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93
00792 There May Be Blue And Better Blue. =========================================================================
– 이 멍청이! 정신 차려!
그때 날카로운 음성이 머릿속을 흔들었다.
– 상대는 악신이야! 게헨나가 아니라고. 지금이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모르겠어?
지금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 그래, 게헨나를 애초 너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어. 오히려 살리고 싶어 했다고! 그런데 이 악신도 그럴 것 같아?
‘그건…!’
– 아니야! 이놈은 너를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아!
‘으음.’
화정이 악을 쓰듯 소리 지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그 당시 게헨나는 엄청나게 봐주면서 나와 싸웠다. 아마 죽일 마음만 있었다면 단박에 쳐 죽였으리라. 결과적으로 염화 능력을 사용하고도 졌으니까.
말인즉, 악신을 게헨나와 동일시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악신이 나를 봐주며 싸울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게헨나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불현듯 아직은 막연하던 죽음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호흡을 길게 잡으며 가슴을 추슬렀다.
– 정면. 아니, 약간 왼쪽!
악신의 몸체서 푹 솟구친 연기가 물 흐르듯 뻗어온다. 여전히 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몸을 꿰뚫을 듯한 예기(銳氣)는 더없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흡사 공간을 베어내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날카롭다.
나는 앞으로 돌진하며 무검을 횡으로 베어 들어갔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멀건 불꽃으로 타오르고, 붉은 궤적을 그렸다.
써억!
이번에는 확실히 손맛이 전해졌다. 마치 썩은 통나무를 잘라내는 느낌이었다. 베어낸 부분이 갈라지고 불에 닿은 부분은 연소하며 소멸한다.
문득 화정이 왜 동료들을 도망치게 하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보통의 공격으로는 해를 입힐 수 없고, 신병이기(神兵異器) 급 정도는 돼야 타격 가능한 듯싶다.
– 카앜?
이건 악신도 미처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을까. 물론 큰 타격을 줬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틈을 이용할 수는 있다.
놈이 주춤한 사이, 계속 치달리며 힘껏 바닥을 박찼다. 차가운 바람이 귓전을 스치고, 악신과의 거리가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몸이 큰 만큼 공격할 곳은 많다.
무검을 양손으로 쥐고 하늘 높이 들어 올려 몸체를 향해 힘차게 내리쳤다.
화르르륵!
불꽃의 잔상이 직선으로 낙하한다.
턱!
그 순간, 난데없이 수십 개의 구체가 독사처럼 뻗어 나와 무검을 감쌌다. 화정의 불꽃에 닿는 족족 활활 타오르며 소멸했으나, 검은 연기는 그 이상으로 줄기차게 나오며 메운다. 그 중 적잖은 숫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
순간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큭!”
나는 황급히 몸을 틀며 전방으로 검을 뿌렸다. 그리고 이형환위로 바닥으로 이동해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비록 공격은 실패했으나 소정의 성과는 있었다. 아까 나를 후려친 공격의 정체를 밝혀냈다. 아마 스친 연기에서 갈래가 뻗어 나와 나를 후려쳤으리라. 게헨나의 채찍을 연상하면 된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최대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원을 그리듯 악신의 주변을 돌다가 한순간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악신은 나를 잡으려는 듯 기다란 연기를 줄기차게 뽑아내 휘둘렀지만, 나는 쉴 새 없이 발을 놀리며 일부러 방향을 복잡하게 틀었다. 풋워크로 지그재그로 가다가 중간중간 이형환위를 섞으며 최대한 어지럽게 한다.
– 카앜!
그때 악신이 분노에 찬 괴성을 흘리며 몸부림치더니 느닷없이 번개같이 바닥을 내리쳤다.
꽈앙!
급히 발을 놀려 벗어난 찰나,
– 크뢐뢐뢐뢐뢐뢐뢐!
느닷없이 수십, 아니 기백 개가 넘는 연기가 일제히 치솟아 시야를 가득히 메웠다. 아주 짧은 시간, 내리치기 직전의 채찍처럼 출렁인 그것들은 이내 마구잡이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미친!”
반사적으로 몸을 날린 순간, 갑작스레 옆에서 폭음이 솟았다.
꽈꽈꽈꽈꽈꽈꽈꽝!
땅이 울부짖었다. 거센 풍압에 몸이 날아가 바닥을 구르고, 터져 나간 얼음 파편이 다닥다닥 붙는다. 흡사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이 솟구치며 떠르르 흔들린다.
간신히 자세를 회복하자 터져 일어난 얼음 바닥이 나를 덮칠 듯이 무너진다. 나는 왼쪽으로 몸을 기울여 면을 박차 옆으로 빠졌다. 그리고 이형환위를 사용해 빗줄기처럼 처박히는 검은 연기를 피해 벗어났다.
콰쾅!
간신히 벗어나 몸을 돌리자 할 말을 잃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완전히 파헤쳐진 바닥과 사방을 나뒹구는 파편들. 악신의 주변은 융단 폭격이라도 맞은 듯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아름답던 신전이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허억, 허억!”
어느새 호흡도 거칠어져 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른다.
만약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게 늦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쩌면 방금 한 번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걸지도 모른다.
원래는 회피를 중점으로 되는대로 돌려 깎을 작정이었는데, 설마 저런 식으로 접근을 차단할 줄 꿈에도 몰랐다. 모조리 받아 쳐낼 자신이 없는 이상, 가까이 가는 순간 죽는다.
상황은 최악을 넘어 멸망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주변은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정적이 흐른다. 참을 수 없는 괴로움과 갑갑함이 동반된 침묵이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기동력과 민첩함. 무음의 연기. 사각을 허용치 않으며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카운터. 무엇보다 눈으로만 보고 대응하려니 미칠 것 같았다. 기척은 겨우 잡힐까 말까 하는데 소리는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 마치 파더와 각성한 쿠샨 토르를 함께, 아니 수십 배는 업그레이드된 존재를 상대하는 기분이다.
더 큰 문제는, 여태껏 보고 느낀 것조차 악신의 본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놈이 점차 강해지는 느낌이다. 내 움직임이, 내 능력이 가면 갈수록 읽히는 것 같다.
화정의 말이 서서히 체감된다. 악신은 절대로 내가 버틸만한 수준의 상대가 아니었다. 현재 상황이 유지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분명히 당할 것이다. 방금도 제대로 된 공격은커녕 간신히 회피하는 게 고작 아니었는가.
“…….”
…결국, 염화 능력밖에 답이 없는 건가?
“흐읍…!”
억지로 숨을 삼켰다.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죽을 만큼의 상처도 입지 않았고, 아직은 싸울 힘이 남아 있다. 아찔하리만치 까마득한 차이가 느껴졌지만, 온몸을 달구는 뜨거운 기운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
– 크라라랔!
그때 악신이 괴성을 짖으며 몸을 움직여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고, 세차게 터진 연기가 미사일처럼 날아온다. 거대한 것이 빠르게 다가오는 모습은 흡사 해일을 마주하는 듯했다.
빌어 처먹을. 정말 인정사정 보지 않는군.
나는 이를 악물고 마주 달렸다. 가까이 접근하면 아까와 같은 꼴이 날 테고,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피할 수만도 없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기회를 엿본다.
좌우로 짓쳐 오는 두 갈래 연기는 나를 잡으려는 듯 사정없이 요동쳤으나, 무검을 크게 휘두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깔짝대는 게 불가능하다면, 한 번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놈의 공격을 유도한 후, 그 틈을 노려 한순간 치고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연기를 걷어내고 날개를 움직여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러자 역시나.
두 연기는 마치 호밍 기능이라도 달린 듯 곧바로 나를 쫓아 세차게 솟아올랐다. 이윽고 닿기 직전, 나는 급작스럽게 활공을 멈추고 있는 힘껏 몸을 뒤틀었다.
바람이 강하게 귓가를 스치고, 무언가 시커먼 것이 아슬아슬하게 눈앞을 지나쳤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피한 게 아니다. 갈래로 뻗어 나올 공격을 경계하며 나는 그대로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이대로…!
– 아…!
그때였다.
화정이 아차 한 듯 소리 지른 찰나, 불현듯 오른 발목에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
갑작스럽게, 눈앞이 빙글 돌았다. 보이는 세상이 180도 반전한다.
이 모든 사실을 인지했을 때.
몸은,
부웅!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수직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얼음 바닥을 향해서.
콰앙!
굉음과 함께 안면에 강한 충돌을 느꼈다. 몸이 크게 들썩거렸다. 전신이 짓이겨지는 느낌이다.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폭발해 터져 나간다.
그러나 억 소리가 나오기도 전, 바닥이 크게 멀어졌다가 삽시간에 또다시 가까워졌다.
웅웅웅웅!
동시에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꽈앙!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충돌은 없었다. 그 대신 엄청난 충격파가 느껴지며 나는 그대로 튕기듯이 굴렀다.
찡한 이명이 고막을 울리고 시야는 흐릿해지다 못해 TV의 노이즈 신호처럼 비틀렸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감각과 정신이 따로 노는 기분이다.
잠시 후, 핑그르르 돌던 세상이 우뚝 정지했다. 내부가 왠지 모르게 허전하다. 나는 그제야 마력이 크게 소비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헨나의 보호 구슬이 또 한 번 발동된 것이다.
– 현…! 수현…!
화정의 애타는 음성에 나는 놓을 뻔한 정신 줄을 간신히 잡을 수 있었다.
“끄으….”
안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이마가 깨질 듯이 아프다. 강한 현기증에 시야가 가물가물하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연기는 지나쳤는데. 갈래도 뻗어 나오지 않았는데.
아니, 그보다 어째서 타격을 입은 거지? 게헨나의 보호 구슬이 왜 뒤늦게 발동된 거야?
의문이 꼬리를 물고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모든 게 복잡했지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겨우 눈을 뜨자 거대한 연기 덩어리를 힘차게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른 일어나려고 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두 번째 충돌은 막았지만, 첫 번째 충돌에 의한 충격은 한치의 가감 없이 고스란히 떠안은 결과였다.
문득 뜨거운 것이 한 줄기 흘러내려 시야를 붉게 적셨다.
– 김수현! 어서…!
마침내 화정의 음성이 완전하게 들리는 동시, 어두운 연기가 내게로 내리 꽂힌다.
절체절명의 순간,
“도와리야!”
뻐엉!
막 염화 능력을 일으키려 했을 때, 괴상한 기합과 무언가 후려치는 소리가 겹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악신이 미세하게 휘청거렸고, 나를 노리던 연기가 궤도를 벗어나 처박혔다.
“너…!”
어떻게 된 일이냐는 말이 나오기도 전, 공찬호의 손에 들린 수라마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돌연히 허공을 활공하는 차소림이 나타났다. 나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은빛을 흘리는 발키리 스커트를 입은 차소림은 분명히 공중을 날고 있었다.
놀라움이 가라앉기도 전, 차소림의 손에 들린 은색 창이 나선으로 회전하며 형형색색의 빛깔을 뿌리기 시작했다.
“채홍(彩虹).”
담담한 음성이 들린 순간, 차소림의 손을 떠난 창이 광선처럼 쏘아져 악신의 몸통을 섬광처럼 꿰뚫었다.
– 크랔!
악신이 눈에 보일 정도로 움찔한 찰나, 차소림이 손이 다시금 살며시 움직였다. 마치 이리 오라 손짓하는 것처럼.
“홍예(虹霓).”
그러자 꿰뚫어 지나친 창이 빙글 반전하더니 반원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리고 무지개 빛깔을 내뿜으며 돌아와, 처음보다 더한 기세로 악신의 몸통을 훑어 베어버린다.
– 크라라랔!
분분히 흩날리는 검은 연기. 입을 다물지 못하겠다. 수라마창은 그렇다 쳐도, 아르쿠스 발키리 세트도 신기에 해당하는 무기였나?
– 무지개 여신 플라비우스의 전투 처녀니까. 안될 것도 없지.
급박한 상황 속 들려온 화정의 차분한 음성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가라앉혀줬다.
그때 잠깐 비틀거리는가 싶던 악신이 우뚝 몸을 가눴다.
어그로가 튀었다. 놈이 내게서 완전히 몸을 돌리고 다른 두 명을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피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갑자기 배꼽이 훅 쏠리는 느낌과 함께 눈앞의 광경이 빠르게 멀어졌다. 누군가의 힘으로 어딘가로 끌려간다.
잠시 후, 나를 가볍게 받아내는 부드러운 육체가 느껴졌다.
*
“회수했어요!”
김수현을 끌어온 제갈 해솔의 낭랑한 음성이 울렸다.
“────. ────. 안젤루스여!”
그러자 안솔이 득달같이 달려와 지팡이를 뻗었고, 곧 하얗고 따뜻한 빛이 김수현의 얼굴을 물들였다.
“어, 어떡해…! 피 좀 봐…!”
이유정은 울먹거리는 낯으로, 핏물로 얼룩진 김수현의 얼굴을 훔치며 미리 준비한 물약을 입가로 꾹 밀어 넣는다. 우악스럽게 밀려드는 액체를 한 차례 마신 김수현은, 겨우 주변을 돌아보고 놀란 빛을 드러냈다. 도망치라고 기껏 시간을 끌었는데 전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김수현이 남다은을 향해 벌컥 외치려고 하자 갑자기 하승우가 앞을 가로막았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남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알고 있습니다. 저 악신은 일반 공격은 통하지 않고, 특수한 힘이 깃든 무기로만 타격할 수 있죠. 감안하고 남겠다는 겁니다.”
“……!”
하승우는 아주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김수현은 입을 뻐금거렸다.
하승우가 흘깃 뒤를 쳐다봤다.
콰쾅!
신전을 울리는 굉음. 턱을 걷어차일 뻔한 공찬호가 간신히 몸을 빼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옆구리를 얻어맞아 빙그르르 날아가 벽에 틀어박혔다.
그 순간 김수현이 눈을 찌푸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기는 했지만,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연기는 어떤 갈래도 뻗지 않았으나, 갑자기 옆 공간이 이지러지더니 연기가 치솟아 후려쳤다.
문득 하승우가 김수현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김수현. 내 제한을 풀어다오. 잠깐 시간 끄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누구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속닥거린다.
“전투 가능한 사람들은 나가서 싸울 거예요. 마법사와 사제들은 맨투맨으로 지원하고, 불가능한 근접 계열들은 여기서 보호할 거고요.”
미처 반문하기도 전, 제갈 해솔이 설명을 잇는다.
김수현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세게 짓씹었다.
“전부 다 죽을 겁니다.”
으르렁거리는 음성이 흘러나왔으나 그 누구도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콧김을 세게 뿜은 김수현은 결국 머리를 끄덕였고, 그러자 하승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곧바로 돌아보자 아슬아슬하게 날아다니는 차소림과 파리를 잡으려는 듯 연기를 크게 올린 악신이 보였다.
모종의 불안감을 느낀 걸까. 김수현의 눈이 큼지막하게 떠졌다.
“오, 오라버니!”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은 터라 안솔이 제지했지만, 김수현은 뿌리치며 몸을 바로 했다.
다음 순간,
“급 가속!”
세찬 바람과 함께 김수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머리카락이 나부낄 정도의 강렬한 풍압에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눈을 찌푸리며 앞을 노려본다. 그리고,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손바닥처럼 내리쳐진 연기가 이제 막 차소림에 닿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펄럭이는 붉은 망토가 빛살처럼 허공을 가른다.
시간은 이제 1초가 흘렀을 뿐이다.
바로 그 순간!
콰앙!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붉은 망토와 검은 연기가 교차했다. 간신히 빠져 나간 붉은빛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검은빛은 하릴없이 하강해 얼음 바닥을 쳐부쉈다.
“아…!”
누군가 경악에 가까운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때였다.
– 카아아아아아아앜!
짜증에 가까운 괴성을 질러댄 악신의 몸이 돌연히 울룩불룩 솟았다. 이어서 펑펑 폭음이 터지며 검고 뾰족한 줄기들이 미쳐 날뛰듯 몸체를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도저히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어떤 소음도 일지 않았지만, 기백에 달하는 수가 줄기줄기 뽑아져 나와 벼락처럼 시야를 덮으며 하늘로 쏴졌다. 그 끝은, 차소림을 안고 공중을 선회하는 김수현을 향하고 있다.
그 찰나의 순간,
화르르르르르르륵!
김수현이 발이 힘차게 허공을 휘저었고, 이내 흑 줄기와 비슷한 수에 달하는 열화검이 이글거리며 맺혀가기 시작한다.
허공을 찢어발기며 줄기차게 올라가는 흑 빛 줄기들.
허공을 불태우며 넓고 둥글게 퍼지는 맑은 불꽃의 검들.
흡사 뚫으려는 창과 막으려는 방패를 보는 듯한 광경은 진정으로 장관이었다.
다음 순간, 두 기운이 사정없이 충돌하고 흩어지며 접합 지점으로부터 커다란 빛무리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짓눌린 풍압이 돌풍으로 변해 사방으로 휘몰아치고, 동시에 기이한 진동이 아득히 울리며 모든 소리를 잡아먹는다.
*
– 쿠쿠쿠쿠쿠쿠쿠쿵!
번쩍 터진 빛이 영상을 가득히 메웠다. 어둠에 몸을 묻은 두 존재는 체면도 잊은 채 상체를 바싹 기울여 주시하고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빛이 사그라지고, 다시 영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빛이 사라졌을 뿐, 현상은 여전히 이어지는 중이었다. 마치 물결에 쓸려나가는 것처럼 얼음 신전이 와르르 무너진다. 그야말로 성대한 파괴 축제였다. 그리고 그 중앙으로 악신의 형체는 굳건히 서 있었다.
“꽤 선전하는군요. 솔직히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숨을 토하듯 감탄을 터뜨린 루시퍼는,
“하지만, 이제 끝났네요.”
옆을 돌아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끝났다고?”
“거의 말입니다.”
사탄의 반문에 루시퍼가 말을 정정했다.
그러나 사탄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글쎄.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일 수도.”
“그래요? 제 눈에는 김수현이 거의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이는데요?”
루시퍼가 영상을 가리켰다. 그 말대로 상황은 과히 좋지 않았다. 아직 서 있는 악신에 반해, 차소림을 끌어안은 김수현은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무언가 탐탁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예. 저기에 김수현만 있는 건 아니죠.”
사탄의 말을 끊고 루시퍼가 맞장구 쳤다. 마치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이.
“하지만 대다수가 보통 인간에 불과해요. 물론 신기를 가진 인간도 있습니다만, 김수현만 한 무력을 보이지는 못합니다. 악신의 입장에서는 갓 송곳니 난 강아지 정도로 느낄 겁니다. 아니, 그냥 김수현이 쓰러지면 모두가 무너지게 돼 있어요.”
“…너무 낙관적인데.”
확신하듯 말하는 루시퍼의 음성에 사탄은 여전히 영상을 바라보며 갸웃했다. 그러자 루시퍼의 입가에 오묘한 미소가 더해졌다.
“아! 물론 주의해야 할 사용자가 한 명 더 있기는 합니다.”
마치 깜빡 잊기라도 한 듯 루시퍼는 과장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영상을 향해 손을 뻗더니 이리저리 조작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였다.
잠시 후, 크게 확대된 영상에 한 여인이 모습을 비쳤다. 손톱을 깨물며 불안한 낯으로 앞을 쳐다보는 여인은 바로 안솔이었다.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 계속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퍽이나 안쓰러워 보였다.
“이름이 안솔…. 이었나? 재미있는 힘을 가진 인간이에요.”
“너…. 알고 있었나?”
영상에서 눈을 뗀 사탄이 루시퍼를 흘끗 쳐다봤다. 영상을 보는 내내 무심하던 눈동자에 처음으로 놀랍다는 빛이 스쳤다.
“그럼요. 그 이상한 힘 때문에 우리 계획이 몇 번이나 가로막혔습니까? 김수현만이 아니라 안솔도 요주의 인간이지요.”
루시퍼는 킥킥 웃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아무튼, 저 귀여운 공주님의 출현은 이미 예상했습니다.”
가볍게 말하기는 했지만, 루시퍼의 목소리는 뜻 모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탄. 사용자라는 존재는 폭주하는 악신을 절대로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이건 절대 불변이에요. 그럼 저들이 현 상황을 자력으로 타개할 유일한 해결책이 뭔지 아십니까?”
“재 봉인이겠지.”
깍지 낀 양손을 무릎에 놓은 사탄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죠. 하지만 현재 그 정도의 봉인을 걸 수 있는 인간은 저기에 없어요. 딱 하나 남은 방법은, 저 악신을 봉인한 여인을 깨우는 겁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죽었지요.”
“…….”
청산유수처럼 이어지는 루시퍼의 설명에 사탄은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그러면서 이제야 루시퍼가 왜 저렇게 자신만만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덤덤하던 낯에 진한 흥미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말인즉, 루시퍼는 시작부터 전황을 뒤집을만한 거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그랬군. 그랬어. 너는 애초 저놈들이 올 걸 예상하고 계획을 진행한 건가.”
“뭐, 그냥 염두에 뒀을 뿐입니다.”
루시퍼가 부드러이 웃으며 말하자 사탄이 아차 하며 되물었다.
“혹시 되살아날 가능성은 없나?”
“어떻게요? 이미 악신의 뱃속으로 들어가 영혼까지 갈가리 찢겼는데요? 그 불쌍한 여인은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존재입니다. 애초 소환도, 되살리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루시퍼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깨까지 으쓱거리며 말하는 폼이 마치 흥분한 어린 아이를 보는 것 같아 사탄은 싱겁게 웃었다.
“하하. 이제 좀 웃으시네요. 자아, 사탄. 이제 마무리를 구경하자고요. 일이 잘 풀리면 같이 축배나 들도록 합시다.”
그렇게 말한 루시퍼는 비로소 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상은 아직 안솔을 비추고 있었다. 루시퍼는 또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안솔을 보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김수현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응?”
그러한 찰나, 루시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멈칫했다.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정확히 말해보면 안솔의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태도가 확 변했다. 치떠진 눈동자는 또렷하게 앞을 주시하고 있으며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흡사 긴 칼날 위에서 무섭게 집중하는 무당을 보는 듯했다.
“…오호. 이제야 공주님께서 나서시는 건가?”
예상대로 안솔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 투쾅!
이윽고 빛의 기둥이 광선처럼 내려오더니 영상 속 풍경이 덜컹 흔들릴 만큼 강한 힘을 뿜는 천사가 강림한다.
그럼에도 두 악마의 태도는 여유만만이었다. 특히 루시퍼는 이제 곧 저 공주님의 얼굴이 일그러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단, 루시퍼는 세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첫 번째는 안솔의 행운이 103 포인트로 올라감으로써 있을 수 없는 일을 구현해주는 ‘Blue Dahlia’라는 권능이 깃들었다는 것. 두 번째는 행운이 105로 올라감으로써 의식적인 의도성을 한층 강화해주는 ‘바라는 대로’의 권능이 깃들었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그때,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안솔이 앞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저건…?”
“상자?”
의아해 하는 두 악마의 음성이 겹쳤다.
루시퍼는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가 급히 화면을 전환했다. 그러자 허공을 힘차게 날아가는 적당한 크기의 상자가 영상에 잡혔다.
– 천사 님! 부디, 오라버니가 더 이상 다치지 않고 이길 수 있도록…!
이미 개봉돼 입구를 덜렁거리는 상자는, 이미 허연 빛을 흘리며 공중에 새하얀 마법 진을 토해내고 있었다.
– 기적…!
어디서 간절한 외침이 아스라이 들려오자, 소환된 마법 진은 한층 더 눈 부신 빛을 뿜어내며 엄청난 속도로 배열(配列)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 화아아악!
이어지는 광경을 바라본 순간,
“무…!”
루시퍼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영상은 또 한 번 찬란한 빛으로 물들었다.
============================ 작품 후기 ============================
2회로 나눌까 하다가, 그냥 1회로 합쳤습니다. 독자 분들 읽으시는데 그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하.
그나저나 간만에 01시 00분 이전에 업데이트해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