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98
00997 Omnibus – Seraph. =========================================================================
4. 오해 전주곡.
세라프가 김수현을 따라 머셔너리에 온 지도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머셔너리는 참 배타성 짙은 클랜이다.
뮬에서 창설된 초창기 시절부터 누구 한 명 가입했다 싶으면 그냥 넘어간 적이 없다.
김한별을 배척했던 이유정이나 가입 초 신경전을 벌였던 고연주와 제갈 해솔 등등.
크든 작든 신고식이라 보기 힘들 정도의 사건이 발생했었고, 조용히 넘어갔던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러한 과거로 미루어볼 때 세라프가 아무 잡음 없이 머셔너리에 섞이는 걸 기대하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이 사실은 세라프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기실 애초 들어오자마자 열렬히 환영받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몇 년을 김수현의 도우미로 있었던 만큼 머셔너리 클랜의 성향을 모른다면 거짓말이리라.
첫 자리에서 한 김수현의 애를 낳고 싶다고 한 선언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라 나름 뜻을 담은 표명이었다.
천사가 심은 스파이가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김수현의 아내로서 살겠다는 그런 의미.
나서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탁 까놓고 말해서 천사는 더 이상 사용자의 우위에 서는 처지가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졌던 관계는 김수현이 악마를 토벌하고, 제로 코드를 얻은 시점에서 완전히 역전됐다.
가브리엘을 위시한 천사의 칠팔 할이 천계로 도망간 것이 그 방증일 터.
이러한 형세는 세라프한테도 여실히 드러났다.
어딜 가나 감시의 눈길이 따랐고, 곳곳에서 경계하는 태도와 마주해야 했다.
대놓고 배제하지는 않았으나 아마 김수현이 아니었다면 성격 급한 몇 명은 좀 더 나섰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든 걸 버리고 김수현을 따랐지만, 그것만으로 끝난 게 아니라는 소리다.
사랑하는 상대의 곁에 있고 싶다는 소원은, 한 사내의 허락만이 아니라 김수현의 주변에 있는 모든 존재의 인정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세라프가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
쥐 죽은 듯 살며 눈치 보는 것뿐이 더 있겠는가.
여기서 천사 특유의 깔아보는 태도를 보였다가는 어떤 대접을 받을지 명약관화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세라프는, 재회 이후 꾸준하게 이어지는 김수현의 관심이 두려웠다.
아니, 사랑하는 남자가 주는 눈길이 무서울 리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관심을 받아들였을 때.
‘저것 좀 봐. 쟤 또 오빠 옆에 붙어 있네.’
‘응? 오빠가 먼저 다가갔잖아요?’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오빠도 이해 안 가지만, 둘이 같이 있는 거 볼 때마다 불안하다니까?’
‘왜요?’
‘얘 좀 봐? 야, 천사잖아, 천사. 그리고 오빠는 이제 제로 코드의 주인이고. 저렇게 살랑살랑 꼬리 흔들며 기회 엿보다가, 또 이용하려 할지 누가 알아?’
‘흠…. 확실히….’
이처럼 이미 사내 곁에 수두룩하게 포진한 여인의 반응이 부담스러웠다.
왜냐면 그것은 단순한 질투 등이 감정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김수현과 세라프를 연결하는, 숱한 애정과 증오, 신뢰와 불신으로 점철된 십오 년간의 유대감은 그녀들에게 공유되지 않는다.
오히려 천사에게 실컷 이용당한 사용자라는 입장에서 당연히 해볼 만한 의심이었다.
그래서 세라프는 거절하고, 또 거절했다.
‘세라프. 요즘 생활은 어때?’
‘좋습니다. 행복합니다.’
‘힘들지는 않아?’
‘힘들지 않습니다. 정말이니 이렇게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 요새 일만 하려니 속이 갑갑하네. 어때? 같이 밖으로….’
‘저보다는 부인분들과 먼저 가시는 게….’
‘세라프. 시간 있으면 오늘 밤에….’
‘죄송합니다. 몸이 좀 피로합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오늘만 이해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속된 말로 몸을 사리며 지냈던 것이다.
실제로 해놓은 짓이 있는 만큼, 이조차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정원에서 뒹굴뒹굴하며 햇볕을 쬐던 아기 페가수스가 똑같이 정원으로 마실 나온 아기 카오스 미믹을 발견, 냉큼 달려들었다.
두 어린 것이 벌이는 치열한 격전을 세라프는 한창 흥미롭게 구경하는 중이었다.
“세라프!”
그때 수행 인원을 대동하고 밖으로 나가던 김수현이 반갑게 말을 걸었다.
세라프도 서둘러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양손을 공손히 모으며 허리를 숙였다.
“나가십니까?”
“응. 오늘 중앙 관리 기구에서 모임이 있거든.”
“구(舊)와 신(新)의 대립은 대충 들었습니다. 어떻게 잘 해결될 것 같은지….”
“글쎄, 아마도? 아마 오늘로 거의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피곤하다는 투로 말한 김수현은 갑자기 두 손을 뻗어 세라프의 양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깜짝 놀란 천사가 몸을 빼려고 했으나 이미 붙잡힌 뒤였다.
“수, 수현?”
“잠깐만, 잠깐만 이러고 있자.”
“힘들어서 그래. 이러고 있으면 왜인지 치유되는 느낌이거든. 응?”
“하, 하지만….”
한동안 세라프의 손목을 어루만지며 서 있던 김수현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해는 중천에 걸려 있었다.
이윽고 얼굴이 벌게진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세라프를 스리슬쩍 곁눈질하더니 흘리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도 좀 남고…. 어때? 식전이면 점심이라도 같이 할래? 아니, 하자.”
수행 인원으로 서 있던 조승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식사까지 하기는 빠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 강도 높은 격무에 시달리는 김수현은 잠시라도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겸사겸사 세라프의 중간 세계 생활도 듣고 싶었고.
“죄송합니다.”
그러나 세라프는 차분한 태도로 품위 있게 거절했다.
“또? 또 안 돼?”
김수현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눈에 띄게 역력해졌다.
“그게…. 선약이 있는지라….”
“누구랑.”
“사용자 고연주의 초대입니다.”
“그거 안 가는 게 좋을걸?”
반쯤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으나 세라프는 정색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간다고 말도 해놨습니다.”
“클랜 로드. 시간이 좀 남았지만, 일찍 가서 나쁠 건 없습니다. 차라리 오늘 빠르게 마무리 지으시고 저녁을 여유롭게 보내시죠.”
조승우도 때맞춰 거들었다.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쉰 김수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이윽고 몸을 돌렸지만.
“가만 보면 너 요새 좀 이상하다.”
떠나기 전 한 마디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예?”
“네가 온 지…. 한 사 개월 되지 않았나?”
“그쯤 됐습니다.”
“한데 어째 소환의 방에 있을 때보다 보기 힘든 것 같아.”
“그게 아니라….”
“아무튼, 좋은 시간 보내. 그리고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혹시 압박 같은 게 있으면 바로 말해줘.”
뼈 있는 말이었다.
“참, 내가 먹자면 별 핑계 다 대가며 피하더니….”
투덜거리는 말투에 지그시 눈을 감은 세라프는 한 걸음 물러나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눈치 백 단인 조승우는.
“…….”
눈앞의 천사가 묘한 강박 관념에 사로잡혔음을 알아차렸다.
눈을 감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보다 김수현을 잘 알 거라고 생각했던 천사가, 정작 사내의 낯빛에 그늘진 언짢은 기색을 읽지 못한 듯했으니까.
*
김수현의 걱정과는 다르게, 세라프와 고연주네와의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주제는 김수현은 일 회차 때 어떤 사용자였나? 라는 모두가 궁금해하는 신선한 이야깃거리였다.
고연주는 게헨나를 받아들였을 때의 경험을 살려 나름 살갑게 굴었고, 세라프도 고연주, 김한별, 임한나, 정하연의 질문 공세에 시종일관 겸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중간에 임한나가 직접 만든 음식이 나왔는데, 세라프는 사양 않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줬다.
임한나라는 사용자가 남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는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을 수가 없네요. 오빠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니….”
“나도. 아, 진짜 웃겨 죽는 줄 알았네.”
그리하여 점점 시간이 흐르고 분위기도 무르익는 가운데, 이야기도 조금씩 과거에서 벗어나 조심스레 현재로 옮겨졌다.
“그러게. 덕분에 생각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네요.”
문득 고연주가 말문을 열었다.
“후후. 솔직히 저는 세라프가 그이를 따라 나왔을 때 계속 의심했거든요. 아, 우리가 천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거…. 이해하죠?”
“그저 송구할 뿐입니다.”
“됐어요. 사과 듣자고 한 말 아니니까. 그쪽도 어차피 중간 관리자 처지였을 테고…. 아주버님 말씀처럼 당신이 그네들과 다르다는 건 알고 있어요.”
“…….”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진지한 말투였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이 자리로 조금이지만 선입견이 벗겨진 느낌이에요.”
“…….”
“만약 당신이 지금처럼 분별 있는 처신을 보여준다면, 머잖아 다른 클랜원도 곱지 않은 시선을 거두리라 믿어요. …무슨 말인지, 알죠?”
“…….”
분별 있는 처신.
머셔너리 클랜의 안주인으로서 한 번쯤 해봄 직한 말이었다.
속으로 되뇐 천사는 고요히 수긍했다.
길고 길었던 자리가 끝난 것은 저녁을 훨씬 지나 땅거미가 듬성듬성 내려앉았을 때였다.
‘내일 아침도 같이 할래요?’ 라는 말을 듣고 홀로 돌아 나오는 세라프의 기분은 썩 괜찮았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림자 여왕의 호의였다.
김수현의 주변 인물 중 가장 영향력 강한 여인에게서 긍정적인 평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무려 사 개월 동안 조심하며 지냈던 결과가 이제야 빛을 보는 기분이었으니.
고연주의 말대로 곧 그날이 오면, 더 눈치 볼 필요도, 김수현의 관심을 애써 외면할 필요도 없어진다.
‘조금만, 조금만 더….’
세라프는 남몰래 기분 좋은 미소를 그리며 계단으로 걸음을 얹었다.
그때였다.
============================ 작품 후기 ============================
어째 로유진이라 불러주시는 독자 분이 몇 분 없으시네요….
그래요, 지금 실~컷 부르세요.
제가 생각하지 못한 단어들도 우후죽순으로 나오는데, 모조리 기록해서 금지어 목록에 업데이트 신청할 거예요.
그나저나 갑자기 xx미가 금지어에서 풀렸다는 말씀들이 있는데, 확인해보니 정말이네요.
내일 조아라에 항의해야겠어요.
아무튼, 제가 차마 독자 분들께 복수(?)할 수는 없고, 어쩌지 하다가 애꿎은 세라프만 굴리게 됩니다.
원래 달달하게 가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좀 굴려야겠어요.
세라프, 넌 김수현과 쉽게 맺어질 수 없을 거야…!
PS. 코멘트보고 확인해보니까 어워드 상이….
전 해당 사항이 없을 줄 알았는데 깜짝 놀랐네요. ^^;
투표해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