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16
00915 A Poisoned Chalice, Two. =========================================================================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때는 몹시 기뻤지만, 무사히 돌아오고 시간이 지날수록 알 수 없는 불안심에 휩싸였다.
가슴 한 켠이 무겁다고 해야 하나. 이효을과 통신한 이후,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그냥 막연히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었을 뿐, 하나씩 흐름을 맞춰보니 확실히 찜찜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악마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여전히 무언가 꾸미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한 놈도 남김없이 소멸시키지 않고서는 발 뻗고 잘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어서 뭐라도 해야지 않겠느냐는 강박 관념까지 생겼을 즈음, 공교롭게도 신전에서 거주민 전령이 찾아왔다. 천사의 호출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용자 김수현.”
나는 듯 달려가 포탈을 통과하자, 고요한 음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소환의 방을 울렸다. 상당히 오랜만에 만나는 세라프였으나, 마음이 급했던 터라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 바닥에 주저앉았다.
“회의는 끝난 건가?”
“이번 두 곳에서 발발한 전쟁과 악마의 의도에 관한 논의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어제 종료됐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단에 앉아 있는 세라프는 차분한 목소리로 회답했다. 은은한 은발을 양손으로 번갈아 가며 완만히 쓸어내리는 게, ‘진정 좀 하세요.’ 라고 부드러이 달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숨을 살짝 들이켜 호흡을 추스르자, 한 쌍의 연록 빛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우선 동 대륙 구원 임무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천사의 숙적인 바알과 벨제부브를 소멸시켜주신 점. 이번 일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리인으로서, 모든 천사를 대표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말한 세라프는 정말로 고개 숙였다. 어찌나 깊숙하게 굽히는지 제단에 이마가 닿을 듯 말 듯할 정도였다.
솔직히 가증스럽다. 천사가 나오지 않으려는 이유가 아마 이것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생각될 정도였다. 지금이야 인간을 깔아볼 힘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홀 플레인으로 나오는 순간 목숨, 아니 존재 자체가 위험해지니까. 중간 세계의 법칙은 천사라고 예외를 두지 않는다.
“됐어. 그렇게까지 감사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나저나 일의 추이는 어떻지?”
“혹시 상황은 어느 정도로 알고 계십니까?”
세라프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설명을 해주겠다는 듯이 운을 띄웠다. 그러나 이미 이효을에게 들은 터라 굳이 또 들을 필요는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남 대륙과 악마,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서 대륙의 움직임이었다.
세라프는 알겠다는 듯 끄덕이고 얌전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구원군이 돌아오는 동안, 몇 가지 경시할 수 없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경시할 수 없는 변화?”
“Yes. 우선 우리 천사는 남 대륙 통제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럼 남 대륙을 다시 관할하게 됐다는 건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천사를 불신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남 대륙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으나, 악마가 없는 틈을 타 일을 진행하는 건 쉬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심한 간섭으로 끊겼던 연결을 이었고, 빼앗겼던 천상도 복구했습니다.”
“하지만 악마가 돌아올 가능성은, 아니. 이미 돌아오지 않았나?”
우리가 두 달에 걸쳐 북 대륙에 도착했으니 상대도 돌아가는 시간은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세라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관찰했으나, 여태껏 악마는 볼 수 없었습니다.”
“볼 수 없었다? 악마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한데, 비단 악마뿐만이 아니라 남 대륙 사용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에 불과한 수백 명만이 따로따로 돌아왔을 뿐, 대부분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의외라면 의외였다. 그렇게나 크게 졌음에도 본거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게다가 꽤 공을 들여 가로챈 남 대륙도 너무 손쉽게 내줬다.
“그 돌아왔다는 수백 명은 어때?”
“예의주시한 결과, 딱히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패배의 충격으로 몰래 이탈한 무리가 아닐까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탈이라. 곰곰이 따져보면 별로 거슬릴 일은 아니다. 특히 일부 사용자의 이탈 소식은 연합군이 그만큼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예전에도 한 번 생각한 적 있지만, 사탄의 무서운 이유는 여러 안배의 씨앗을 차근차근 뿌렸다가, 때가 되면 한꺼번에 정신없이 몰아치는 점에 있다. ‘설마?’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함정에 걸리는 순간이다. 그러니 ‘상대가 흔들리고 있다.’ 고 단순하게 여기는 것보다는, 모종의 노림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설령 기우라 할지라도.
…문제는, 그렇게 생각해도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이다.
아무튼, 하나가 아니라 몇 가지 있다고 했으니 계속 물어볼까.
“서 대륙은? 들어보니 주야장천 미끼 짓만 하다가, 동 대륙 전투가 끝난 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던데.”
“아.”
문득 세라프가 약한 탄성을 터뜨렸다.
“사용자 이효을이 추적한 결과, 칠흑의 숲까지는 후퇴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지점 이후로 모든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게 말이 되나? 공중으로 날아간 것도 아닐 테고.”
“워프.”
“응?”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했다면 가능합니다. 주요 관건은 메모리아 스톤의 유무와 워프를 활성화할만한 지식뿐. 수현은 이 사건에 관해서 짚이는 게 없으십니까?”
“!”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아차 하고 말았다. 동시에 하나의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세라프의 말대로 메모리아 스톤과 관련 지식만 있다면 워프 게이트 활성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헬레나도 비슷하게 말했고, 실제로 엘도라를 죽이기 직전 타나토스와 악마들도 어느 순간 넘어오지 않았는가. 또한, 우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도시 대부분을 점령한 상태였으니 메모리아 스톤도 충분히 확보했을 터.
단지, 워프 게이트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양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말인즉 세라프의 추측이 성립되려면 서 대륙에도 메모리아 스톤과 관련 지식 보유자가 있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악마 군주 중 보이지 않은 놈이 있었어.”
“악마 군주 말씀이십니까?”
“그래. 딱 한 놈. 세라프. 악마 군주 정도면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할 능력이 있나?”
“…저희가 할 줄 아는 거라면 악마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세라프는 처음으로 근심 어린 기색을 보였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서 대륙과 악마가 연관이 있다고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후. 놈들의 움직임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푹 한숨을 내쉬며 흘깃거렸으나, 세라프는 송구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움직임을 찾지 못했다는 소리다. 하기야 악마가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차단해놨을 것이다.
“그리고 타나토스 님 말입니다만….”
그때 세라프가 조심스레 말을 흐렸다. 아마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은데, 상관없으니 계속 말하라는 뜻으로 턱을 까닥였다.
“실은 타나토스 님의 생존이 가장 걱정입니다. 죽음의 신의 출현은 저희도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물론 너희 불찰이기는 하지만…. 뭐, 됐어. 이제 타나토스도 큰 문제는 안 되니까.”
“아닙니다.”
“?”
“타나토스 님을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악마는 무수한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수현은 이 점을 항상 경계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글쎄다. 하지만 너희도 들었으면 알 텐데?”
물론 타나토스는 강했지만, 결국 이긴 건 나였다. 게다가 여섯 개의 조각 중 세 조각을 소멸시켰으니 예전과 같은 힘은 내지 못할 거고. 또 나타나면 그때는 확실하게 이길 자신이 있다.
– 이 멍청이가? 그냥 조용히 새겨들어.
라고 생각했을 때, 화정이 엄정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 아무리 힘이 떨어졌다고 해도 타나토스는 타나토스야. 나와 같은 격으로 취급받는 악명 높은 죽음의 신이라고. 걔가 나도 너도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힘을 회복하면 어쩔래?
‘그, 그건.’
– 물론 네 생각대로 예전과 같은 수준으로 회복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너를 기준으로 잡지 마. 막말로 너도 내가 없으면 현 상태의 타나토스도 상대하기 쉽지 않을걸?
‘…….’
부, 부인할 수 없구나. 기실 타나토스에게 일격을 먹일 수 있었던 것도 화정을 기반으로 한 열화 검 때문이었으니까.
– 방심하지 말라는 소리야. 하여간 너는 이상하게 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니까? 정작 서너 급이나 떨어지는 악신한테 신 나게 털렸으면서.
‘알았어. 주의할게.’
가만히 생각해보니 화정의 말도 일부 맞는 것 같아 반성하기로 했다. 아니,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방심은 금물이라고 생각했던 주제에 나도 모르게 느슨해진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수현은 모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힘인지…. 그래서 처음에도 그렇게 말렸는데….”
세라프는 살짝 눈을 깐 채로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흠. 네가 그렇게나 말하는 것 같으면…. 뭐, 확실히 경계하기는 해야겠네.”
그러나 태도를 고치니 금세 입을 집어넣고 눈을 치떴다. 꼭 ‘네가 웬일입니까?’ 라고 놀라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다.
“맞습니다. 수현은 평소는 몰라도, 가끔 이상할 정도로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그래?”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저번에 한 번 말씀하신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수현은 제로 코드에 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제로, 코드?”
갑자기 느닷없는 단어가 나왔지만, 어쨌든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계의 보호 장치, 그리고 작은 구슬이라는 것 정도?
“제로 코드는 사용자가 바라는 모든 걸 이루어주는 만능의 결정체.”
글쎄. 뭐가 만능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거주민을 지구로 데려갈 수 있게 못 하는 건 좀 우습잖아? 뭐, 한계가 있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러나 화정 님이나 타나토스 님 정도 되는 신은, 마음만 진심으로 먹는다면 제로 코드의 명령에도 일부나마 저항할 수 있습니다.”
“뭐?”
귀가 번쩍 뜨였다.
“가령 수현이 제로 코드로 보통 인간의 죽음을 소망할 경우, 그 인간은 즉시 사망할 겁니다.”
“잠깐. 그럼 타나토스는 설마 제로 코드의 명령이 듣지 않는다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일부나마 저항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항….”
“결과는 똑같지만, 그 결과에 이르는 시간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
그러니까 명령의 결과는 똑같이 나오나, 걸리는 시간은 차이가 난다는 건가. 그래서 저항이라고 말한 거고.
사실 제로 코드가 얼마나 굉장한지 모르니 확 와 닿지는 않지만, 세라프가 하고자 하는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신은 결코 얕볼 존재가 아니다. 애초 처음 말하기도 했다. 타나토스로 인한 변수를 조심하라고.
결국에는 몇 분에 걸친 설교를 들은 후, 간신히 초점을 본론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야기는 끝난 상태였다. 아니,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옳으려나.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이상, 남은 일도, 해야 할 일도 하나였다.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세라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제야 중앙 대륙인가.”
“더 늦기 전에 중앙 대륙을 공략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서로의 목소리가 겹친 찰나, 세라프의 말이 더 길게 이어졌다.
“상황이 상당히 애매합니다. 악마가 현재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중앙 대륙을 선점하려 하거나, 아니면 그러는 척하면서 북 대륙을 기습할 수도 있겠지요.”
“알고 있어. 염두에 두고 진행할 거야.”
“그렇습니까. 그럼 저희가 따로 도와드릴 일은 있습니까? 저번처럼 메시지를 띄운다거나….”
“아니. 이번에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저번에 천사의 힘을 빌린 건 명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아무 상관 없는 동 대륙을 구원하러 가는 게 아닌, 또 한 번 새로운 대륙을 개척하러 가는 거니까. 안 그래도 비밀 도서관 개방 이후 성과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을 텐데, 유적에 목말라하는 사용자라면 원정 발표에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게다가 두 전쟁의 승리로 사기도 한껏 높아져 있으니 나름 적절하다면 적절한 시기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자리를 털고 돌아섰다가, 걸음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온 이유가 또 하나 있었지.
“세라프. 현재 내 GP가 얼마나 되지?”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꽤 될 것 같은데.”
“Y, Yes. 76,315,964 GP…. 어마어마합니다.”
세라프는 감탄했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악마는 말할 것도 없고, 임무 성공 보상에서 총대장 역할로 받은 GP도 상당하다. 무엇보다 타나토스를 홀로 상대했다는 점에서 큰 역할 점수(%)를 받아 GP를 쓸어 담을 수 있었다.
이렇게 칠천만이 넘는 GP가 모였으나 별로 놀랄 이유는 없다. 제로 코드를 획득했을 때 받은 GP는 억 소리가 나왔으니.
“사용자 상점 좀 열어주겠어?”
“알겠습니다.”
잠시 후, 눈앞으로 익숙한 창이 출력됐다.
[…….『아르고스의 눈(1,400,000 GP)』
『모이라이의 기념품(45,000,000 GP)』
『앙칼라의 거울 방패(700,000 GP)』
『라크리마의 화살표(35,000,000 GP)』
『성흔의 증표(500,000 GP)』
『시두스의 예언(66,666,666 GP)』
…….]
“흠….”
흥미를 끄는 것은 많지만 정작 내가 필요한 건 보이지 않는다.
“있잖아, 세라프.”
“말씀하십시오. 특별히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사용자의 성향을 질서 쪽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은 없나?”
“잘못 들었습니다?”
“아니면 심하게 삐친 건방진 칼을 강제로 굴복시킬 수…. 아니. 기분을 달래줄 수 있는 거라던가.”
“…네?”
세라프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 작품 후기 ============================
게헨나, 수나의 기록 영상 반응 외전은 이번 주 안에 외전 형식으로 적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6월 27일(토요일)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왜냐면 원래 오는 6월 26일(금요일)에 조아라, 그리고 다른 회사 분들과 비주얼 노벨 2차 미팅이 잡혀 있어서 하루 휴재할 예정이었거든요.
그러나 해당 외전은 정상 연재보다 분량이 적고, 또 저도 편하게 적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비교적 빠른 시간에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휴재하는 것보다 외전이라도 올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_ㅠ
아, 일러스트는 현재 채색 단계에 있습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세라프, 고연주, 안솔, 한소영 중 한 명입니다.
저도 중간중간 그림을 보고 있는데, 여태껏 나온 일러스트 중 가장 예쁜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