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26
00925 A Poisoned Chalice, Two. =========================================================================
바람이 불었다.
마냥 시원하다고 볼 수 없는, 금속을 실로 뽑아 짠 푸른 스커트가 펄럭거릴 정도로 강한 바람.
엘도라는 눈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멍하니 앞을 주시했다. 어둠이 들어찬 눈동자는 비록 예전의 빛깔은 잃었지만, 더는 무기력해 보이지 않는다. 단지 끝을 알 수 없는 블랙홀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뜻 모를 소슬한 기분을 느끼게 할 뿐.
“여기는….”
“중앙 대륙의 중심부를 지키고 있는 공간이에요.”
조용히 입을 연 엘도라의 등 뒤로 에르윈이 살며시 다가섰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기 보이지 않는 막은 법역(法域)이라고 하죠.”
“법역?”
엘도라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되물었다.
“네. 신이 선언한 법령으로 보호받는 영역의 줄임말이에요. 줄여서 법역.”
“그 신은 어떤 신이고, 법령은 어떤 내용입니까?”
호기심이 동한 어조였으나 에르윈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것까지는 모르겠다는 듯이.
그러자 엘도라는 다시 앞으로 눈을 돌렸고, 닿을 수 있는 곳까지 걸어가 차분히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런 엘도라를 에르윈은 한참 동안 물끄러미 관찰했다.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두 눈동자로 까닭 모를 실망감이 또렷해지는 듯하다.
“설마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때 에르윈의 옆으로 누군가가 천진하게 말을 걸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타나토스는 멀리서 가만히 서 있는 엘도라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그렇다면 꿈 깨는 게 좋을걸? 저 아이는 아마 깨어났을 때부터 자격을 상실했을 거야. 내 조각을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더는 인간이라 보기 어려우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에르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끄덕거렸다.
“그리고 엘도라가 설령 왕이라손 쳐도…. 안타깝게도 여왕이 보이지 않는걸요. 그냥 혹시나 싶었네요.”
사근사근 웃으며 말하는 요정을 보며 타나토스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한때 한 몸을 공유한 전적이 있는데, 저렇게 어여쁘게 말하는 걸 보니 속이 자못 거북한 탓이다. 하지만 그래도 주변 시선도 신경 써야 하니 어쩔 수 없겠지 라고 생각하며 어깨를 들먹였다.
“그나저나 이제 어떡할 거야?”
“네?”
“힘을 결집한 것도 좋고, 먼저 도착한 것도 좋은데…. 미리 말하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김수현 절대 못 이겨. 아니, 정말 잘 버텨봤자 수십 분?”
“…….”
에르윈은 침묵했다. 타나토스의 말은 엄살이 아니었다. 애초 죽음의 신이라는 까마득한 타이틀을 걸고 있는 신이 엄살을 부린다고 보기도 어렵다. 말인즉 타나토스가 스스로 자존심을 접고 말할 만큼 김수현이 대단한 상대라는 뜻이다.
“차라리 한 번이라도 공략을 시도해보는 건 어때? 너희는 힘들겠지만, 저~기 인간들은 건드리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어?”
타나토스가 주변을 돌아보며 싱글거렸다. 사방은 고요했으나 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기척이 어슬렁거리는 터라 이상하게 시끄럽게 느껴졌다.
“나쁜 방법은 아니겠죠.”
진지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는 태도였지만, 에르윈은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낱 인간 따위보다는, 저 법령과 맞설 수 있는 존재에 기대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고 되려 은근한 눈빛을 보내자, 타나토스는 킥 실소를 터뜨렸다.
“싫어. 아무리 나라도 저 정도로 강하게 작용하는 법령을 단시간에 어쩌지는 못해.”
“그런가요?”
“애초 제로 코드는 십천(十千)에서 탄생한 또 하나의 신이야. 그런데, 그 힘으로 유지되는 영역을 나보고 강제로 침범하라고? 농담하지 마. 힘과 권능이 돌아온다면 모를까. 그전에는 어불성설이지.”
“그럼 완전히 회복한 상태라면?”
에르윈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반문했다. 타나토스는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살그머니 입맛을 다셨다.
“글쎄? 그래도 제로 코드는 장담 못 할걸? 사실 나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막연한 건 매 한 가지지. 뭐, 어느 정도 저항은 가능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견디지 못할지도?”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는 수밖에.”
그렇게 말한 에르윈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기다려.”
그러나 몇 걸음 채 걷기도 전,
“아직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는데.”
타나토스의 목소리가 걸음을 붙잡았다.
“설마 아직도 그 대계의 예언이라는 말장난을 믿고 있는 건가?”
“…….”
“아니면 상대의 전력이 녹록해지기를 기다려 숨어 있는다던가?”
“…….”
등을 돌린 터라 에르윈은 타나토스가 어떤 얼굴인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한다.
“정말 그런 꼴같잖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러나.
“각오하는 게 좋을걸? 김수현보다 내가 너희를 먼저 박살 낼 테니까.”
등 뒤로 들려오는 음성은 아까까지와는 다르게 푹 가라앉아 있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다.
타나토스의 저의를 느낀 에르윈이 느긋이 뒤를 돌아봤다.
“걱정하지 마세요. 말씀처럼 되지는 않을 테니까.”
뜻밖의 시원한 대답에 타나토스의 눈꼬리가 휘둥그레 휘어졌다.
에르윈은 반달 모양을 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재미있으실 거예요. 분명히.”
*
“오호?”
사내가 보고한 장소에 도착한 순간 형은 약한 탄성을 질렀다. 그냥 단순히 비석과 제단이 있는 곳이라고 말했지만, 그 크기가 생각보다 방대했기 때문이리라.
하기야 잿빛 돌로 이루어진 정사각형 공간만 해도 지름이 이백 미터는 넘고, 각 모서리에 설치된 각양각색의 거대한 기둥도 가히 압권이니. 하기야 나도 처음 봤을 때 꽤 놀랐었지.
형은 연신 탄성을 지르며 감탄을 숨기지 못했으나, 사실 지금의 나로서는 썩 감흥은 없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웅성웅성 모여 있던 사용자들이 자연스레 길을 터줬다. 나는 자꾸만 어디로 가려고 하는 형을 억지로 끌며 걸었다.
그렇게 약간 너른 공간으로 빠져나오니 정면 방향으로 아까 말했던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유수의 세월을 이기지 못했는지 곳곳에 풍파를 겪은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다. 선율은 비석에 딱 달라붙어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으나, 와짝 찡그린 얼굴을 보니 해석이 힘든 듯싶다.
좋아. 그럼 우선 저 비석부터 해석해볼까. 여기서는 나보다….
…응? 이상하다. 왜 갑자기 기억이 안 나는 거지?
“누가 걔 좀 불러와 봐.”
“응? 누구?”
“걔 있잖아, 걔.”
“그러니까 누구.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그 누구였더라. 좀 멍청하고 바보 같은 애.”
“킥! 그런 애가 어디 한둘이야?”
“아 맞다. 마수 소환하는 애였지. 이름이 뭐더라?”
“…뭐?”
약간 화난 듯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옆을 돌아보자, 비비앙이 똥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어 번 눈을 깜빡거리더니, 턱이 파르르 떨리고 숨이 거칠어진다.
“너, 너…. 방금 나보고…. 아니, 내 이름도….”
화를 벌컥 내며 펄펄 뛰는 비비앙을 달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계속 깐족깐족 뻗대길래, ‘얼른 저 비석을 해석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네 엉덩이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겠다.’ 고 선언하니, 입을 삐쭉거리면서도 마지못해 걸어가더라.
잠시 후.
“오. 왔다 왔다.”
“응? 누군데요?”
“거주민이잖아. 그 머셔너리 클랜의….”
“아아. 그러네요.”
시끄럽던 주변이 조용해지더니, 기대에 찬 시선이 비석으로 다가가는 비비앙을 향해 와르르 쏠렸다. 고어 해석에 관해서는 사용자보다 거주민이 훨씬 낫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으, 응?”
끊임없이 구시렁거리던 비비앙은 뜻밖의 관심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곧 상황을 이해했는지 목과 허리가 곧게 펴졌다. 그리고 한껏 무게를 잡으며 뻣뻣하게 비석을 응시한다.
“어험 어험…. 아, 되게 오래된 문자군.”
“…….”
“어디 한 번 볼까…. 신의 약속을 찾아 다다른 이들이여?”
“좀 크게 말해. 전부 들을 수 있게.”
그러자 비비앙이 산통이 깨졌다는 얼굴로 빽 소리 질렀다.
“아 거 되게 바라는 것도 많네!”
“뭐?”
“알았다고! 그, 이건 또 뭔 단어야? 십천? 십천의 이름으로 명한다!”
“…….”
그렇게 외친 비비앙은 갑자기 양팔을 활짝 펼쳤다.
“돌아가라!”
…저 퍼포먼스는 대체 뭘까? 또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일까?
“분명히 이곳에 너희가 갈구하며 찾았던 것이 있을지 모르나, 신의 약속이 기다리는 건 너희가 아니다!”
술렁술렁! 웅성웅성!
흠. 비비앙의 행동도 문제지만, 그에 호응하는 군중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오직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약속의 반김을 받을 수 있을지니.”
“무한의 힘이 기다리는 건 넷과 하나.”
“그러므로, 찾아라!”
“이건 또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광신도 집회 현장을 보는 것 같네.”
마지막 말은 비비앙이 아니라 고연주의 목소리였다.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한 후 황급히 입을 가렸다. 하품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빨리 좀 끝났으면.
“그늘에 숨어 사는 자!”
“칼을 노래하는 자!”
“강철과 선혈을 넘어서는 자!”
“거룩하고 고결한 축복에서 탄생한 즈아아아!”
저 비석을 누가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 보고 있다면 아마 굉장히 부끄러워하지 않으려나. 저렇게 방정맞게 읽으라고 세워둔 게 아닐 텐데.
“그리고 이 네 존재를 아우르는 하나의 왕!”
“이 다섯의 존재가 발을 들여놓는 날,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자연스레 열릴 것이다아아아!”
그렇게 말한 비비앙은 숫제 고개를 한껏 젖혔고, 악마 소환을 앞둔 마녀와 같이 깔깔깔깔 웃어 젖히는 걸로 최후를 장식했다. 이제 끝났다. 물론 이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끝이야? 저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래서 이제 어쩌라는 거지?”
여기저기서 어서 결과를 보이라는 듯 압박을 가했지만, 비비앙이라고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될걸, 한참을 우물쭈물하더니, 끝내 “아! 화장실! 배 아파!” 라는 되지도 않은 이유로 후다닥 도망치고 말았다. 결국에는 다시 시끄러워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마음 같아서는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외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워낙 많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제단을 뒤져봤자 아무것도 안 나오니, 어서 법역이나 깨부숩시다!’ 라고 말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 하루 정도는 공들여 조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을지도. 형도 어느새 기둥을 조사하고 있고, 또 한소영의 초감각도 생각해야 하니까. 까딱 잘못했다가는 의심받기에 십상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비석이 있는 곳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요즘 항상 가슴 한 켠이 아릿하다.
대체 이 거칠고 흉포한
야생의 곰과 같은 로유진이라는 사내를
독자는 어떤 이유로 여성이라 조롱하고 우롱하여
이렇게까지 힘에 겹게 하는가?
실로 가슴이 서글프구나.
에피소드는 2도 이제 팔부능선에 접어들었고,
메모라이즈의 완결도 목전으로 다가왔건만,
독자가 작가의 성별을 잘못 알고 있으니 크나큰 문제로다.
독자는 하루라도 빨리 작가의 성별을 제대로 인지하고
그동안의 조롱을 사과하는 것만이 그간의 실수를 씻는 유일한 방법이다.
계속 망측한 별명을 붙인다고 해서 작가가 언젠가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크나큰 오산일 터.
이런 현상이 계속 이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본문에 BL, 퀴어와 관련된 내용이 범람할 것이니.
이 격문을 읽은 독자 개인이
아직도 로유진이 아닌 로유(진)미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리고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면
저번 1, 2차 전쟁 때 하루도 못 견디고 굴욕적으로 항복한 작가가
도대체 얼마나 억울했으면 스스로 3차 전쟁에 임했는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독자는 현재의 코멘트가 과연 정당한지 심사숙고하고
서둘러 생각을 고쳐 작가와의 친분을 돈독히 다지며
예전과 같이 오순도순한 분위기의 코멘트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독자님들을 항상 존중하는 로유‘진’이….
『2015. 7. 14 반(反) 로유(진)미 동맹 창설 격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