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67
00866 D-Day, Five. =========================================================================
푸른 궁전을 나와, 거리를 걷는다.
결국에는 결단을, 아니. 선택을 내리지 못한 채 엘도라는 신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의식이 또렷한 만큼 혼란은 가일층 크게 느껴졌고, 덕분에 길거리의 웅성거림은 사색에 아무런 방해도 주지 못한다.
이것이 정말로 옳은지 그른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여전히 확신은 서지 않는다.
이것과는 별개로, 걸어가는 이유는 확고하다. 개인을 위해, 인간을 위해, 더 나아가 남 대륙 전체를 위해서라고. 명분만큼은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확실하다. 그래. 지금 하는 행동이 합리적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자꾸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확신하지 못하는 건, 스스로 해답을 구하지 못해 누군가에게 기대고, 또 바라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물론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할 수는 있으나, 이러한 과정 자체서 뜻 모를 불안감이 발생한다. 어디서부터인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불현듯 바람이 불었다. 이 흐름을 느끼려는 듯 엘도라는 턱을 젖히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바람은 쌀쌀했지만, 들끓는 머릿속을 차갑게 식혀준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눈앞에 하얀 신전이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고 계단을 올라가기 직전, 엘도라의 두 눈이 아래를 향했다. 오른쪽 어깨서부터 비스듬히 내려오는 끈 끝으로 흰 가방이 메어져 있다.
그 순간 잠깐, 갈등의 빛이 스치기는 했다.
그러나 고민은 잠시. 엘도라는 곧 결연한 눈빛을 빛내며 한 손을 가방 속으로 찔러 넣는다. 무언가 찾는 듯 한참을 뒤적이다가, 이내 꼭 말아 쥔 주먹을 빼 머리꼭지로 올린다.
손에 움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머리 장식이었다. 검푸른 빛을 띤 손톱만 한 구슬 장식이 알알이 박혀 있다. 그 수는 정확히 열 개. 엘도라는 비장하다 생각될 정도의 손놀림으로 금발을 질끈 묶었고, 그제야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고 신전으로 들어간 끝에 비로소 포탈이 보였다. 바로 앞에 선 후, 몇 번의 심호흡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잔잔히 물결치는 빛의 바다로 조용히 몸을 묻었다.
이어서 다다른 곳은,
“어서 와요. 엘도라.”
잿빛 일색으로 된, 몹시 무겁고 괴괴한 공간이었다.
“조금 늦었군요. 이미 모두 모여 있는데.”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소름 끼칠 만큼 무감정한 목소리다. 엘도라가 담담히 고개를 숙이자, 천사는 느릿하게 제단에서 일어섰다.
“뭐 많이 늦은 건 아니니 상관없겠죠. 그럼 바로 회동 장소로 안내….”
그때였다. 막 손을 저으려던 천사가 돌연 눈을 살짝 치떴다. 이제야 엘도라의 행색을 확인한 모양이다. 마치 스캔하는 것처럼 천천히 위아래를 훑더니 살짝, 미소 짓는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머리 묶은 건 처음 보네요. 회동이라고 특히 신경 써서 온 건가요? 후후.”
“네?”
“긴장 풀라는 말이에요. 얼굴이 너무 굳어 있어서.”
“…그렇습니까.”
엘도라는 머리 장식을 만지려다가, 얼른 손을 내려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몰래 안도의 숨을 흘린 찰나.
“가방은 왜 메고 왔어요?”
천사가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순간 숨이 멎었으나 엘도라는 반사적으로, 그리고 준비해왔던 대로 입을 열었다.
“괴물 소환 상자입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한데 이 자리에 왜…?”
역시 알고 있었나, 라는 생각이 스쳤으나 표정 관리에 애쓰며 말을 잇는다.
“클랜원들과 나가기 직전 호출을 받았습니다.”
“나가요?”
“어느 괴물이 소환될지 모른다는 말을 들어서.”
“아~. 그럼 얼른 돌아가고 싶겠네요?”
천사는 이해했다는 듯 끄덕이더니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요. 금방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이윽고 천사가 손을 젓자, 찬란한 빛이 흐물흐물 일렁이며 새로운 포탈 하나가 생성된다.
“엘도라는, 현명하니까요.”
한 마디 남기고 따라오라는 듯 들어가는 천사를, 엘도라는 조용히 바라봤다. 그리고 빛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을 즈음, 현명하다는 말을 입속으로 되뇐 후, 천천히 포탈로 향했다.
한편, 엘도라가 또 하나의 포탈로 걸어가고 있을 무렵.
“엘도라는?”
“입구 앞에서 머리 묶는 걸 확인했습니다.”
신전 외곽 구석진 곳에서는 두 사용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좋아. 그럼….”
“마침내 D-Day의 시작이군요. 끝나고 뵙죠.”
후드를 푹 눌러쓰고, 몸을 돌려 떠나는 사용자는 바로 이안이었다. 그리고 홀로 남은 멜리너스는, 왜인지 잔뜩 긴장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파팟!
이윽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문득 플래시 터지는 소리와 터졌다.
“응?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들었는데. 어, 저건 뭐야?”
“뭔데? 뭐가?”
“하, 하늘에….”
결코 작은 소리가 아니었던 터라, 거리를 거닐던 사용자들이 하나둘 고개를 젖힌다. 올려다본 곳에는, 어느새 연한 푸른빛이 청명한 하늘에 물감을 섞은 듯 서서히 번져가는 중이다.
차츰차츰 형체를 갖춰가는 그것은, 바로 영상이었다. 흡사 통신 구슬로 보는 것처럼, 반투명한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중요한 건, 하늘에 펼쳐진 빛무리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상은 도시 곳곳에서 떠올라, 얼추 어림잡아도 열 개는 돼 보인다.
– 그럼, 엘도라?
미처 의문을 가지기도 전, 웅혼한 음성이 허공을 울렸다.
– 오늘 왜 이 자리를 마련했는지는, 스스로 알고 있으리라 믿어요.
언뜻 봐도, 영상을 한가득 채울 만큼 천사가 집결해 있는 장면은 진정으로 장관에 가까웠다. 그 신비로운 광경에 홀리기라도 한 듯, 사용자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하늘로 쏠렸다.
그리고.
– …….
오직 홀로 지상에 서 있는 엘도라의 정수리서, 가무스름한 기운이 요요히 피어오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몹시 희미하고 어렴풋한 기운이었다.
*
각 대륙 내 전(全) 소환의 방과 연결된 독립 공간, ‘천상’.
“요 며칠간 상당한 수의 사용자가 소환의 방을 드나들었어요. 근 몇 년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말이죠.”
차마 보이지도 않는 아득한 꼭대기서, 선연한 음성이 내려와 귓전을 울렸다.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수십 수백 명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었네요.”
“…….”
“그리고 이 소문의 근원이 오딘 클랜이라는 말이 있던데…. 맞나요?”
“…….”
묵묵부답. 상대가 물었으나, 엘도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
“…맞나 보군요.”
가벼운 한숨이 흐른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는 듯 질책하는 어조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 들어올 때와 비교해 엘도라의 가슴은 완전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이 정도의 숫자가 사방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주눅이 들 법도 한데, 담담한 얼굴로 오연히 서 있었다.
외려 고요하지만, 절대 호의라고 보기 어려운 눈초리들과 마주하니 차갑게 식는 듯한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왜 그랬나요?”
비로소 시작된 질문에 엘도라는 느릿느릿 고개를 젖혔다.
이윽고 끝이 보이지 않는 천상이 시야에 절반쯤 담길 즈음.
“왜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질문은 제가 하지 않았나요? 사용자 엘도라.”
천사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면, 과연 착각일까.
아니. 착각이 아니다. 흡사 주변 기온이 내려가기라도 한 듯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엘도라의 목에는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우선 인정하겠습니다. 동 대륙 정벌을 계획한 건, 오딘이.”
“역시 그랬군요. 그래서, 왜 그런 되지도 않는 계획을 세웠느냐는 말이에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끊기자, 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그래서 묻지 않았습니까. 안 됩니까?”
“…네?”
“동 대륙을 공격하면 안 되느냐는 말입니다.”
“…….”
그 순간, 사뭇 도전적인 어투를 느낀 걸까. 공간이 갑작스레 적막해진다.
물론, 정적은 길게 가지 않았다.
“네. 안 돼요.”
단호하리만치 냉정한 통보에 엘도라의 눈이 한껏 가늘어진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계획을 세운 건가요?”
“소문은 이미 접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게 제 입장입니다.”
“흐응. 중앙을 둘러싼 경쟁 구도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천사는 바로 핵심을 꺼냈다.
“뭐, 상당히 흥미로운 설이었어요. …그런데, 확신하나요?”
“……?”
“그냥 심증만으로는, 제대로 된 근거라 할 수 없잖아요? 정말 그럴 거라는 증거는요?”
“없습니다.”
엘도라가 고개를 가로젓고, 천사가 싱겁게 웃으려는 찰나,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증거도 없으니까요.”
엘도라가 침착히 말을 잇는다. 천사의 얼굴도 자연스레 굳어졌다.
“제가, 방금 잘못들은 건가요?”
“…….”
“설마 이런 기본적인 것까지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엘도라? 엘도라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아야 해요.”
“처지?”
“그래요, 처지. 엘도라가 그냥 보통 사용자였다면, 그래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해했을 거예요. 하지만 엘도라는 수호자 아닌가요? 무릇 수호자라는 건.”
“저는 동 대륙의 수호자가 아닌, 남 대륙의 수호자입니다.”
그 순간 이번에는 천사의 말이 끊겼고, 낯에 불쾌하다는 기색이 서렸다. 그러나 지상에 서 있는 엘도라의 눈에는 그 반응이 보이지 않는다.
“이번 계획의 요지는 미래에 경쟁할 수도 있는 대륙을 앞서 제거한다. 즉 남 대륙 전체를 위한 길입니다. 한데 어째서 수호자 직무에 어긋난다는 듯이 말씀하시는 겁니까.”
“엘도라 코르넬리우스!”
그때, 처음으로 천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왜인지, 심지어 은은한 노기마저 섞인 음성이었다.
“지금 이 회동이, 감히 말장난할 자리처럼 보이나요?”
“어디가 말장난입니까?”
“뭐, 뭐라고요?”
“제 말 중 어느 부분이 말장난입니까?”
돌연 엘도라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확실하게 밝히겠습니다. 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합니다. 이 회동의 중요성도 알고 있고, 말장난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 주장을 단순 말장난으로 치부해 은근슬쩍 넘기려는 거라면, 이번만큼은 절대로 싫습니다.”
엘도라는 이 모든 말을 아주 강인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만큼은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의지마저 엿보였다. 그런 엘도라의 의지를 느꼈는지 아니면 말문이 막혔는지. ‘천상’에는 또 한 번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몹시.”
긴 침묵 끝에 천사가 입을 열었다.
“놀랍군요.”
엘도라의 눈이 살짝 떠졌다. 천상의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천사가 어느 순간 하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맨눈으로 얼굴이 확인 가능할 정도로 아래로 내려왔을 즈음.
“정말 제가 아는 엘도라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예요.”
공중에서 멈춘 천사의 입가에는, 놀랍게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엘도라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천사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해해요. 아니. 이해하기로 했어요. 엘도라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그렇게 여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옳고 그른 걸 떠나서 말이죠.”
공간에 흐르는 목소리는, 무척 감미롭고 황홀하다. 살살 달래는 듯한 어조에 절로 귀가 기울여진다.
“하지만 엘도라. 살면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이분법적 사고나 흑백 논리로 해결하려는 건 아주 잘못된 거예요. 누가, 어떤 목적으로 바람을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동 대륙을 공격하는 일이 그렇게나 중요한가요? 꼭 필요하다면 모를까, 아직 라그나로크도 안정화되지 않은 시점이잖아요?”
그러나 천사는 알고 있었을까.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로 매너리즘이라고 하나요?”
엘도라의 가슴에 붙은 불덩어리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걸.
“그래요. 엘도라는 언제나 합리적으로 행동했고, 맡은 임무에 항상 앞장섰지요. 그건 우리 천사도 잘 알고 있고, 높이 사고 있는 바예요. 그리고 오랜 숙원이었던 오크 성 공략을 이룬 결과….”
문득, 천사의 말이 서서히 흐려졌다. 그건 아마 현재 엘도라가 짓고 있는 표정을 봤기 때문이리라. 언뜻 괴로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차가운 비웃음을 띤 얼굴을.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원하는 건 감언이설로 스리슬쩍 넘어가는 게 아니라, 명확한 해답입니다.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천사의 낯에 서려 있던 봄바람 같은 나긋나긋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서 대체 어쩌자는 거예요?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는 건가요?”
“아니요. 제 질문에 진실하게 말씀해주신다면 그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답 여하에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요.”
주변을 감싸는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자존심이 상하는지 천사의 얼굴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이윽고 굉장히 언짢아하는 얼굴로 엘도라를 노려본다.
“좋아요. 어떤 질문이죠?”
“간단합니다. 이 계획을 취소시키고 싶다면, 이렇게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게.”
“우리 인간은, 아니 사용자는. 미래에 중앙을 둘러싸고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까?”
그 순간 천사의 얼굴에 떨떠름한 빛이 스쳤다. 그러나 엘도라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한 번 더 말을 이었다.
“긍정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떠나는 즉시 계획을 취소하겠습니다.”
“그, 그걸 제가 어떻게 장담하나요? 우리는 그저 도우미에 불과할.”
“물론 서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겠지요. 그러나 우발적인 사고가 아닌, 필연적으로 예정된 전쟁이 없느냐는 뜻입니다.”
“그, 그건.”
엘도라가 강하게 말하자, 천사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달싹거리더니 헛기침하며 말을 잇는다.
“흐흠. 아쉽지만 그건 말할 수 없는 확답할 수 없는 질문이네요. 신 대륙에 관한 정보는 사용자 스스로 알아내야죠. 상식적으로 남 대륙에만 특혜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위치를 알고 싶다는 게 아닙니다. 대륙 경쟁이 필연인지 아닌지. 이 부분에 관해서만 확실하게 말해달라는 겁니다. 이것도 안 됩니까?”
“…….”
“하.”
천사가 침묵하자 우습다는 탄식이 터졌다.
“그럼 결국 이 말이군요. 어떤 말도 해줄 수는 없다. 그냥 하지 마라.”
“에, 엘도라.”
“이건, 이 회동은…. 저를 통제하기 위한 자리입니까? 당신들의 뜻대로?”
“아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
침묵, 침묵, 침묵, 침묵.
아무리 기다려도 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주변을 감싸는 분위기는 무언의 긍정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결국, 레미엘은 눈을 돌렸다.
“그렇게 느꼈다면 사과하지요.”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아니요. 어쨌든 원하는 정보를 말해줄 수는 없어요. 우리도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사정?”
“그만. 이 이상의 발언은 허락하지 않겠어요.”
“……!”
그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엘도라는 여태껏 간신히 이어지던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엘도라의 얼굴이 와짝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왜….”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왜 우리 사정은 생각하지 않는 건데…?”
꾹 움켜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가운데,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어째서 말해주지 않는 건데…. 왜 계속 숨기려고만 그러는 건데….”
“그냥 하라는 대로 해라…. 그게 당신이 말하는 사정이야…?”
혼잣말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워낙 원통하게 말하는 터라 천사 전원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그랬어….”
“처음 만났을 때도…. 왜 소환했느냐고 울며불며 매달렸을 때도….”
옛일이 떠올랐는지, 목소리는 흡사 분노한 짐승이 우는 듯이 변해간다.
“왜! 왜 말을 못 해주는 건데!”
이제는, 숫제 울먹거림에 가까운 외침.
“이럼…. 결국 그런 거잖아…. 그 여인이 말이 맞는 거잖아….”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허탈함.
“엘도라. 지금 무슨 말을…?”
그때였다.
반문한 순간 숙여 있던 고개가 번쩍 들렸고, 천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처음 소환된 그 날처럼,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그렁그렁한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어느새 여기 서 있는 엘도라는 더 이상 사용자가 아닌, 그저 한 명의 나약한 소녀에 불과했다.
“진짜야? 그래서 말 못 해주는, 아니 안 해주는 거야?”
엘도라는 아이처럼 손등으로 눈을 쓱 닦고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천사를 노려봤다.
“뭐, 뭐가….”
말을 더듬는 천사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거미줄처럼 번진다. 그러나 참고 참았던 엘도라의 브레이크는 이미 한참 전에 풀려버렸다.
“앞잡이…. 라며.”
“앞잡이…?”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소환한 거라며.”
“모, 목적이요? 그게 무슨!”
그 순간이었다.
“제로 코드 때문이라며!”
드디어 폭발한 엘도라의 외침은 천상을 왕왕 울리는 것은 물론,
– 제로 코드 때문이라며!
영상이 재생되는 도시 전역을 떠르르 울렸다.
동시에 천사는,
“…아?”
두 눈을 찢어지라 뜬 채로 경악하고 말았다. 할 말을 잃은 듯 완전히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잠시 후.
이제껏 어떤 일에도 고요하던 천상이, 천사들의 술렁거림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의 반응을 확인한 순간, 엘도라의 내면에 하나의 확신이 생겼다.
“들었어, 들었다고. 천계를 지키기 위한 수호 장치, 제로 코드….”
“에, 엘도라? 자, 잠시만요.”
“그걸 지키려고 우리를 소환한 거라며. 사용자라는 웃기지도 않는 설정을 집어넣고, 그 적대 세력과의 전쟁에 활용하려고 그런 거라며! 아니야?”
“…….”
침묵은 이어졌지만, 천사의 반응이 빠르게 변했다.
놀라는 것도 잠시. 가볍게 손을 저어 소란을 사그라지게 하더니, 소슬한 눈으로 지상을 내려다본다.
“왜! 왜 아무 연관도 없는 우리가 너희 싸움에 말려들어야 하는데! 도대체 왜!”
“…그건, 누구한테 들었죠?”
“지금, 지금 그게 중요해?”
“네. 중요해요. 굉장히 중요하죠. 그러니 실토하세요. 누구한테 들었나요?”
감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는, 고저 없는 음성이다. 엘도라는 진정으로 슬프다는 듯이 입을 일그러뜨린다.
사과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
그냥 아니기를 바랐다.
아니. 설령 맞더라도, 진실하게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런데….
“흐으으으….”
탄식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뱉고서, 엘도라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쿵쾅거리는 가슴이 가라앉을 때까지, 어깨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몇 번이고 호흡한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엘도라는 소녀에서 다시 사용자로 돌아와 있었다.
“…돌아, 가겠습니다.”
힘겹게 열린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확답이 없는 이상, 동 대륙 정벌 계획의 취소는 없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저희가 합니다.”
“아, 그건 됐어요. 그나저나 아까 그 말, 누구한테 들었죠?”
“…그리고, 오늘부로 남 대륙 수호자를 그만두겠습니다. 그럼.”
“엘, 도, 라?”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엘도라는 개의치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일렁거리는 포탈을 향해 몸을 묻는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는 순간이었다.
핑!
한순간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울리더니,
파사사사….
단단히 틀어 올린 금발이 허무하리만치 아래로 흘러내린다. 단순히 무언가 스쳤을 뿐인데, 머리 장식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당연히, 엘도라의 걸음도 우뚝 정지했다.
“…레미엘.”
믿을 수 없다는 듯, 엘도라가 망연히 뒤를 돌아본다. 천사, 아니 레미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오늘 외출 약속은 미루는 게 좋겠네요.”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아니요? 돌아갈 수 없어요. 제가 허락하지 않았으니까요.”
“…허락?”
빠뜨뜨뜩!
이 갈리는 소음이 섬뜩하다. 그러나 레미엘은 피식 웃더니 혀를 차며 기지개를 켠다.
“후유, 이래서야 가브리엘 님을 탓할 수가 없네. 사 대 천사가 관리하는 북 대륙이, 왜 그렇게 김수현한테 휘둘리는가 싶었는데…. 후후.”
“김수현?”
“아, 있어요. 북 대륙에서 활동하는 사용자인데 조금 웃긴 인간이죠. 그럭저럭 강하고 실적 좀 냈다고, 우리를 아주 우습게 여긴다니까요?”
“…….”
생긋 웃은 천사는, 곧 실눈을 뜨며 상대를 가리켰다.
“바로, 당신처럼 말이죠.”
“…뭐?”
엘도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윽고 꽁꽁 매어져 있던 하얀 천이 사르륵 풀리더니,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엑스칼리버의 위용이 드러난다. 그러나 레미엘은 가당찮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칼 넣어요. 원칙상 우리가 당신을 해할 수는 없지만, 이건 상황이 조금 다르거든요.”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딱!
불현듯 레미엘이 손을 튕겼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생성돼 있던 포탈이 한순간 흔적도 없이 소멸한다. 소환의 방으로 가는 통로가 사라진 것이다.
“계속 똑같은 말을 하게 하는군요. 사용자, 엘도라 코르넬리우스? 당신은 돌아갈 수 없어요.”
“저를 어쩌실 생각입니까?”
엘도라는 약간 서글픈 듯, 그러나 적의 섞인 말투로 물었다. 레미엘은 어깨를 으쓱 들먹였다.
“걱정하지 마요. 그냥 긴히 말을 나눌 필요가 있을 뿐이니까. 원칙상 우리는 당신을 의도적으로 해할 수 없다고 했잖아요? 일이 끝나면 무사히 돌아갈 수는 있을…. 아.”
그리고 아까 들었던 말을 떠올린 듯, 싸늘하게 입을 연다.
“물론, 당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요.”
문득 엘도라는 왈칵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간신히 삼키며 꽉 쥔 엑스칼리버로 상대를 겨냥한다. 레미엘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칼 넣으라고 하지 않았나요? 참고로, 이게 마지막 경고예요.”
“저도, 마지막으로 말하겠습니다.”
“이런, 네 번 말할 생각은 없는데.”
“지금 당장 포탈을…!”
그때 레미엘이 갑자기 공중에서 일어섰고, 엘도라는 어마어마한 힘이 사방에서 덮쳐오는 걸 느꼈다.
아니. 그걸 느꼈을 때 엑스칼리버는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나 있었고, 몸은 크게 휘청거리는 중이었다. 결국에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세차게 구르고 말았다.
간신히 상반신만 올리자, 엑스칼리버를 잡은 채 허공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레미엘이 보였다.
“경고는 마지막이라고 했죠?”
건방지다는 듯 조롱 어린 음성에 엘도라는 핏물이 나올 정도로 입을 짓씹었다.
끝났다.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기대할 건 없다.
정말 장기 말이었고, 꼭두각시였다.
우리는 이들에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엘도라는,
“저는.”
흡사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주저앉은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소름 끼치도록 싫습니다.”
찰나의 순간, 아주 잠시 팔이 멈칫하기는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엘도라는 별안간 메고 있던 가방을 휙 집어 던졌다. 전력으로 집어 던진 만큼, 가방 속 내용물이 깨질 듯이 퉁겨져 나와 지면을 구른다.
퉁, 퉁, 퉁, 퉁!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몇 개의 상자가 입구를 덜렁거리며 바닥을 튕겨 다니고 있었다. 즉, 충격에 입구가 열린 채로 말이다.
그때였다.
“응? 이건….”
아까 확인했을 때는, 그냥 보통 괴물 소환 상자였다. 어떤 이상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보잘것없는 물건에 불과했다.
그래. 분명히 그랬을진대.
레미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내뻗으려 하자, 느닷없이 각 상자서 어두운 기운이 푹 뿜어져 나온다.
웅웅웅웅웅웅웅웅!
이어서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심상치 않은 흐름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진동은 삽시간에 천상을 점령하며 공간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거기다 상자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자, 느닷없이 강풍이 일어나 사방을 휩쓸기 시작한다.
“이, 이건! 어, 어떻게 된 거죠?”
“이게…! 일단 막아야…!”
“…아? 왜 통하지가…?”
“잠시만. 이 힘은….”
천사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무언가를 직감한 레미엘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감히! 허튼짓을!”
그러나 레미엘의 행동을 취하기도 전, 돌연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막대한 기운이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천사의 힘 따위는 가볍게 짓눌러 밟을만한, 엄청난 어둠. 그걸 느낀 순간 레미엘은 물론, 누구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총 세 가지 일이 순차적으로, 그러나 거의 틈을 두지 않고 이루어졌다.
웅웅웅웅웅웅웅웅!
진동이 한층 심해지며, 어디선가 거대한 흑색 마법 진이 우수수 떠오르고,
“꺄아아아아아아악!”
천사들이 사방팔방 떠올라 강제로 마법 진으로 이끌려 들어가며,
화아아아아아아악!
천사를 흡수한 흑색 진이 폭주하듯 한 번 더 어둠을 토해낸다.
“우욱!”
그 불길한 힘에 레미엘은 본능적으로 헛구역질을 했다가, 자신도 모르게 기함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어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스멀스멀 합쳐지며 형체를 갖춰간다.
– 여기.
– 글쎄요. 사탄이 말한 소환의 방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들려오는, 음험하고 어두운 대화.
– 그래도 힘은 완전히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럼 소환의 방과 연결된 공간이라는 뜻이겠죠. 아무튼, 정말 잘도 해줬군요.
마지막 대화를 들은 순간, 레미엘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여전히 주저앉은 엘도라는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다.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하기는 싫었지만,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렇게 서로 시선이 마주친 순간, 하나의 가정이 번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엘도라, 설마!”
천사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악마와 손을…!”
그 말이 레미엘의 최후였다.
왜냐면.
콰앙!
어디선가 빛살처럼 날아온 검은 손이, 날개를 찢는 것도 모자라, 머리통을 산산이 박살 내버렸으니까.
한편, 같은 시각.
“이히히히! 이히히힉!”
푸른 궁전의 어느 방 안에서는, 흡사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괴이한 웃음이 연신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으힉, 으히히힉!”
누군가 방을 본다면 아마 크게 놀라지 않을까.
“으흑, 으흐흐흑? 흐하하하!”
엉망진창으로 파괴된 풍경은 둘째치고서 라도, 어지러운 바닥을 미친 듯이 뒹구는 흑발 여인을 본다면, 누구나 무서우리만치 섬뜩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때.
“키히히히…. 됐다, 됐다고!”
땅이 움푹해질 만큼 주먹으로 쾅쾅 두드리던 여인이, 갑자기 킬킬 웃으며 벌렁 드러눕는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광기로 희번덕거리고 있다.
“이걸, 이걸 원한 거니? 이게 네가 원한 거야? 응?”
분명 아무도 없는 방이다.
“이야, 재밌네. 응. 네 말대로 확실히 아주 재밌어. 키킥, 키키키킥!”
그러나 여인은, 아니 타나토스는 마치 누군가 옆에 있는 것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시건방진 놈. 뭐, 네 동료는…. 아니. 이제 내 군대라고 불러야 하나? 이히히힉!”
조롱하듯 말한 찰나, 한순간 여인의 낯빛이 돌변했다. 순간적으로 씁쓸해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가, 곧바로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귓불 아래까지 닿을 정도로 찢어져 주변이 떠나가라 웃는다.
“아하하하하하하하!”
숨넘어갈 듯 웃어 젖히는 모습이, 언뜻 경박해 보이면서도 기괴한 느낌이 물씬 흐른다.
…더 이상, 사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 작품 후기 ============================
해냈다….
정말 오랜만에 하얗게 불태운 기분입니다.
아무튼, 드디어 에피소드 5가 끝났네요. ㅜ.ㅠ
수현아. 진짜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