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61
00960 If You Change, One. =========================================================================
이어져 발생하는 현상은 아까와 하등 차이가 없었다.
거두절미할 것도 없다. 단지 수나가 손을 뻗자마자 수백의 마족들이 일제히 녹아내렸다. 정확히는 붉은빛이 언뜻 스칠 때 순간적으로 소멸했다는 표현이 옳을 터. 어떤 조짐이나 징조는커녕, 수나의 의지가 발현하는 즉시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작은 소리라도, 아니. 하다못해 일말의 마력 흐름이라도 느꼈다면 어떻게 알아차리기라도 했을 터. 한데 손 한 번 뻗었다고 하루살이 떼처럼 모인 마족들의 중심에 큼지막한 구멍이 뻥 뚫렸다. 그러니 어찌 공포를 느끼지 않고 배길 수 있으랴.
물론 병력은 아직 수천이나 남았다. 또한, 조물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은 마족들이 두려움을 이기고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쁘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물량도 소용없다고 해야 하나. 구천(九天) 격 신인 겁화와 화정의 합일로 탄생한 수나는 진정으로 어마어마한 무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수천의 마족 군단 중 일백 명, 아니 단 열 명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다면 어떻게든 명령을 따를 수 있을 텐데. 허나 손짓하는 족족 곳곳에 구멍이 뻥뻥 뚫리고, 모이기 무섭게 소멸해버리니 허공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풍경을 연출하는 중이다.
이와 반대로 단상에 거의 근접한 북 대륙 무리의 상황이 한층 나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김수현의 처형을 코앞에서 올려다볼 뻔했는데 수나의 활약으로 일말의 여유가 생겼다. 덕분에 급박함 속에서도 상황을 살필 시간을 얻을 수 있었으니.
샛노란 빛으로 물든 김유현의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스쳤다.
‘단상 아래로 떨어진 놈이 다섯. 아직 남아 있는 놈은 열둘.’
좀 전 백한결의 보호막으로 처형을 막아내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쪼롱이로 내려다보는 시야로 아까 떨어져 나갔던 놈 중 여럿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잡혔다. 그러자마자 김유현의 두 눈동자가 형형한 안광을 뿜었다.
우르르릉!
이윽고 하늘에서 정확히 열두 줄기의 벼락이 내려꽂히는 찰나.
쿠르르르!
돌연 땅에서도 뇌전과 똑같은 숫자의 불길이 동시에 솟구쳤다. 불길한 기운을 뿌리는 시커먼 불기둥은 흡사 피뢰침이라도 된 듯 뇌신의 벼락을 모조리 상쇄해버렸다.
“에르윈! 네가 김수현을 죽여라!”
이어지는 외침에 김유현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흘끗 눈을 드니 날개를 활짝 펼친 어둑한 그림자가 빠르게 강하하고 있었다.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형상이었다.
“아스타로트!”
치 떨리는 목소리가 새나왔다. 시꺼멓게 이글거리는 양손을 보니 당장에라도 불을 뿜을 듯한 폼이다. 저 하나라면 현 인원으로 지지는 않겠지만, 마냥 쉽게 이길 수도 없는 상대였다. 아스타로트도 그걸 알고 아까처럼 외쳤을 터. 즉 최대한 시간을 끌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김유현도 순순히 끌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만큼 가장 선두에서 달리던 발걸음이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갑작스레 멈췄다. 빠르게 하강하는 아스타로트를 노려보며 두 손이 찬란한 뇌광을 방출한다. 공교롭게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신재룡, 차소림의 걸음도 동시에 멎는다.
왜 멈췄는지는,
“부탁합니다!”
이 한 마디에 전부 들어 있었다.
“제발…!”
간절한 외침에 메아리친다. 그 말을 듣자마자 어쩔 줄 몰라 하던 나머지 이들은 이내 앞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비록 자세한 말은 오고 가지 않았으나 김유현과 나머지 두 명이 왜 멈춰 섰는지 본능으로 이해했으니까.
아스타로트의 포효와 전류가 사납게 방전하는 소음이 등 뒤로 빠르게 멀어진다. 김유현이 빠진 자리에는 두 사용자가 동시에 선두로 올라왔다. 죽으라 달리는 두 남녀는 바로 안현과 이유정이었다.
하지만 아스타로트를 뚫었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다. 공중은 수나에 의해 차곡차곡 정리되고 있다손 쳐도, 애초 구출 조를 가로막으려는 놈들도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내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왼쪽에서 이유정을 노리는 기운이 폭풍처럼 치고 들어왔다. 워낙 신속한 속도라 무조건 달리는 것에 주력하던 이유정이 놀라는 것도 전혀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
퍽!
돌연 어깨에 강한 충격을 받은 이유정이 크게 비틀거렸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순간 시린 냉기가 뺨을 스쳤다. 화들짝 치떠진 눈이 긴 생머리를 휘날리는 남다은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이유정의 입이 벌어졌다.
“언니!”
“어서 가…. 아악!”
그 순간 남다은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바로 이어서 시커먼 기운을 풀풀 날리는 엘도라가 악귀와 같이 일그러진 얼굴로 무섭게 들어오는 찰나였다.
까앙!
부지불식간에 또 한 번 세찬 쇳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진한 보랏빛 코트 자락이 펄럭거렸다. 긴 장검을 든 사내는 땅에 기다란 자국을 남기며 밀려났으나 엘도라의 돌진을 저지하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그 상태로 허준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손을 뻗어 상대의 등을 세게 밀쳤다. 주춤 밀려난 이유정이 얼굴이 멍해졌다.
“어, 어….”
“언니! 그냥 가요!”
이 악물고 충격을 견디느라 허준영이 하지 못한 말을 김한별이 대신 해줬다.
이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성난 검음과 보석을 무작위로 뿌리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이유정 역시 뒤돌아보지 않고 다시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또 세 명이 빠졌다.
이제 남은 인원은 고작 일고여덟 남짓. 근원, 안현, 안솔, 이유정, 진수현, 제갈 해솔, 차희영. 그리고 언제 따라왔는지 모를 유니콘 한 마리.
단상 주변은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러운 소란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일직선으로 주파하는 구출 조의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지 억지로 감정을 절제하는 듯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들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조건 그래야 하는 것처럼.
…단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짓씹고 있을 뿐.
잠시 후.
“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원은 비로소 단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시각각 다가오던 건물이 이제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단상 바로 앞까지 도착했을 뿐, 올라가려면 좌우로 난 계단까지 가야만 했다.
“────. ────.”
그때 제갈 해솔이 빠르게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에서 물보라 같은 기운이 일어나자 망연하던 안현과 이유정의 얼굴빛에 화색이 돌았다. 제갈 해솔의 장기를 떠올린 것이다. 워프 능력을 사용하면 굳이 계단까지 갈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한 찰나 차희영이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다면 진작 사용하면 됐을 텐데 왜 이제껏 아끼고 있었던 걸까? 또 왜 영창 하는 와중 초조한 눈으로 계속 주변을 둘러보는 거고?
해답은 곧 알 수 있었다.
주문이 거의 완성되기 직전에 갑자기 날카로운 줄기들이 화살처럼 쇄도해왔기 때문이다.
“────, 아이 씨!”
인상을 쓴 제갈 해솔은 주문을 취소하고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그거…. 기다리고 있었어. 언제 쓰는지.”
곧 요염한 목소리를 내며 등장한 여인은 바로 리리스였다.
제갈 해솔의 워프 능력은 저번 전쟁 때 한 번 밝혀진 바 있다. 적들의 눈앞에서 워프로 안솔을 구출하지 않았는가. 말인즉 악마도 그녀의 능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에이 씨! 알고 있었는데!”
“그런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일부러 기척을 숨겼지.”
차갑게 말한 리리스는 우아하게 두 손을 펼쳤다. 열 손가락이 점차 길어지더니 송곳처럼 뾰족해졌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아아아….”
긴 한숨을 뱉은 제갈 해솔이 고개를 꺼트렸다.
“아쉽네. 구해주고 유세 좀 떨어보고 싶었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곧장 턱을 젖힌다.
“근원, 차희영. 도와줘. 혼자서는 힘들 것 같으니까.”
그 순간 곧바로 발 빠르게 뛰는 소리가 이어졌다. 안현과 진수현이 좌측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고 바로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자 어정거리고 있던 안솔와 유니콘도 금세 둘을 뒤따라간다.
“놀고 있네. 누가 놓칠 줄 알고?”
가소롭다는 듯이 빈정거린 리리스가 팔을 뻗었으나,
“에베베베? 놓치게 할 건데?”
거대한 마력 파동이 리리스가 방출한 검을 줄기를 받아쳤다. 리리스의 눈이 화등잔만 해지더니 입에서 큭 소리가 샜다. 나름 여유라고 여겼건만 생각보다 상대의 마력이 만만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갈 해솔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주문을 외면서 살랑살랑 손만 흔들었다. 괜찮으니 어서 가라는 뜻. 이내 근원도 조용히 마법 진을 소환하기 시작하고, 차희영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황급히 부채를 꺼낸다.
결국.
“……!”
남아 있던 이유정조차 등을 돌렸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나마 움직이기 시작한다.
등 뒤는 여전히 소란스럽다. 신재룡의 거친 고함도 들렸고 칼과 칼이 부딪치는 시끄러운 철성도 들렸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어둡고 뭉클뭉클한 마력과 제갈 해솔의 방대한 마력까지 섞여 마구잡이로 느껴졌다.
그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이유정은 달린다. 달리는 와중 두 눈이 돌연히 그렁그렁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까닭 모를 감정이 갑작스레 왈칵 솟구친 탓이다. 허나 아까 등을 떠밀던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어 꾹 참으며 전방을 응시했다.
안현과 진수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도 않는다. 이대로라면 구출을 하든 못하든 늦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하등 관계가 없다. 게헨나나 수나가 알아서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아니. 남의 손에 맡길 거였다면 애초 이렇게 나서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만이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직접 구하겠다기보다는, 김수현의 구출을 위해 뭐라도 하겠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그런 만큼 자기를 믿고 남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팔자 좋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정이 살며시 단상을 흘겼다. 어지간한 도시의 성벽 규모와 맞먹는 정도의 단상은 여전히 드높기만 하다.
“…….”
할 수 있겠느냐는 갈등이 잠깐 스쳤으나 세차게 고개를 털었다.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만 했다.
결심한 순간 이유정의 온몸이 황금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동체 강화와 묘 족 체술의 동시 발동.
성패는 일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결정 날 것이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곧바로 목적지까지 단숨에 다다를 수 있다.
긴장으로 손을 말아 쥔다. 딱딱 부딪치는 이빨이 서로 강하게 맞물린다.
당장 떠오르는 문제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었으나….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가늠하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으니.
기합과 함께 있는 힘껏 땅을 박차자 황금의 형상이 허공을 훨훨 날았다.
이어서 한 발이 단상에 살짝 닿는 순간,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놀랍게도 이유정의 전신이 폭발적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흡사 섬광의 움직임이 저럴까. 혼신의 힘을 다한 금빛 질주가 반듯하게 세워진 단상의 표면을 빛살처럼 가로지른다. 혜성의 꼬리 같은 잔상이 반듯한 수직으로 상승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아름답고도 용맹하다.
스치는 풍경도 보이지 않고 귀를 스치는 바람도 느껴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 점차 가까워져 오는 붉은 하늘뿐. 이것만 넘으면 그토록 바라던 김수현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순식간에 끝자락까지 올라간 이유정이 한 번 더 발에 힘을 줬다. 힘차게 도약해 용수철처럼 튕겨 올라가자 시야가 단상 위로 훌쩍 넘어간다. 이어서 드디어 한 발을 걸치려는 순간이었다.
텅!
불현듯 전신이 무언가 단단한 것에 가로막히는 감각을 느꼈다.
“…아?”
이유정의 입에서 망연한 침음이 흘렀다. 멍한 두 눈이 거무스름한 빛이 흐르는 앞을 응시한다. 비로소 보게 된 안에는 김수현이 크게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오빠!”
급한 대로 손을 뻗었으나 애꿎은 장막만 치고 말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단상 전체가 정체 모를 검은 막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결계 안쪽에는 마족 수십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고, 그 속에 고연주가 섞여 있었다. 한 손으로 복부를 짚어 쓰러진 채로.
그리고 약간 떨어진 곳으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늙은 노인 한 명. 이제 막 전투가 끝났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던 노인은, 방금 올라온 이유정을 보자마자 귀찮다는 듯이 눈을 치떴다.
“…또 귀찮은 떨거지인가.”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힘겹게 지팡이를 들어 상대를 겨냥한다.
“어떻게 올라왔는지 모르지만…. 잘 가시게.”
쾅, 작은 폭음과 함께 이유정이 몸이 세차게 기울었다. 미처 대응할 틈도 없었다. 하릴없이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허무함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느릿하게 흘러간다.
‘다…. 갔었는데….’
딱 한 발자국이면 됐건만, 설마 단상에서까지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에는 서서히 아래로 떨어지는 동시에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런 이유정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건 이제 막 계단으로 올라오는 서너 명이었다.
“후우우우….”
실로 정신이 없었으나 멜리너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한 발만 늦었다면 저 그림자를 이용하는 이상한 인간이 김수현의 구출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헐레벌떡 단상으로 올라왔을 때는 이미 마족 대부분이 쓰러진 후였으니까.
또 방금 숫제 단상을 타고 올라온 여인도 그렇다. 뭔 놈이 이렇게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인지 결계를 친 것도 정말이지 간발의 차였다.
“그래도 어쨌든 확보는 성공했으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린 멜리너스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서며 눈을 돌렸다.
꿇어앉아 있는 김수현은 어느새 머리를 푹 숙이고 있다. 옆의 여인이 담담히 한쪽 손을 잡아주고 있으나 사내는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꽉 쥐어진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면 아직 살아는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잠시 후, 김수현을 바라보던 멜리너스가 서둘러 지팡이를 들었다. 그때였다.
쾅!
파츳, 파츠츠츳!
갑자기 귀를 때리는 폭음과 동시에 단상에 쳐진 결계가 뒤흔들리며 푸른빛이 드리웠다.
깜짝 놀라 돌아보는 멜리너스는 자그맣게 금이 간 결계를 보고 경악성을 내질렀다. 웬 유니콘 한 마리가 매섭게 달려오더니 머리의 뿔을 결계에 처박고 있었다. 신성한 힘이 깃든 유니콘의 뿔인 만큼 악마 속성에 큰 힘을 발휘하는 건 당연지사.
후르르르!
나직이 울부짖은 유니콘이 눈을 찌푸리며 멜리너스를 노려본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쳐들고 갈라진 부분으로 재차 뿔을 찔러 넣는다.
쾅!
콰직, 콰지지직!
깨졌다.
거듭되는 폭음과 동시에 결계의 한 부분이 와장창 깨지고, 그 사이로 두 사내가 황급히 뛰어들어온다. 멜리너스가 반사적으로 김수현을 향해 마법을 발사한 것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으나, 머리를 치기 직전 펑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진수현이 재빠르게 검기를 날려 상쇄시킨 것이다.
“이놈들! 어, 어…?”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는 멜리너스의 몸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불침 맞은 황소처럼 달려든 진수현이 멜리너스의 다리로 태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위에서 덮쳐든 안현이 늙은 노인의 몸을 완전히 짓뭉개버렸다.
의외라면 의외였다. 목적지에 다다른 만큼 물불을 가리지 않는 두 사내의 육탄 돌격에 멜리너스는 허망하게도 균형을 잃고 말았다.
“솔아!”
“안솔!”
다음 순간, 얽히고설킨 세 사내를 한 여인이 힘차게 뛰어넘는다. 흰 로브를 펄럭이며 넘어가는 안솔을 확인하는 순간 멜리너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 안 돼…!”
그러나 안솔은 이미 지팡이를 꺼내 든 상태였다. 급한 상황 속에서도 한결 침착한 얼굴로 주문을 외우더니 안간힘을 기울여 팔을 내뻗는다.
“김수현!”
이윽고 희멀건 한 빛을 발하는 지팡이가 끝끝내 망연자실한 얼굴에 닿으려는,
“닿아라아아아!”
그 찰나의 순간!
퍽.
어디선가 고요히, 그러나 쏜살같이 날아온 무언가가 복부에 꽂혔다.
“꺄아아악!”
그에 따라 몸이 절반으로 접힌 안솔이 김수현을 그대로 지나쳐 하염없이 날아간다. 퉁, 퉁 튀기면서 단상 밖으로 나가떨어질 뻔하다가, 가장자리에 가까스로 한 손을 걸치는 데 성공했다. 평소의 안솔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반사 신경. 하지만 이내 작은 손등조차도 누군가의 발이 세게 눌러 밟는다.
“역시. 마지막에 네 년이 나올 줄 알았다.”
씩씩 숨을 몰아쉬면서 독설과 함께 등장한 여인은 다름 아닌 에르윈, 아니 사탄이었다.
“귀찮은 놈들. 정말 지지리도 끈질겼어.”
증오에 찬 눈동자로 아래를 노려보면서 짓밟은 발에 가일층 힘을 준다.
그러나.
“피차일반이야. 흐흐….”
뜻밖에도 안솔은 신음은커녕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비웃음과 마주하는 순간 에르윈의 눈이 찢어질 듯 치떠졌다. 곧바로 발을 떼로 걷어차려고 했는데 갑작스레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황급히 눈을 내리자 어느 순간 왼쪽 발목을 잡고 있는 손 하나가 보였다. 여인의 작고 고운 손이 아니라 사내처럼 크고 거친 손이었다.
“좋은 거 하나 알려줄까?”
들리는 목소리조차도 낮고 굵은 톤으로 바뀌었다. 어느새 단상에 대롱대롱 매달린 형상은 안솔이 아니라 한 사내의 형상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애초 김수현을 구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어.”
“뭐….”
“정확히는 살해 시도를 막으면서 너희를 모조리 끌어내는 게 주목적이었지.”
“그게 무슨…! 아니, 넌!”
에르윈이 크게 기함하는 순간 하승우가 씩 웃는다. 그러더니 에르윈의 발목을 더욱 힘 있게 잡으며 단상을 잡고 있던 손을 떼버렸다.
“아!”
아차 하는 순간 에르윈은 상대의 행동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돌연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찰나, 하승우가 아래로 빠르게 떨어지는 동시에 에르윈은 배꼽이 확 쏠리는 감각을 느꼈다.
펄럭, 펄럭!
느닷없이 정수리를 간질이는 날갯짓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공중에 작은 괴조 한 마리가 하늘을 선회하고 있다.
하승우에 딸려 추락하는 와중에도,
“……!”
에르윈은 분명히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괴조의 등에서 뛰어내리는 흰 로브의 여인.
등에서 일렁거리는 반투명한 색의 날개.
언뜻 녹 빛이 스치는 한 쌍의 눈동자.
…그래.
안솔은 그곳에 있었다.
“사용자….”
아래로 뻗는 손이 희게 빛난다.
거리는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김수현…!”
이어서 손바닥이 내려꽂히듯 가슴에 맞닿는 순간.
화아아악!
상대의 전신이 단숨에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김수현은 눈을 감은 채 온몸으로 퍼지는 따뜻한 기운을 음미했다.
곳곳으로 퍼지는 기운은 체내의 활력을 활성화하고, 몸에 걸린 구속 장치를 하나도 남김없이 바스러트린다. 이제껏 강제로 억눌려 있던 마력이 무서운 기세로 솟구쳐 텅텅 비어 있던 회로에 가득히 흐르기 시작한다.
본연의 힘이 일거에 해방되고 몸이 자유를 되찾는다.
갇혀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는가.
자기를 구하려 무진 애를 쓰는 동료를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된다.
속박의 시간은 완전히 끝났다.
이윽고 전신을 힘껏 떨치며 가슴을 펴자,
꾸웅!
하늘을 찌를 듯 예리하게 치솟는 기세가 외부까지 표출됐다. 사위로 흐르는 마력이 웅혼한 울음을 토하고 주변 공간도 기이하게 진동하며 덜덜거리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지그시 감겨 있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흐릿하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사라졌던 기력이 살아나고, 묻혀 있던 투지가 불타오른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형형한 불빛이 비치며 시뻘건 불꽃을 튀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
김수현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