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25
00924 A Poisoned Chalice, Two. =========================================================================
불현듯 어디선가 무음으로 터진 빛이 우거진 그늘을 환하게 밝혔다.
높이는 삼사 미터, 지름은 일 미터 가량 될까. 약간 길쭉하고 둥근 꼴로 생성되는 빛무리는 연한 푸른빛을 띠고 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시원해지는 잔잔한 바다 빛깔.
그때, 둥근 표면 전체가 거듭 환한 빛을 발한다. 이어서 잔물결이 일 듯 서너 번 가볍게 출렁거리더니, 늘씬한 종아리 하나가 빛을 불쑥 뚫고 나왔다.
탄탄한 허벅지, 버들가지 같은 가는 허리, 도도록이 솟은 가슴, 길고 뾰족한 귀…. 이윽고 포탈을 완전히 뚫고 등장한 여인은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요정처럼 무척 아름다웠다.
잠시 후, 여인이 인근이 경치를 천천히 돌아보며 사뿐사뿐 걷는다. 그러나 걸음은 오래지 않아 멎었다. 가는 방향으로 한 늙은 노인이 머리를 정중히 숙인 채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드디어 돌아오셨습니까. 나의 주군이시여.”
그러자 물끄러미 응시하던 여인, 사탄…. 아니. 에르윈이 소리 없이 살짝 웃음 짓는다. 어여쁘기 그지없는 미소였지만, 한편으로는 숨길 수 없는 섬뜩한 기색도 서려 있다.
“탈주 인원에 올리비아를 끼워 넣었더군. 덕분에 라그나로크에서 편하게 올 수 있었어. 수고했다. 멜리너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던 방법입니다. 오히려 사브나크…. 아니, 올리비아가 고생했지요.”
기특하다는 듯한 말에 멜리너스는 겸손히 대답했다. 에르윈은 곧장 웃음을 거뒀다. 그리고 빠르게 옆을 지나치자, 멜리너스도 얼른 머리를 들고 뒤를 따랐다.
사탄과 벨리알.
실로 오랜만의 재회였으나 둘의 태도는 딱딱하기 짝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선이 명백하게 그어져 있다고 해야 하나.
하기야 원래 악마라는 종족이 그렇다. 주군이 부하를 치하할 수는 있어도 서로 얼싸안으며 회포를 푸는 정은 없는 종이니.
잠시 후, 에르윈과 멜리너스는 너른 공터로 들어섰다.
“휑하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에르윈의 말에 멜리너스는 또다시 머리 숙였다.
“송구합니다. 그때 패배의 여파가 아직….”
“마족은?”
“…바알 님과 벨제부브 님의 권속은 완전히 소멸했습니다.”
“바알, 벨제부브….”
에르윈의 곧은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멜리너스의 말인즉, 천사라는 격 높은 제물로 애써 소환한 마족 전사가 모조리 사라졌다는 걸 뜻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 마족을 피조물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악마로부터 파생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조물주가 소멸했으니 피조물이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래서 김수현이 기를 쓰고 대 악마를 잡으려던 것이고.
그러나 에르윈이 아미를 찡그린 건 약간 다른 이유였다.
“이상하군. 듣기로는 루시퍼도 잡혔다고 들었는데. 설마 타락 천사의 권속은 남아 있다는 건가?”
“대부분 소멸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살아남은 권속도 있습니다. 고작 열 남짓한 정도지만요.”
“열 남짓…. 그럼 거의 소멸 직전까지 몰려 있지만, 어쨌든 살아는 있다는 건데.”
“…….”
멜리너스는 돌연 입을 닫았다.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함부로 말할 사안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흐으으음….”
석연치 않은지 긴 한숨을 내쉰 에르윈은,
“됐다. 아, 다른 일은 어떻게 돼 가고 있지? 오 개월이면 충분히 결과가 나올만한 시간 아닌가.”
문득 화제를 돌렸다. 목소리는 아까와 비슷했지만 약간 책망하는 투도 섞여 있었다. 멜리너스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곳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길을 개척하는 단계는 완료됐습니다. 사용자, 거주민을 양분 삼아 힘을 회복한 후 라그나로크 인근으로 이동. 그리고 바로.”
“결론만 말하라. 포탈은 어떻게 된 거냐.”
“마찬가지입니다. 동 대륙에서 메모리아 스톤을 다수 획득하는 데 성공, 현재는 법역과 십오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멜리너스. 오늘따라 말이 많아. 너답지 않게.”
서늘한 음성과 동시에 에르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두 번이나 말을 끊긴 멜리너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곡을 찔린 탓이다.
“다시 말해라. 왜 내가 나온 곳이 중앙 대륙이 아닌 거지? 왜 너희는 아직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거고?”
“…….”
“문제가 생겼군.”
“…….”
끊임없이 침묵하던 멜리너스는 결국 조심스레 끄덕였다.
“실은…. 남 대륙을 이끌어야 할 엘도라의 상태가….”
스리슬쩍 말을 흐린 멜리너스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갸웃하며 따라가던 에르윈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두 명이 보는 방향에는 금발의 여인이 홀로 동떨어진 채 힘없이 앉아 있었다. 거기다 고개까지 푹 꺼트린 것이 삶의 의미를 잃은 폐인을 보는 듯하다.
“왜 저러고 있는 거지?”
“타나토스의 힘을 빌려 살아난 이후로 죽 저렇습니다. 전쟁 패배의 충격이 꽤 큰 듯합니다.”
“뭐라고?”
“사실 이해는 안 가지만, 저 인간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그동안 성공 가도만 계속 달리다가, 처음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났으니까요.”
“…….”
“물론 이뿐만은 아닙니다. 분신처럼 생각하던 엑스칼리버도 빼앗겼고, 김수현한테는 장난감 취급을 당했으며, 게다가 동료를 잃은 슬픔까지 겹쳐서…. 뭐, 처음보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습니다.”
에르윈은 입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다가, 차분히 목을 가다듬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서로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음에도 엘도라는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엘도라.”
그러나 고운 미성이 들린 순간 움츠러든 엘도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엘도라. 저예요.”
한 번 더 부르니 딱딱히 경직돼 있던 몸이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한다.
힘겹게 고개 드는 엘도라의 몰골은 아무리 좋게 봐도 노숙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 곱던 금발은 빛을 잃다 못해 심하게 탈색된 것처럼 보였고, 얼굴에는 곳곳에 더러운 자국이 그늘져 있다.
무엇보다 흐릿하기 짝이 없는 두 눈동자는, 예전 푸른 궁전의 테라스에서 자신감을 빛내던 엘도라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에…. 에르윈…?”
목소리도 잔뜩 쉬었다.
잠시 후,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에르윈을 확인하자, 무력하던 눈동자에 조금이나마 빛이 켜졌다.
“에르윈…?”
“네. 엘도라.”
“에…. 에…. 에…. 에르윈…!”
“그래요, 엘도라. 그래요….”
에르윈은 엄마 찾는 아이와도 같은 소녀를 상냥히 감싸 안았다. 그러자 엘도라의 눈동자에 서서히 검은 물이 괴더니, 종래에는 시커먼 액체를 줄기줄기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으앙…. 으아아앙….”
“엘도라. 울지 마요.”
“나 때문에…. 나만 아니었으면….”
“아니에요. 저도 전부 들었어요. 절대로, 절대로 엘도라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에르윈이 한참을 다독이고, 구슬프던 울음이 흐느낌으로 잦아들 즈음. 품에 안겨 있던 엘도라가 문득 멍한 얼굴로 에르윈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어떻게…?”
“엘도라가 힘들다는 소식을 들어서.”
에르윈은 엘도라의 더러운 금발을 살그머니 쓸어내렸다.
“요정들과 함께 왔어요. 미안해요. 너무 늦게 와서.”
“요정…?”
원군을 데려왔다는 소리였다. 엘도라의 얼굴빛은 결코 희망차지 않았다. 기쁘다기보다, 오히려 두려워하고 공포에 질린 기색이 역력하다.
‘이만큼이나 심하게 당한 건가.’
드러난 빛을 눈치챈 에르윈은 짐짓 힘주어 목소리를 냈다.
“엘도라?”
“……?”
“엘도라는 이만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은 건가요?”
“그건…!”
그 순간,
“아니야!”
처음으로 목소리가 커졌다. 한껏 치떠진 눈동자로 전에 볼 수 없던 사납고 독살스러운 악의가 스쳤다. 순간적으로 소리 지르기는 했지만, 적어도 아니라는 말만큼은 진심이라는 방증이다.
단지, 힘이 부족할 뿐.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죽은 동료의 원한을 갚고 싶었다.
…그래. 할 수만 있다면.
“아니야…. 아닌데….”
무섭다는 본능과 복수하고 싶다는 감정의 괴리 속에서 엘도라의 낯이 재차 이지러지려는 찰나,
“그럼 엘도라는 왜 이 전쟁을 시작했지요?”
갑작스러운 질문이 날아들었다.
“어째서 그 무수한 반대를 무릅쓰고, 천사와 반목할 생각을 하게 된 건가요?”
에르윈은 한 번 더 힌트를 줬다.
“왜?”
엘도라는 앵무새처럼 말을 따라 했다.
“왜…. 왜….”
그리고 나직이 되뇌기 시작한다.
“인간을 위해….”
그렇다. 여태껏 엘도라를 지탱해온 단 한 마디. 천사의 꼭두각시를 벗어나 자주성을 확립하겠다는 합리적인 신념. 기실 지독한 자기 합리화이기도 했지만, 현재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에르윈은 방금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요. 엘도라.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그 말에 엘도라는 언뜻 눈을 들어 천천히 돌아봤다.
주변에는 어느새 여러 존재가 모여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엘도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이도, 익숙한 동료도 보였다. 팔짱 끼고 보고 있는 악마도, 어색한 낯으로 쳐다보는 요정도 있다.
엘도라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아직 당신을 믿고 따르며, 이렇게나 힘을 보태주는 이들이 있잖아요?”
에르윈은 떨리는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그 순간이었다.
안개가 잔뜩 낀 것 같던 엘도라의 눈동자가 돌연 번쩍 빛을 발했다. 그러더니 일 초도 지나지 않아, 꺼질 듯 말 듯 살아 있던 눈빛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완전히 꺼트려 졌다. 어두운 바다로 침잠하듯 삽시간에 까만색 일색으로 채색된다.
“나는….”
그와 동시에 엘도라의 목덜미에 검은 반점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이라 대부분이 보지 못했다.
“나는…!”
그리고.
“호오~?”
나뭇가지에 드러누워 상황을 구경하던 타나토스가 작은 탄성을 울렸다. 비틀비틀 일어서는 엘도라를 보며 손을 슬쩍 들었다. 손등에는 방금 엘도라의 목에 나타났던 것과 똑같은 반점이 떠올라 요요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타나토스는 검은 문양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나 원. 각성 한 번 참~ 늦기도 하다.”
한편, 같은 시각.
“응?”
철혈의 숲을 막 벗어난 김수현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의아한 얼굴로 엑스칼리버를 들어 올리더니, 톡톡 건드리거나 크게 휘둘러보기까지 했다.
“허…. 뭐지?”
“오라버니? 왜 그래요?”
“방금 무언가 툭 끊긴 것 같은 느낌이…. 뭐야. 갑자기 반응도 사라졌네.”
“?”
안솔이 갸우뚱하며 물었으나 김수현은 혼잣말만 계속 중얼거리며 엑스칼리버를 건드렸다.
그러나 아직 진군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걸까.
“아니, 아니다.”
칼을 도로 집어넣은 후, 짧은 한숨을 내쉬며 행군을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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