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142
슈아악!
정확한 횡격이었다.
비틀림 하나 없이 가로로 그어진 비수는 너무 간결하고 빨랐다.
“햐, 향아!”
능운비가 다급히 둘 사이를 막으려했지만, 향이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기에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완벽한 일격이었음에도 그녀의 비수는 독고성의 목을 베지 못했다.
정확히 노리고 그었지만, 상체를 슬쩍 뒤로 물린 독고성은 손을 뻗어 향이의 몸을 슬쩍 민 것만으로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이런 씨앙!”
하지만 그 행동이 더욱 화를 돋운 듯, 향이의 기세가 더욱 살기등등해졌다.
“향아! 멈춰!”
“싫어!”
“안 된다니까!”
“빌어먹을 노인네! 죽여 버릴 거야! 하마터면 니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잖아!”
“안 죽었으니까 됐어. 진정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내 자존심 문제야!”
“……”
바득바득 이를 갈며 독고성을 노려보는 향이의 앞을 가로막고 말리던 능운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말이냐?
결국 내 목숨보단 니 자존심이 더 중요하다는 소리잖아, 이 자식아.
“어쨌든 그만해. 화산의 제일 큰 어른이시라고.”
“그게 뭔 상관이야!”
“다짜고짜 검을 들이미는 것만으로도 마교와 정파 사이에 큰 분쟁이 생길수 있어.”
“나랑 상관없어!”
“야!
막으려 하는 능운비와 아랑곳하지않고 살기를 드러내는 향이.
그런데 둘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독고성이 일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야, 혹시 네 손에 있는 그 물건의 이름이 단척(斷刺)이 아니더냐?”
“……어?”
독고성의 물음에 화가 잔뜩 나 있던 향이가 별안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헛헛, 표정을 보니 맞는 모양이구나.”
“당신이 그 이름을 어떻게?”
“단척이 너의 손에 있다면, 필시 화영과 관련이 있는 아이겠구나.”
“어어?”
“화영과는 어찌 되는 사이더냐?”
화영이라는 이름에 향이의 눈이 더욱 커다래졌다.
꽤 놀란 것인지, 언제 화를 내었냐는듯 살기를 거두고 독고성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단척은 향이의 비수를 말함이 분명한데, 화영은 대체 누구지?
향이가 저리 놀라는 것을 보면…….
“저희 할머닐 아세요?”
“……”
하, 할머니라고!?
더욱이 향이의 저 공손한 태도와 말투는 뭐란 말인가?
심지어 독고성이 무척이나 친근한 듯 굴자, 주춤거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헛헛, 알다마다. 내 아주 깊은 인연이 있지.”
“저, 정말요?”
“그렇다마다. 헛헛, 이곳에서 그녀의 손녀를 만나게 될 줄이야. 이리 반가울 데가 있나.”
“……”
독고성이 직접 친분을 과시하자 향이가 눈을 끔벅거렸다. 어째 갑자기 태도가 확 움츠러든 느낌이었다.
“한데 화영의 손녀인 네가 어째서 담운천의 제자와 함께하고 있는 게냐? 움직임도 그렇고, 단척을 넘겨받았다면 화영의 진전을 이은 것이 분명한데.”
“아, 그게…… 지키려고……”
“지켜? 네가? 담운천의 제자를?”
“그게……”
“허, 화영이 그것을 허락했단 말이더냐?”
“그것이……”
급기야 말하는 것마저 머뭇거리며 식은땀을 흘리는 향이의 모습에 능운비의 의아함이 깊어졌다.
향이의 할머니라는 화영.
그래, 백 년이나 살아온 인물이니 독고성이 알 수도 있다 치자.
대충 들어 보니, 향이를 괴물로 길러낸 것은 그 할머니가 틀림 없었다.
한데 어째서 향이가 제 할머니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리 조심스러워하는거지?
와중에 그 눈빛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하지 않은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면서 죽일 듯하더니……대체 왜?
“담운천의 제자를 화영의 손녀가 지킨다라…… 이거야 원, 알다가도 모를 일이구나.”
“……”
“하긴, 세월이 그리 흘렀으니 마교에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던 것이겠지.”
독고성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능운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르신,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너는 모르는 모양이구나?”
“모르니까 묻는 것 아니겠습니까?”
“헛헛! 그렇단 말이지? 담운천이 설명해 주지 않았단 말이지?”
“……”
독고성은 그저 웃기만 하고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어르신.”
“뭘 자꾸 부르는 게냐?”
“알아듣기 쉽게 설명 좀 해 주시죠.”
능운비가 얼굴을 찌푸리자 독고성이 빙긋 웃었다.
“싫다.”
“예에?”
“내가 뭐 하러 네게 그걸 알려 준단말이냐?”
“……”
“또한 담운천이 네게 말하지 않았다면…… 필시 이유가 있을 터.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보거라.”
매몰찬 대답에 능운비가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괴팍스러운 노인네가!
아니, 그럼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나 말던가! 사람 궁금하게 시리…….
“아이야,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향입니다.
“향이라……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그래, 충산도 잘 있고?”
“조부님도 아세요?”
“알다마다. 내 한때 그들과 술도 자주마셨느니.”
“수, 술까지 마실 정도로 친하신 거예요?”
“당연한 것을…… 비록 가는 길은 달랐으나 뜻이 통하는 바가 있었기에 그리하였다.”
“혹시…….”
향이가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려 전음을 보내자, 독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들 논다.
당신이 그러고도 화산의 큰 어른이야? 쟤도 마굔데 왜 친한 척이야!
“……그, 그러셨군요. 할머니의 동지였던 분께 함부로 칼을 들이대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뜻이 같다 하여 모두가 동지는 아니니 괘념치 말거라.”
“……”
동지는 뭐고, 같은 뜻을 품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어느새 조손처럼 서로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니, 능운비는 답답해 죽을것만 같았다.
왠지 자신만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듯한 느낌이지 않은가?
“사부님!”
그리고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 청진이더냐?”
“예.”
막 나타난 것은 화산검선 청진과 진산이었다.
“능 공자! 몸은 괜찮소?”
“……예, 뭐.”
함께 온 진산이 만사를 제치고 능운비의 몸부터 살폈다.
“휴우, 참으로 다행이군. 운학이 바삐 달려와 전한 말에 내 얼마나 걱정을 했다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이었다.
안 그래도 노소(老少)에게 따돌림을 받던 중에 자신을 걱정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서.
“진산, 이 녀석. 나는 뵈지도 않는게냐?”
“아이구, 사숙. 제가 설마하니 사숙을 못 보았겠습니까? 능 공자가 객인지라 먼저 챙겼을 뿐입니다.”
“흥, 객은 무슨!
“……”
독고성이 짜증스럽게 눈을 흘기자 진산이 머쏙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별일이 없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운학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연화봉으로 올 줄 알았던 그가 별안간 하기원에 나타났고, 능운비와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길래 청진과 함께 헐레벌떡 쫓아온 참이었다.
뿐인가?
운학의 말로는 시비가 비수를 꺼내들고 살기등등하게 쫓아갔다고 했으니, 오는 내내 걱정을 거둘 길이 없었다.
혹여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혹여 독고성이 능운비를 죽이기라도 하면…….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선 마교와의 일전을 감당할 준비까지 끝나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능운비는 멀쩡했다.
어째 시비인 향이도 차분한 느낌이었고…….
“내가 집착을 부린 탓에 너희가 괜스레 고생을 하였구나.”
“아닙니다, 스승님.”
독고성의 말에 청진이 고개를 저었다.
진심이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스승이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으니까.
* * *
한때의 소란이 있고 난 뒤, 모두를 물리고 하기원에 모인 것은 독고성과 그 제자 청진, 그리고 그 제자인 운학이었다.
화산 내부의 일이기에 능운비와 진산은 잠시 밖에 물러나 있었다.
“청진아.”
“예, 스승님.”
독고성의 부름에 청진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의 나이가 이미 예순에 이르렀고 화산검선이라는 무명이 천하에 자자하나, 독고성의 앞에서는 언제까지나 제자일 뿐이었다.
“내, 이제 그만 잊기로 하였다.”
“예?”
“이미 지나간 것에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던 게야.”
“스, 스승님.”
독고성의 말에 청진의 노안에 눈물이 고였다.
그간에 걱정이 많았음이다. 그 모든 심란함이 한 번에 사라지는 듯했다.
“담운천의 제자가 그러더구나. 이미 진 매화를 굳이 다시 피울 필요가 있겠느냐고, 차라리 화산을 위해 거름이 되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구나. 당돌하게도 말이지.”
“……”
독고성의 말은 짓궂었으나, 청진의 눈동자에는 능운비에 대한 감사함이 가득했다.
산 아래 협곡에서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그 덕에 자신의 스승이 뜻을 돌리지 않았던가?
“능 공자에게 따로 감사를 표해야겠군요.”
“감사를? 그럴 필요는 없느니.”
“예?”
“내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과히 손을쓴 것에 대해 사과도 할 겸, 사십 년 면벽을 통해 얻은 심득을 보여주었다.”
“스승님의 심득을요?”
“오냐.”
“……감사의 표현치고는 과하셨습니다.”
“그리 생각하느냐?”
“당연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천금보다 귀한 것을……”
“천금은 무슨? 알아보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칼질일 뿐인 것을.”
“당치도 않습니다.”
“허허, 이놈아. 그 또한 쓸데없는 집착이다.”
“스승님.”
“물론 아직은 보았으되 행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는 담운천의 제자가 아니더냐? 언젠가는 오를 경지인 게다.”
“그래도 어찌 그 귀한 심득을……”
“괜찮다. 좋은 재목에게 전하였으니, 그로 인해 그가 바른길을 걷게 된다면 잘된 일이 아니겠느냐?”
“……”
“허허, 떡잎이 아주 그 속처럼 시커먼 마교 놈이라 그런지 겉이 아닌 속을 보았더구나. 나는 매화만을 보여 주었거늘, 그 아이는 매화가 피고 지는 것을 보았어.”
독고성의 말에 청진은 미소를 짓고말았다.
시커먼 떡잎.
그것이 어디 욕이겠는가?
마교의 떡잎에게 그만한 칭찬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비록 마교인임에도, 평생을 이기고자 염원했던 담운천의 제자임에도.
“그가 매화검의 진의를 본 모양이군요.”
“질투마저 생기더구나. 담운천 그자에게……. 담운천의 뒤를 이어 마교를 손에 쥐면, 천하가 꽤 시끌시끌해질 게 분명한 녀석이었다.”
“소문은 들었습니다. 진산이 입술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더군요.”
“허허, 진산이…… 그랬더냐?”
“예. 그 역시 스승님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낭중지추(囊中之錐)인 게지.”
“예.”
“하나 모나지 않았으니, 걷는 길에 피가 스미진 않을 듯하더구나.”
“……하나 경계해야 합니다.”
“안다.”
“무인으로서는 그 재능을 아껴야 할 것이나, 정파의 무인으로서는 그보다 무서운 재능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능운비라는 아이가 담운천만큼이나 강하여 힘이 넘치는 자들을 억누를 수 있다면 모를까…… 자칫 그 재능이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자라 중원을 노린다면, 분명 크나큰 재앙이 될 것입니다.”
“그러지 않기를 빌어야지.”
“저도 그리 믿습니다. 중원에 나온 능공자의 행보가 악하지 않았으니.”
“옳다. 하지만 대비는 해야 할 것이다.”
“예.”
“하여 나는 오늘부터 현천이라는 도명을 다시금 짊어지려 한다.”
“스, 스승님! 그게 참말이십니까? 이런 기쁜 일이!”
청진의 표정이 대번에 환해졌고, 눈빛에는 감격스러움마저 어렸다.
화산을 대표해 나섰음에도 담운천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도명을 버리고 파문을 자처했던 이였다.
그런 그가 다시 도명을 찾겠다는 것은 화산으로 돌아온다는 뜻이었다.
“너의 뜻을 이은 운학이 재능이 출중하다 들었다.”
“능 공자만큼이나 뛰어난 아이입니다.”
독고성의 시선이 운학에게 닿자 청진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흠, 내 보기에는한참 멀었다.”
“예?”
“부족하고 부족하다.”
독고성의 말에 청진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능운비와 비교하고 있음을 어찌 모를까?
“언젠가 저 아이가 화산을 짊어져야 한다면, 지금보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 나처럼 또다시 마교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더냐?”
“그렇긴 합니다만……”
“내 너를 도와 저 아이를 직접 가르칠 것이다. 내 모든 심득을 전해, 먼 미래를 대비코자 함이다.”
“……예? 스승님께서 직접이요?”
“암! 능운비라는 아이를 보았더니, 반드시 그리해야겠다는 결심이 서더구나. 내 비록 담운천에게 패했지만, 제자들만큼은 절대로 지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 말하는 독고성의 눈빛에 열의가 이글거리자, 청진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스승 현천.
그리고 그 제자였던 자신.
그에게 수련을 받았던 시절이 떠오르자 몸이 흠칫 떨렸다.
스승의 눈빛은 담운천에게 패한 뒤 화풀이라도 하듯 자신을 혹독하게 단련시키던 그때와 똑같았다.
그 덕에 검선의 이름을 얻긴 했지만…….
그 고통스러운 수련을…… 운학이 해야 한다고?
청진은 영문을 알지 못하고 눈만 끔벅이는 운학이…… 불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