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74
00873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
전달받은 내용은 간단했다. 천사가 나를 불렀단다. 호출이야 수십, 수백 번을 받아봤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머셔너리 로드로서가 아닌 북 대륙의 수호자로서 나를 소환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떨칠 수 없었다.
왜 이 늦은 시간에 무조건 빨리 오라는 계시를 내렸을까? 그리고 왜 소환의 방이 아닌 천상이라는 독립 공간으로 오라는 걸까? 심지어 모든 천사가 모여 있다는데.
여러 가정이 뇌리를 스쳤으나 확실한 건 없다. 그저 귀찮은 일이 일어났구나 직감할 뿐. 그냥 성가신 일만 아니기를 바라며 바삐 걸음을 놀렸다.
그러나.
불현듯 심상찮다고 느낀 건,
“사용자 김수현.”
소환의 방으로 입장했을 때였다.
“오셨습니까….”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편안한 음성도 아니었고, 제단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다. 세라프는 처음 보는, 빛이 흐르는 포탈 옆에 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심히 흔들리고 있다.
“수, 수현….”
긴히 말하고 싶은 게 있는지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한다. 평소와는 확실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태도다. 게다가 낯빛에 그늘진 초조함은 어느 때보다 뚜렷해, 나조차도 까닭 없이 조마조마해질 정도였다. 그러자,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던 예감이 차츰차츰 고개를 치킨다. 무언가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는, 그런 느낌.
“수현….”
좀 전부터 부르는 목소리는 한없이 애처롭기만 하다. 왜인지 간곡히 부탁하는 어조처럼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모르겠다. 아마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을 터.
“저 포탈로 들어가면 돼?”
물결치는 포탈을 가리키자, 세라프가 흠칫 턱을 젖혔다. 왜 놀라는 거지?
“천상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네? 아, 네.”
“그럼 어서 들어가야겠네. 아, 너도 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약간 늦게 반응한 세라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가슴 속 불안감이 한층 불거졌지만, 일단 마음을 단단히 다잡기로 하고, 나는 천천히 포탈에 몸을 묻었다.
잠시 후.
시야 전체를 물들였던 빛이 사그라지며 천천히 시력이 회복된다. 이윽고 완전히 달라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지면은 여전히 잿빛 일색이었으나, 우선 너비부터가 굉장히 넓어졌다. 흡사 천장 없는 소환의 방 확장판을 보는 듯하다.
“…응?”
이어서 느낀 건,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시선이었다. 가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천사가 허공에 줄지어 떠 있는 광경은, 거의 장관에 가까울 정도로 압권이다.
이곳이 바로 천상이라는 독립 공간인가.
“어서 와. 사용자 김수현. 아니, 북 대륙의 수호자.”
그때였다. 조금 놀라는 사이, 듣기 좋은 미성이, 그러나 외려 속이 거북해지는 음성이 귓전을 울린다. 흘끗 천장을 올려다보자, 한 무리의 천사가 천천히 내려오는 중이었다. 굳이 자세히 보지 않아도 가브리엘을 위시한 사 대 천사임을 알 수 있었다.
하강이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급한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지?”
“…….”
“말해봐. 설마 또 서 대륙 일인가?”
“…….”
왜 이러지? 왜 이러는 거지?
숨이 막힐 듯한 무거운 정적이 이어진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물었는데, 왜 한 명도 입을 열지 않는 거지. 대관절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세라프를 봤을 때도 느꼈지만, 가브리엘의 태도도 상당히 어색하다. 장난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브리엘은 예의 히죽거리는 미소는커녕, 딱딱히 굳은 얼음처럼 차갑고 냉랭한 얼굴이었으니. 한편으로는, 굉장히 분노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문득, 주변 상황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 입을 닫고 있는 만큼, 이 천상이라는 공간은 을씨년스러울 만큼 적막하다.
그러할진대, 어째서 술렁술렁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까.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수선한 흐름이 은근히 감지된다.
“…아니. 아니야.”
한 번 더 물어보려는 찰나, 가브리엘이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후우우우….”
그리고 지면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더니, 자세를 바로 하며 말을 잇는다.
“이번에는 남 대륙 일이야.”
“남 대륙?”
“그래. …아니, 일단 보고 얘기하자. 그래, 그게 낫겠다.”
“……?”
딱!
손을 튕기는 소리가 들리고, 눈앞으로 반투명한 스크린이 생성됐다. 미처 의문을 꺼내기도 전, 직사각형의 은막(銀幕)은 불선명한 영상을 재생하기 시작한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흰 신전을 둘러싼 어마어마한 인파. 그리고 한 소녀가 흰색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오는 장면이었다.
소녀의 행색은 초라하다. 눈부신 반사광이 흐르는 금발은 어지러이 헝클어져 있고, 액체가 덕지덕지 묻은 더러운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특히 금색 눈동자는 왜인지 공허해…. 어?
잠깐만,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금발, 금색 눈동자, 그리고 흰 천으로 싼 대검. 이 사용자는…?
그 순간이었다.
“에ㄹ…?”
순간 엘도라, 라고 말할 뻔한걸,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돌연 빤한 시선이 느껴져 일부러 영상에 몰두했다. 아니.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된 지 영문은 모르겠지만, 영상 속의 여인은 엘도라가 분명하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남 대륙의 수호자이며 오딘의 클랜 로드인데. 그나저나 이 사용자가 왜…?
의문을 가진 찰나, 불현듯 정체 모를 거뭇한 그림자가 영상 내 드리워졌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가 엘도라의 뒤에서 스리슬쩍 모습을 드러내, 옆에서 나란히 걷는다.
얘는 또 누군가 싶어 얼굴을 확인한 순간,
“!”
시야가 와짝 찌그러졌다.
한순간, 머릿속이 멍해진다.
“무….”
지금…. 내가….
“…슨?”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옆에서 걷는 놈은…. 뭐, 보면 알겠지만 악마야.”
“가, 가브리엘?”
“진명은 루시퍼. 이명은 타락 천사로, 칠 대 악마 중 한 놈이지. 상당한 거물이기도 하고.”
“아, 아니. 아니, 잠깐만.”
안다. 저놈이 루시퍼인 건 당연히 알고 있다. 모를 리가 없고, 모를 수가 없다.
문제는, 왜 저놈이 엘도라 옆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홀 플레인에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떠봐도, 영상의 장면은 변하지 않는다.
그때였다.
– 여러분.
영상 속 엘도라의 걸음이 멈췄다.
–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파츳!
그 말을 끝으로, 영상은 뚝 끊겼다. 스크린은 삽시간에 노이즈로 가득 찼다. 온몸이 텅, 빈 것 같은 기분. 치직치직, 잡신호만 흘리는 영상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로부터 여드레 전의 일이야.”
망연한 와중, 가브리엘의 음성이 꿈결처럼 흐른다.
이어지는 설명은 간단했지만, 지독한 장난이라 생각될 만큼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남 대륙이, 악마의 손으로 넘어간 것 같단다. 남 대륙 사용자들이 악마와 손을 잡고, 천사에게 반란을 일으켰단다.
설명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이해하는 데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어지럽다. 혼란스럽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장난….”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을 뿐, 차마 쏟아내지는 못했다. 이 자리가, 저 태도가. 그리고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장난이 아니라는 방증이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간신히 받아들였을 때는, 호흡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시야도, 손도 그랬다. 내가 느끼는 전 감각이 흔들리고 있다.
단지, 충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화자찬은 아니지만, 여태껏 잘 끊어왔다고 생각했다. 미리 알고 노린 것도 있었고, 아니면 운이 좋은 경우도 있었다. 여하튼 결과적으로 악마의 계획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분쇄했다.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여겼지만, 어쩌면 악마가 제로 코드를 포기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할 정도로.
그런데, 그런데.
끝에 와서, 웬 개 같은 변수가 생겼다는 말인가.
“…그래서.”
하지만 참았다. 아니, 참아야만 한다.
어떻게 된 건지,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남 대륙 놈들이 바보도 아니고, 저렇게 넘어갔다는 것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어쨌든 일은 터졌고, 이제 와서 탓해봤자 무의미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남 대륙으로 가줬으면 좋겠어.”
가브리엘은 낯짝 하나 변하지 않고 뇌까렸고, 순간 이성이 날아갈 뻔한 걸 가까스로 붙잡았다. 젠장, 왜 아까부터 시야가 어그러지는 거지?
“남 대륙은…. 왜…?”
이를 악물며 물었으나 가브리엘은 침묵했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악마가 나왔으니 쓸어버리라는 소리겠지. 물론, 남 대륙도 같이.
후…. 진정, 우선 진정하자. 일단은 정보가 필요하다.
“현재, 남 대륙의 상황은 어떻지?”
“…몰라.”
“몰라?”
“사건 발생 직후, 남 대륙과의 연결이 모조리 차단됐어. 아까 영상도 겨우 입수한 거야.”
…제기랄, 참아야 하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꼭 폭발 직전의 화산을 삼킨 듯한 기분이다. 저 담담한 낯짝을 당장에라도 짓뭉개버리고 싶다.
“어쩔 수 없잖아.”
“뭐라고?”
“물론 당한 건 뼈아프지만…. 어쩌면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좋은, 기회?”
이게 지금 쳐 할 말인가. 아니면 뚫린 입이라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건가.
“아, 그러네. 좋은 기회네.”
“…김수현?”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너희도 홀 플레인으로 나오는 게 어때? 응? 악마도 나왔는데.”
“…….”
홧김에 한 말이었다. 절대로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대응이기도 했다. 사용자의 입장에서.
“그게 무슨 말이지?”
가브리엘이 눈을 치뜨며 묻는다.
“못 들어먹은 척하지 말고. 악마가 나왔으니까 너희도 나오라고. 그럼 되잖아?”
상대를 뚫어지라 응시한다.
그러나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왜 말이 없어? 너희가 나와서 남 대륙으로 가면 되겠네. 천사가 악마를 막는 사이, 우리 인간은 신 대륙으로 진군한다. 이게 가장 합리적인 대응이 아닌가?”
“…….”
“아, 싫으면 서로 바꿀 수도 있고. 어때?”
“…….”
주변을 둘러보며 묻는다. 그러나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살그머니 눈을 내리뜨거나,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친다.
“…하.”
이 개 좆 같은 반응에, 절로 탄식이 샜다.
“하하. 차마 그렇게는 못하시겠다. 막지도 못하고 싸지르기만 해놓고. 그리고 우리보고 치우라. 하하하하.”
“인간. 적당히 좀 하지 그래?”
기막혀 웃어 젖히자, 우리엘이 싸늘히 경고한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설마 비꼬는 건가?”
“응. 잘 아네.”
그 순간,
“무어라?”
“비꼬는 거 맞는다고. 이 개 병신 같은 년아.”
애써 이어오던 무언가가,
“이놈이 감히!”
툭, 끊어졌다.
“감히는 씨발!”
나도 모르게 발을 세차게 구른다.
쾅!
참고, 삭이고, 억누르고, 짓눌렀던 울분이 단숨에 폭발했다. 한 번 더 마력을 담아 짓밟자, 지면이 파도처럼 거세게 요동친다. 말하는 게 가관을 넘어섰다. 원래 이런 새끼들인 줄 알고는 있었지만, 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다. 실로 눈이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너흰, 너흰 대체 뭐냐?”
울컥 터진 고함이 공간을 왕왕 울린다.
“악마 새끼들도 나와서 저러는데, 너희는 왜 못 나오겠다는 건데! 도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