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94
00793 내흉(內凶). =========================================================================
“자, 잠깐!”
크게 당황한 루시퍼가 갑작스레 손을 들었다. 거의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일순간 화면을 가득 채우며 흐르던 빛이 우뚝 멎었다. 영상이 정지된 것이다.
“루시퍼.”
“잠시, 사탄. 자, 잠시만요.”
루시퍼의 얼굴에는 당혹한 빛이 역력했다. 사정 조(調)로 말하는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후읍, 루시퍼는 일부러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화면이 거꾸로 흐르며 되감기기 시작한다.
잠시 후, 영상이 도로 정지됐다. 되감긴 화면은 공중을 날아가는 상자를 비추고 있었다. 정확히는 허공에 생성된 하얀 마법 진을.
“소환 진입니다.”
루시퍼는 애써 침착해 하며 말했다. 어느새 길게 찢어진 두 눈이 화면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무작위 소환 진이군. 그것도 중간 세계로 한정된. 천사들의 작품인가?”
사탄도 담담히 긍정했다. 거의 정답에 가까운 수긍이었다. 루시퍼도 사탄도 진(陣)에 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춘 터라, 한눈에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허나 무언가 뒤숭숭한지 차분한 목소리에 희미한 불안이 묻어 나왔다.
이윽고 화면이 느릿하게 흐르고, 그에 따라 마법 진도 조금씩 변화를 보인다. 두 악마는 호흡도 잊은 채 집중해서 진의 변화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처음 상자가 토해낸 마법 진은 여러 기호(記號)가 일정한 법칙으로 나열된 형태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진을 구성하는 기호가 모조리 녹아 내리더니 새로운 문자가 쓰이기 시작했다. 마치 아메바처럼 분열한 빛의 글자는 전보다 절반 이상 작아진 크기로, 그러나 훨씬 복잡하게 진의 빈 공간을 채워나간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배열도 기호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새로이 완성된 마법 진은, 첫 형태와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아예 다른 마법 진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제 더는 소환 진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으음.”
루시퍼에게서 깊은 침음이 새어 나왔다. 새롭게 변화한 마법 진은 대 악마조차도 쉽게 읽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난해했다.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기분이 드는데 해석을 시도하면 명확한 정의(定義)가 내려지지 않는다. 심지어 사탄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루시퍼가 다시 영상을 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즈음.
“이건.”
무언가 알아차렸는지 사탄이 어둠에 묻은 몸을 일으켰다. 루시퍼의 눈에 비친 사탄은, 시뻘건 동공이 일렁이며 황당해 하는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뭐, 뭡니까?”
사탄치고는 꽤 드문 반응이라 루시퍼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동시에 어렴풋하게 느끼던 불안이 점차 구체화하는 걸 느꼈다.
“복합 진이다.”
영상으로 다가가는 사탄의 행동은 어딘가 모르게 황급함이 엿보였다.
“복합 진이요?”
루시퍼가 반문한 찰나, 사탄은 영상에 손을 대고 비스듬하게 그어 내렸다. 그러자 핏빛 잔상이 화면 속 마법 진을 깔끔하게 이등분한다.
“각자 역할은 구분돼 있지만, 서로 연동하는 형식이야. 연결 형식이 섞여 있어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사탄이 빠르게 설명하며 마법 진의 오른쪽 아랫부분을 가리자 왼쪽 윗부분이 남는다. 두 쌍의 눈초리가 남은 부분을 유심히 바라본다.
“아.”
그 순간 가늘게 노려보던 루시퍼의 두 눈이 치뜨듯이 커졌다.
마침내 깨달았다는 듯이.
“차원 이동 진…!”
“차원 이동 진이다.”
경악을 부르짖는 외침과 떨리는 음성이 겹쳤다.
루시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말도 안 돼!’ 라는 소리가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으나 간신히 삼켰다. 눈앞의 영상이 조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남은 부분은…!”
사탄이 가린 손을 치웠다. 오른쪽 아랫부분이 드러나자 루시퍼가 멈칫했다. 마법 진 때문이 아니라 불현듯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이미 영상을 정지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상황이었다.
그럼 과연 현재 상황은 어떻게 됐을까?
*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전황을 정확히 보고 판단한 것도 아니었다. 상자도 반 장난으로 가져왔고 설마 쓸 일이 있으랴 싶었다. 애초 괴물 소환 상자 자체가 경우의 수를 따지는 게 아니라, 도박이요 모험이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안솔은 단 하나를 바랐을 뿐이다.
‘오라버니가 더 다치지 않고 이길 수 있도록…!’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일으키는 ‘기적’.
있을 수 없는 일을 구현해주는 ‘Blue Dahlia’.
안솔이 의식하는 의도성을 한층 강화해주는 ‘바라는 대로’.
그리고 ‘괴물 소환 상자 4’.
이 네 힘이 어우러진 결과가 지금 막 나타났다.
툭, 떨어진 상자가 바닥을 굴렀다. 이어서 그 어떤 빛보다 눈 부신 광파(光波)를 뿌리는 마법 진이 공중으로 드높이 치솟는다. 진은 흡사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느릿하게, 그러나 가속하며 회전을 시작한다.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절망을 느끼던 모두가 잠시 처한 상황을 잊고 고개를 젖힌다. 심지어 악신도 행동을 멈추고 몸을 돌렸을 정도였다. 느닷없이 발생한 징후(徵候)가 모든 존재의 시선을 빼앗는다.
어느새 진은 구성 기호를 보지 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동시에 점차 빛깔이 진해지며 크기를 키워간다. 마치 한계에 한계를 넘는 모터처럼 맹렬하게 돌아간다.
키이이잉!
문득 진이 철을 긁는 듯한 괴성을 토해냈다. 그러자 주변 공간이 꾸겨지듯 일그러지더니 종래 소라 껍데기처럼 둥근 나선을 그리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 크어어엌!
돌연 악신의 거대한 몸체가 허둥대는가 싶더니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날아가 공중에 떠 있는 진의 중앙에 처박혔다.
– 까라라라라라라랔!
부활 이후 처음으로 악신이 비명을 터뜨렸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공간의 소용돌이가 악신의 몸체에 흡착해 있는 힘껏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천장까지 닿았던 키가 서서히 줄어드는 게 그 방증이다.
악신은 안간힘을 쓰며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소용돌이는 더욱 끈덕지게 붙으며 기운을 흡수했다. 마치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벗어나고 달라붙는다.
그러나 악신도 이대로 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난데없이 연기 두 갈래를 솟구치게 하더니 진은 물론, 인근의 소용돌이까지 마구잡이로 난타하기 시작했다. 물어뜯긴 연기가 빨아 먹혀도 줄기차게 뽑아내며 있는 힘을 다해 쾅쾅 후려갈겼다.
몸을 돌보지 않고 계속 치자 진이 덜덜 떨며 진동했고, 순간적으로 흡입이 약해진 틈을 타 악신은 겨우 소용돌이에서 벗어났다. 그리하여 겨우 바닥으로 추락했을 즈음, 악신의 몸집은 처음보다 십 분의 일 가량 줄어든 상태였다.
– 크롸롸롸롸롸롸뢐!
무척 화가 났는지 악신이 아가리를 크게 벌려 흉악이 포효한다.
키이이이이이이잉!
그에 반응하듯 마법 진도 흉포한 맞울림을 떨어 울렸다.
얼음 신전이 무너지고 대지가 흔들린다. 단순히 소리와 소리가 부딪음에도 불구하고, 충돌의 여파는 지진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렇게 악신이 혼신의 힘으로 저항하는 동안, 진이 비로소 응축한 힘을 일거에 해방하며 터뜨렸다. 폭발하는 격류(激流)처럼 사납고 빠르게 흘러 넘치는 마력은, 악신을 가볍게 지르밟을 만큼 살벌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때 휘몰아치던 소용돌이가 벌컥 멈췄다. 이윽고 마법 진이 한 번 더 찬란한 빛을 밝히며 모종의 기운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동시에 기묘한 공명(共鳴)이 이제 겨우 형체만 유지하는 신전에 망망하게 메아리쳤다.
홀연히 모든 소음이 차단됐다. 아니. 사라졌다는 표현이 옳으려나. 그저 잡음 섞인 이명(耳鳴)이 깜박대며 고막을 자극할 뿐, 공간은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아, 하아.
안솔은 갑자기 호흡 곤란을 느꼈다. 외부 소음이 차단돼서 그런 걸까. 내부서 울리는 숨소리나 침 삼키는 소리가 한층 또렷하게 들린다.
문득 어디선가 불어온 강풍이 안솔의 머리카락을 세차게 흐트러트렸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풍압이 거세기도 했지만, 바람이 품은 기운이 굉장히 뜨거웠기 때문이다.
모든 걸 불태울 것 같은 뜨거운 열풍(烈風) 속, 안솔은 나부끼는 로브를 꾹 말아 쥐며 하늘을 노려봤다. 눈 부신 빛에 휩싸여 잘 보이지 않았으나, 붉은빛이 흐르는 부드러운 각선(脚線)이 언뜻 눈에 스친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쉴 틈 없이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마침내 무언가가 완전히 빠져 나왔다.
이윽고 사뿐히 내려앉는 그 무언가를,
“……!”
안솔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
“흐음?”
여인이 가볍게 고개를 떨치자 부드럽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흘러내렸다. 콸콸 흐르는 용암을 연상케 하는 머리카락은 생동감이 넘치고, 두어 가닥 살며시 매만지는 손가락은 너무나 곱고 관능적이다.
그뿐일까. 몹시 선명한 선홍 빛을 담은 눈동자, 가지런히 잡힌 이목구비, 야무진 턱 선, 손을 대면 미끄러질 것만 같은 살결…. 모든 것이 대단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매혹적인 자태였다.
“허…. 이건 또 어떤 변고인가.”
탄식한 여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단순한 동작임에도 불구하고, 오연한 눈매로 느긋이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은 너무나도 권위적이다. 그러나 거슬리지 않는, 외려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감미롭고 자연스럽다.
한 가지 특이한 건, 여인의 배가 한껏 부풀어 있다는 것이다. 만삭의 임산부처럼 남산만 하게 크고 둥글게 부르터 오른 상태였다. 그 모습조차도 무척이나 아름답다.
“수나야, 수나야. 너무나 이상하구나. 이게 도대체…. 응?”
그 순간 노래 부르듯 말하며 부푼 복부를 쓰다듬던 여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시선도 한 곳으로 고정됐다. 아직 빛이 사그라지지 않아 먼빛으로 커다랗고 거대한 형체가 시야로 들어왔다.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하? 타나토스의 아이가 왜 이곳에…?”
– 케레레레레레레렠!
그때였다. 놀라워하는 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악신이 쿵쿵거리며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흡사 미쳐 날뛰는 멧돼지처럼 진로에 걸리는 모든 걸 밟아 부수며 짓쳐온다. 아무리 좋게 봐도 환영하는 의미는 아니라, 그 흉악함을 느낀 여인의 눈매가 한껏 가늘어졌다.
“미친놈이로군.”
여인이 담박한 목소리로 말을 뱉는다. 그러는 동안 악신은 완전히 근접해 있었다. 마치 한 방에 터뜨려 죽이겠다는 듯, 미끄러지듯이 거리를 줄인 악신이 한껏 몸을 비틀어 젖힌다. 그 어느 때보다 길고 두꺼운 연기가 용솟음치며 하늘로 올라갔다가 주먹처럼 내리 꽂힌다.
“후유.”
그 찰나의 순간, 여인이 짧은 한숨을 흘리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왼손으로는 배를 살짝 움킨 채.
콰앙!
공간마저 떨어 울리는 굉음. 충돌의 여파로 허연 연기가 자욱이 치솟았다가 살그머니 가라앉았다.
잠시 후.
“…참으로 서럽구나. 내 왕을 잉태했는데도 보호해줄 지아비가 없으니 이런 꼴을 당하는가.”
서글픈 목소리와 함께 드러난 광경은, 진정으로 신기에 가까웠다.
거대하게 뭉친 연기가 가녀린 한 손에 잡혀 있었다. 악신이 온 힘을 다한 일격을, 여인은 마치 어린애 손목 비틀듯 간단하게 막아낸 것이다.
여인은 잠시 누군가를 원망하는 듯 붉은 입술을 삐죽였지만, 곧 차분히 눈을 치떠 상대를 올려다봤다.
“그나저나 네놈은 정녕 미친…. 아, 정말로 미쳤군.”
여인은 악신의 상태를 단박에 알아봤다. 그러더니 자극적으로 웃어 보였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분노라기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웠다.
“그래도….”
콰르르륵, 콰르르륵!
문득, 시뻘건 염화(炎火)가 접합 지점으로부터 콰르르르 일어나 연기를 살라먹으며 불타오른다. 꿈틀꿈틀 용틀임 치는 불꽃은, 이 세상 어느 기운보다 파괴적이다. 심지어 태고의 불이라 불리는 화정보다도.
그 순간, 여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진득하게 흘러나오는 살의가 차후 벌어질 일을 예고해주는 듯하다.
“왕을 시해하려 한 죄는,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일대를 웅혼이 울리는 미성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사형 선고였다.
============================ 작품 후기 ============================
“삐아아아아아!”
투명 안솔이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