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99
00998 Omnibus – Seraph. =========================================================================
* 오늘 후기는 꼭 읽어주세요.
5. 세라프의 폭주.
“이제 끝나셨는지요?”
어둠 속에서 친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세라프가 눈을 들자, 누군가 난간에 기대앉은 그림자가 보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바지를 툭툭 털며 일어서는 형상은 바로 조승우였다.
“이야, 생각보다 오래 걸리셨네요. 사실 중간중간 몇 번이나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그 모임에 찍히고 싶지는 않아서요. 결국에는 계속 기다렸습니다. 하하.”
장난투로 투덜거리더니 위층으로 안내하듯 손을 뻗는다.
“아무튼, 늦은 시간이지만 가시죠. 클랜 로드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니, 저는….”
세라프는 반사적으로 거절하려 했으나,
“오후 때부터 계속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 한 마디에 더는 물리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천사는 몇 걸음 앞서 느긋이 계단을 오르는 사내의 등을 빤히 바라봤다.
이 시간이라면 김수현은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하는 사 층 방에 있을 터.
세라프가 바보도 아니고, 전령을 전했으면 이만 물러가도 상관없을 것이다.
한데 이렇게 굳이 안내까지 하는 이유는….
“어떻습니까?”
생각이 끝나기도 전, 조용한 음성이 정적을 깨트렸다.
“우리 클랜 로드 말입니다. 많이 변하셨죠?”
“……?”
세라프는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뜬금없이 왜 이 이야기를 꺼내는지 궁금했으니까.
그러나 조승우도 녹록한 상대는 아니었다.
“흠. 말씀이 없으신 걸 보니 혹시 관심이 없으신 게 아니신지…?”
“아닙니다.”
단호한 음성이었다.
기어코 대답을 이끌어낸 조승우는 가볍게 웃었다.
“변하셨어요. 예, 정말로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비비앙 씨를 일부러 괴롭히지도 않으시고, 새끼 카오스 미믹의 상자도 찢지 않으시고, 중앙 관리 기구, 그러니까 타인의 입장을 좀 더 헤아릴 줄도 알게 되셨죠.”
이어서 “뭐, 가끔 엑스칼리버를 핥으시는 행동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지만요.” 라는 말을 덧붙였으나, 워낙 작은 목소리라 세라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실 예전에는 곁에만 있어도 까닭 모를 불안감에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는데, 그런 긴장감도 싹 사라졌어요.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여유로움도 느껴지지요. 주변에 신경도 많이 써주시고요.”
어느새 두 명은 이 층을 지나 삼 층에 다다르는 중이었다.
“뭐랄까, 좀 더, 아니. 확실히 인간다워지셨다고 할까요.”
드디어 삼 층에 도착했을 때, 세라프는 간신히 “그렇군요.” 라고 말할 수 있었다.
흘끗 뒤를 돌아본 조승우는 여전히 표정없는 천사의 얼굴을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천사 세라프.”
그리고 말했다.
“클랜 로드도 사람이에요, 사람.”
두 번이나 힘주어 말하더니 빙긋이 웃었다.
“너무 눈치만 보는 것도 마냥 좋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면…. 설령 머리로 이해한다손 쳐도, 기다리는 사람은 지치기 마련이니까요. 감정상 말이죠.”
세라프의 눈이 번쩍 떠졌다.
처음으로 생긴 표정 변화였다.
영리한 천사의 두뇌는 비로소 조승우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차렸다.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인사를 마친 사내는 어두운 복도 속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세라프는 자신도 모르게 사 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발을 올렸다.
“…….”
홀 플레인에서 천사는 사용자를 돕는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세라프는 김수현의 도우미였었다.
‘세라프.’
한 사용자를 오랫동안 쭉 보게 되면.
‘내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넌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지.’
담당하는 사용자를 보는 고정 관념,
‘네 조언은 항상 합리적이었지. 날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줬어. 고마웠다. 천사이기는 해도 얘는 날 진심으로 위해주는구나.’
즉 하나의 인식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했었다는 말이야….’
그렇게 생겨난 인식은.
‘스스로 말하고 부끄럽지도 않아?’
‘너만큼이나 구역질 나는 년은 처음 본다.’
‘추악한 년.’
‘항상 역겨운 존재로 남아 있어줘서, 정말로 고맙다.’
사용자와 갈등이 생겼을 때, 관계를 재조립하기 위한 지침으로 활용된다.
‘미쳤어? 그걸 왜 말해준 거야?’
‘세라프는 천사를 대하는 사용자 김수현의 태도가 옳다고 보는 겁니까?’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럼 그 사실은…. 왜….’
‘오랜만…. 은 아닌가? 아무튼, 잘 지냈어?’
마침내 사용자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을 때.
‘아, 오늘은 마르를 못 데려왔네.’
‘뭐, 고마워. …응? 아니, 말 그대로 고맙다고.’
천사가 가졌던 상대의 고정 관념은 단단히 굳어진다.
바로 ‘확신’이라는 단어로.
말인즉 세라프는 자신이 있었다.
십오 년 동안 김수현을 봐왔다는 자신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 자신이 김수현을 제일 잘 안다는 자부심.
그래서 근 사 개월이 넘게 그렇게 행동했었다.
왜냐면 김수현이니까.
자신이 아는 김수현이라면 분명히 왜 이러는지 이해해줄 테니까.
하지만 방금 조승우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인식에 허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세라프가 간과했던 것은.
달칵!
현재의 김수현은,
“아, 이제 왔어?”
과거의 냉혈한 괴물이 아니라, 십오 년 전 첫 소환 때 봤을 때처럼.
“…세라프?”
감정이 살아 있는, ‘인간’에 가까운 김수현이라는 점이었다.
*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을 때, 문밖에는 세라프가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불렀으나 표정이 이상했다.
스스로 문을 열었으면서 ‘언제 도착했지?’ 라는 반응이라고 해야 하나.
무언가 깊은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던 걸까?
들어오라고 손짓하자, 세라프는 죄지은 사람처럼 쭈뼛쭈뼛하며 가까워졌다.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보니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생겼다.
세라프만 보면 왜인지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고는 한다.
예전의 나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불현듯 곤란해 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장난치고 싶어졌지만, 나름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부른 만큼 참기로 했다.
소파에 앉자, 세라프도 날 흘깃거리더니 조심스레 따라 앉는다.
“자리는 방금 끝난 거야?”
“…예.”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피곤하지는 않고?”
“괜찮습니다.”
“음…. 그래. 사실 오늘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게 있어서.”
“……!”
세라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이번에는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뭐야, 왜 저래.
꼭 이별을 앞둔 비극의 여주인공 같잖아.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입 속이 어지러워졌다.
일단 점심에 짜증 냈던 것부터 사과하는 게 옳겠지.
“죄송합니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돌연 세라프가 허리를 숙였다.
느닷없는 사과에 순간 멍해졌다.
왜 네가 사죄를 하는 거야…?
“그동안 제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했습니다.”
“세라프?”
“그로 인해 오해가 생겼다면 전적으로 제 탓입니다.”
“잠깐만. 왜 사과하는지 모르겠어. 난 단지 앞으로 우리 관계에 관해서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나 세라프는 무언가 단단히 오해 또는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러는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제정신이 아닐 리가 없으니까.
세라프와의 대화는 항상 초점이 잘 잡혔었던 터라, 이렇게 어긋난 경우는 나로서도 당황스러웠다.
생각지도 못하게 엉망진창이 된 것 같아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오늘 점심에 미안했다고.”
“…예?”
“사실 우리 클랜이 좀 많이 배타적이잖아. 널 데리고 올 때 상당히 걱정하기도 했었고. …그런데 근심했던 것치고는 잠잠하더라? 거기다 오늘 고연주한테 초대까지 받았지.”
“…….”
“왜 이렇게 적응이 순조로울까? 곰곰이 헤아려보니까…. 네가 왜 그동안 조심조심 눈치 보며 생활했는지 이해가 가서.”
“아….”
어느새 세라프의 횡설수설은 그쳤다.
글썽글썽한 눈동자로 날 물끄러미 보는 것이 고마워하거나 약간 감동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진심을 밝히는 건 언제나 낯부끄럽다.
“생각해보면 넌 항상 합리적으로 움직였지. 그런데 난 그것도 모르고 볼 때마다 조르거나 유치한 투정만 부렸으니…. 뭐, 네가 나한테 정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네.”
“저, 정이 떨어지다니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갑자기 세라프의 언성이 높아졌다.
숫제 소파에서 화들짝 일어서기까지 했다.
설마 화내는 건가?
“오히려 저야말로 지레짐작해버리고…. 관심을 가져 주셔도 계속 거절만 했으니 이제 수현이 절 싫어하시는 게 아닐까….”
“응?”
“그래서 어쩌면 절 스파이로 여기셔도 할 말이 없다고…. 그렇게….”
“누, 누가 그래? 그럴 리가 없잖아?”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똑같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세라프를 스파이로 의심한다?
그럴 리가 없잖은가?
평소 날 어떻게 생각하길래 저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듣자 듣자 하니까 속이 좀 상하네. 뭐야, 세라프. 결국에는 네가 멋대로 오해한 거잖아?”
“그건…. 그렇기는 하나, 애초 수현이 오해하게 한 것도 있지 않습니까? 기껏 만났는데 천계로 언제 돌아갈 거냐는 말이나 하고…!”
“농담을 뭘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그리고 너도 그래. 아무리 적응이 중요하더라도 어떻게 겨우 손잡는데 몸을 빼냐. 그때 얼마나 서운했는지 알아?”
“그게 아니라, 갑자기 잡으니까 놀라서 그런 겁니다.”
“거짓말. …야, 차라리 애 낳고 싶다는 말을 하지나 말던가. 잔뜩 기대하게 해놓고…!”
“그러는 수현이야말로, 어떤 일이 있어도 구해주겠다는 말로 엄청나게 두근두근하게 해놓고…!”
“난 진심이었는데?”
“저도 진심이었습니다?”
“너…?”
“애초 수현은 아무것도 모르지 않습니까? 제가 언제부터, 얼마나 오래전부터 수현만 바라봤는지! 그리고 얼마나 좋아하고, 또 사랑받고 싶었는지!”
“사랑하려 해도 피하는 게 누군데?”
“예, 그럼 저도 앞으로 눈치 같은 거 보지 않고, 마음껏 사랑받겠습니다…!”
거기까지 외치는 순간이었다.
한창 폭주하던 세라프가 돌연히 “앗.” 정신 차리고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어서 입을 벌린 채 두 눈을 깜빡깜빡.
망연히 날 보더니 얼굴이 노을 진 강처럼 순식간에 붉어졌다.
“…….”
“…….”
불현듯이 침묵이 내려앉는다.
무언가 어색하고 괜스레 몸이 간지러워지는 뜻 모를 정적이었다.
동시에 뇌리에 한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지금,
왜,
어째서 싸우고 있는 걸까?
“어….”
세라프는 말이 없다.
그저 고개는 푹 숙이고, 양손은 허벅지를 으스러지라 쥔 채 아랫입술만 질끈 깨물고 있다.
어깨도 가늘게 떨린다.
꼭 당장에라도 이 방을 뛰쳐나가고 싶다는 듯이.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 입을 열지 못했다.
문득, 바람이 불었다.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시원하고 선선한 밤바람이었다.
그러나 테라스를 타고 들어온 밤공기는, 어떤 이유인지 곧바로 후끈 달아올라, 방 안을 뜨끈뜨끈하게 덥혔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란이 또 한 번 들썩거렸네요….
우선 죄송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좋아! 드디어 독자 분들 중 내 편이 생겼어!’ 라는 철없는 생각을 했다가, 점점 과열돼 가는걸 보고 ‘아, 이게 아닌데….’ 라고 후회했습니다.
그냥 제가 조용히 넘어갔으면 됐는데, 괜히 논란을 점화시킨 것 같아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굴었던 점, 모든 독자분들께 사과드립니다. _(__)_
혹시 상처받으신 독자분께서 계시다면, 꼭 마음 푸셨으면 좋겠어요.
*
세라프와 관련된 스토리도 급하게 수정했습니다.
원래는 김수현이 상처 주는 말을 막 쏟아내서 세라프를 울리고, 끝에는 보따리 싸서 쫓아내게 하려고 했는데….
그냥 달달하고 알콩달콩하게…. ^^;
이번 회 두 캐릭터의 폭주를 귀엽게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
*
독자님들.
현재 메모라이즈 비주얼 노벨이 2화까지 무료로 풀렸습니다.
hallplain.com 에서 확인하실 수 있는데요, 1화와 다르게 중간중간 전개가 달라졌다는 반응이 눈에 띄네요.
여기서 제가 이벤트를 하나 해볼까 해요.
hallplain.com 에서 메모라이즈 비주얼 노벨 1, 2화를 플레이해보시고(무료로 공개됐으니 플레이에 부담 없으실 거예요.),
hallplain.com 사이트 게시판에 간단하게나마 감평이나 리뷰를 남겨주시는 분께 조아라 딱지 50장씩 선물해 드릴게요.
작성하신 후 제게 코멘트나 쪽지로 주소를 알려주시면, 제가 직접 확인하고 딱지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또 이미 작성해주신 분이 계시다면, 저한테 알려주시면 바로 보내드릴게요.
전 파트가 오픈하는 모바일 버전 출시가 얼마 남지 않아서, 독자분들의 반응이 궁금하네요.
긴 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월요일이네요.
독자분들 모두 즐거운 한 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