 돌렸다. 단칼에 처리할 것 같던 기세와는 달리 남다은은 의외로 고전하는 중이었다. 은빛 섬광이 연신 번쩍이는 걸로 보아 공격은 이어가는 것 같은데, 괴물은 당황해 물러나기만 할 뿐 외양은 여전히 굳건해 보였다.
“────. ────.”
그때, 어디선가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승우의 음성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괴물을 지팡이로 겨눈 채, 남은 왼손을 빠르게 놀리며 수인을 맺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서 너덧 개의 물방울이 지팡이 끝에서 피어오르더니 쭉 늘어지며 화살 모양으로 변했다.
“워터 애로우(Water Arrow)!”
이윽고 시동 주문을 외친 순간, 물의 화살은 곧바로 쏘아져 괴물의 거대한 몸을 고루 적셨다. 별다른 타격은 없어 보인다.
“물이 마르기 전에 끝장내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승우는 이때가 기회라는 듯 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남다은은 잠깐 주저하는가 싶더니, 곧 전신에서 찬연한 빛을 뿌렸다. 그리고 괴물이 주둥이를 들기도 전 훌쩍 공중으로 솟구쳤고, 양손으로 힘껏 검을 내리쳤다. 특수 능력 ‘직절(直切)’. 검날을 따라온 은빛 섬광이 세찬 호선을 그리며 떨어져, 그대로 괴물의 정수리를 쪼개버렸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결과였다.
이어지는 연속 공격에, 괴물은 끽소리도 내지 못한 채 여러 조각으로 분해돼 쓰러졌다. 남다은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사라를 빼내, 곧바로 후퇴했다. 좋은 선택이다. 아까 솟구친 흙더미는 하나가 아니었으니까.
“복부를 완전히 관통 당했어요. 어서 치료를….”
사라를 구출해온 남다은은, 나를 보고 걸음을 멈칫했다. 왜냐면 안솔도 가히 좋은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라처럼 관통상을 입은 건 아니었으나 옆구리에서 핏물이 철철 흐르는 중이었다. 그러나 걱정은 들지 않는다. 방금 첫 격돌이 일어난 사이, 상황을 파악한 동료들이 서서히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허겁지겁 달려온 신재룡에게 두 부상자를 인계한 후, 나는 그제야 키퍼(Keeper)에서 벗어나 사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
역시나 한 놈이 아니었다. 전방에 한 놈, 좌측에 두 놈. 키가 2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괴물이 우리를 보고 눈을 부라리고 있다. 일견 사람과 비슷해 보이기는 하나, 흙빛 일색의 외양과 쭉 뻗은 주둥이, 그리고 촘촘히 박혀 있는 뾰족한 이빨이 날카로운 반사광을 번들거린다. 무언가 기억날 듯 말 듯하면서도, 나는 급히 외쳤다.
“하승우!”
“물로 적시면 방어력이 크게 떨어집니다! 다만 물이 흡수되는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빠르니, 그 전에 무조건 결딴내야 합니다!”
이름만 불렀는데 하승우는 곧장 필요한 정보를 뱉어냈다. 그 순간 묻어둔 기억이 뇌리를 스쳤으나 현재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승우의 말을 듣자마자 정하연이 빠르게 주문을 영창 하기 시작했다. 물 계열 마법은 정하연의 장기였다.
“────. ────. 필러 오브 워터(Pillar Of Water)!”
역시나 명불허전. 엄청난 속도로 영창을 마치더니 곧바로 주문을 외웠다.
쏴아아아!
이윽고 수십 개의 물 기둥이 세차게 쏟아졌다. 찬물이 정수리부터 흘러내려 와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얼마나 쏟아 부었는지, 비단 괴물뿐만이 아닌 우리까지 흠뻑 젖을 정도였다. 약간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여하튼 좋다. 그러는 동안에도 괴물들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전진해오는 중이었으니까. 이윽고 물 기둥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남다은, 허준영은 한 놈씩!”
마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앞서 달려나가며 반격을 지시했다.
잠시 후, 거친 고함이 사방을 와르르 울리기 시작했다.
*
새벽 내내 살벌하던 초원은, 아침 해가 뜨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함을 되찾았다.
“설마 이 정도로 단단한 줄은 몰랐어요.”
남다은이 쓰러진 괴물을 툭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단단하다니?”
“이놈이요. 우선 사라를 구할 생각에 가볍게 부딪쳤는데,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는데도 꿈쩍도 않더라고요.”
“확실히 방어력이 높기는 했지. 그래도 사용자 하승우 덕에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잖아.”
“그건 그래요.”
남다은은 즉시 동의했다. 그리고 끙차 무릎을 구부리더니 널브러진 괴물을 조사하려는 듯 이모저모 살펴본다.
“흙덩어리로 이루어진 놈인데, 다량의 물을 스며들게 해서 방어력을 떨어트린 거죠?”
“아마도.”
“적절한 대응이기는 했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지? 나는 이런 괴물 본 적도 없는데.”
“그건 제가 예전에 한 번 겪어봤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난 하승우가 불쑥 끼어들면서 말했다. 남다은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겪어보셨다고요?”
“예. 미개척 지역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지요. 사실 이번에는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그때는 딱 한 놈이랑 조우했는데, 습격하는 방법에 상당한 차이가 있네요.”
“차이? 어떤?”
“처음 솟구친 지형은 보고 오셨죠? 이놈들, 원래 지하에서 사는 놈들입니다. 굉장히 깊은 곳에서 활동하는 놈들이죠. 어지간한 마력 감지로는 잡기가 불가능할 정도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굉장히 교활합니다. 먹이가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지면을 뚫고 나와 먹잇감을 낚아채 땅속으로 도망가거든요. 그런데 오늘 새벽에는….”
하승우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아마 부랑자로 활동하던 시절을 말하는 듯싶다.
그렇게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바른대로 말하면, 나는 괴물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1회 차에 직접 조우한 적도 없거니와, 간간이 소문만 들은 터라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돼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 이 초원에서 출현한다는 말도 듣지 못했고.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네요. 미개척 지역에서 확인한 개체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중얼중얼 말하는 하승우의 말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습당했던 새벽의 전투는, 반격 이후 그럭저럭 가볍게 마쳤다. 두 명의 부상자가 나오기는 했지만(사라의 경우 부상 정도가 상당히 심각했다.), 물약과 치료 주문을 아낌없이 사용한 결과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안솔이었다.
이 이름 모를 괴물의 첫 타깃은, 안솔과 사라였다. 그리고 신재룡의 말에 따르면, 사라가 마법사치고는 내구 능력치가 높은 것 같아,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말인즉, 만에 하나 안솔이 사라에 준하는 상처를 입었다면 요단 강을 건넜을 수도 있었다는 소리였다.
돌이켜보면 은근히 아찔한 상황이다. 그래서 아까 전투 초반에 안솔의 곁을 떠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안솔은 상황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오늘 아침 출발한 거 아녔느냐, 여아는 어디 갔느냐는 등 자꾸만 헛소리를 늘어놨다. 처음에는 충격으로 인한 부분 기억 상실을 의심했으나, 검사해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스리슬쩍 시선을 돌리자 물에 젖은 로브를 팡팡 털고 있는 임한나와, 몸에 침낭을 두른 채 힘없이 앉아 있는 안솔이 시야에 들어온다. 망연한 눈동자로 가끔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게, 아까 말한 거주민 여아를 찾는 듯싶다. 물론 안솔이 말하는 여아는 어디서도 만난 적이 없고, 하등 이해도 가지 않는다. 아마 추측건대, 꽤 현실적인 꿈을 꾼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꽤 혼란스러워 보이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게 낫겠다. 추후 기회가 닿으면 넌지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계획 변경이다. 원래는 적정한 행군 속도를 유지하면서 목적지까지 가려고 했는데,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면 곤란하다.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야 하는 이상, 강행군은 물론 그 이상의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아니, 굳이 강구할 필요까지는 없지. 수단은 이미 갖고 있으니까.
“제갈 해솔?”
초원에 드러누운 채 흥얼흥얼 하늘을 바라보던 제갈 해솔은, 흘끗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까닥였다. 건방진 태도. 입에 아예 풀까지 물고 있는 게, 혼자서 아주 잘 놀고 있다. 그러나 마침 옆을 걸어가던 정하연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마지못해 일어서는 기색을 풀풀 날리면서.
“어휴. 왜요?”
“네 힘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
“…응?”
“도와달라는 말이야.”
이 말은 예상치 못한 걸까. 도와달라고 말하자 “흐~응?” 이상한 비음을 흘린다. 그리고 웬일이냐는 듯 눈을 반짝반짝. 이윽고 제갈 해솔이 팔짱을 끼면서 킥 웃는다.
“별일이네요. 클랜 로드한테 도와달라는 말을 다 듣고.”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후후. 인정받는 것만큼 기분 좋은 건 없죠. 특히나 당신한테라면 더더욱. 뭐, 좋아요. 말씀하세요. 허벅지 만지게 해달라는 것만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들어줄 용의가 생겼어요.”
“걱정하지 마. 네 허벅지는 관심 없으니까.”
나는 조용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당분간, 수송 셔틀이 되어주지 않겠어?”
그리고 곧장 솔직한 마음을 밝혔다.
“아~. 그래요. 수송 셔…. 뭐요?”
제갈 해솔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작품 후기 ============================
1. 그게 무슨 뜻이에요?
2. 실망이에요. 어떻게 그런 말을 사용하실 수 있나요?
0ㅁ0….
에이, 독자님들. 아xxx 더x 피x. 이 말이 어때서 그러세요.
아. 물론 다분히 음란하고 변태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라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이런 말도 있잖아요? 사내가 변태면 또 어떠한가. 우리 같은 사내끼리, 이런 말 정도는 웃으면서 공유해요. 혹시 이런 말의 종류에 깊은 지식을 가진 분이 있다면, 기꺼이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도움이 될 수….(어디에?)
아, 아닙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