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16
깊은 밤, 어둠이 내린다.
해가 들지 않는 그늘진 곳에 찾아든 어둠은 다른 곳보다 더욱 칙칙하다.
예전부터 그런 어둠을 참 좋아했다.
모습을 숨기기에 적합하고, 무엇보다 칼날이 스친 자리에서 쁨어진 피의 붉은색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역한 피비린내는 여전하지만, 어둠이 짙은 핏빛을 감추어 죄의식을 덜어 주는 듯했다.
목적을 위한 일이라고는 하나 수많은 이가 자신의 칼 아래 목숨을 잃었다.
피를 머금은 칼에 취해 걷는 동안에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어둠 속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또한 어둠을 걷는 일이 언젠가는 세상의 빛이 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에 밴 피 냄새가 짙어질 때마다 그리 믿었다.
그리하면 적어도 자신과 달리 밝은곳에서 든든히 버티던 ‘그분’께서 빛을 가져을 것이라 믿었기에.
그런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분께서 만들었을 희망찬 미래를 만나러 가고자 한다.
쉬이익!
“……?”
막 칙칙한 어둠을 밝히기 위해 홰에 불을 붙이던 무인, 화척은 난데없이 귀를 스치는 바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휘이이이.
“으휴, 추워.”
때마침 매섭게 분 찬 바람에 화척은 옷을 여미며 운비가 머무는 동굴 안을 바라보았다.
삼공자 능운비.
그에 대한 소문은 수도 없이 들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줄로만 알았으나, 이제 보니 그 재능이 발현될 수 있었던 것은 피나는 노력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벌써 며칠째 무공 수련에만 전념하다니.
아마 자신이었다면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진즉에 뛰쳐나왔을지도 모를일이다.
그래도 뭐가 됐든 좋다.
그는 설산장이 선택한 미래의 주인이 아니던가?
열심히 지킬 것이다.
자신이 맡은 직분은 그것이니까.
“그나저나 별일이네? 호위장께서 이리 늦으시다니.”
화척이 속으로 결의를 다지며 홰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을 매서운 눈으로 살폈다.
하나 그는 알지 못했다.
지켜야 할 대상인 능운비가 매서운 찬 바람 소리에 발소리를 감추고, 화척을 비롯한 설산장의 무인들이 형성한 호위망을 빠져나가고 있음을.
아니, 이미 한참이나 멀어졌다.
아마 그들의 수준으로는 능운비가 어찌 빠져나갔는지도 모를 것이다.
의기의 경지라서? 그럴 리가 있나.
바로 그가 되찾은 과거의 무공 중 하나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무음보(無音步). 실로 직관적인 이름이나. 그야말로 은신에 최적화된 보법이다.
내공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무게를 늘리는 천근추와 같은 중신(重身)의 무공이 있듯, 일시적으로 가볍게 만드는 경신(輕身)의 무공도 있다.
무음보는 경신의 기예였다. 소리뿐 아니라 흔적도 남지 않는다. 풀잎을 타고 달리면 초상비가 되고, 물 위를 달리면 등평도수가 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유지할 수는 없다.
무음보를 위해서는 내공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려야 하기에 순간적인 내공 소모량이 크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만으로도 방어선을 뚫기에는 충분하다.
봐라. 첫 번째 방어선을 뚫었음에도 눈치조차 못 채지 않는가?
이제 잠시 쉬어야 한다.
원래 도주라는 것이 그렇다. 무조건 달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내공과 체력의 소진을 신경 써야 하는 것이다.
특히 무음보는 한순간 엄청난 내공을 써야 하는 위험한 무공이었다.
지금 자신의 상태로 보자면 한 번 사용하면서 대략 일 할 정도의 내공을 소모했다. 그 정도면 한순간 목숨까지도 구할 수 있다.
첫 번째 호위망을 손쉽게 뚫어 낸 능운비는 적절한 장소를 골라 몸을 숨겼다. 그리고 주위를 살펴 안전함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에야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길게도 필요 없다. 소모된 내공만 채우면 그만이다.
“후우……”
내뱉은 숨, 들이쉰 숨.
지금 그가 사용하는 것은 과거의 자신이 익혔던 심법이 아니라 능운비가 익힌 심법이었다. 이미 단전이 그것으로 구성되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와중에 마령신단이라는 어마어마한 영단으로 차고 넘치는 내공을 얻었는데, 굳이 딴 걸 쓸 필요가 없기도 했다.
마공이든 사공이든, 있는 것을 최대한 잘 활용하는 주의다.
잠시 후, 운기에서 깨어난 능운비의 눈동자가 마기로 번들거렸다. 꽉 쥔 주먹에서는 힘이 넘쳐흘렀다.
“좋아, 충전 완료.”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능운비가 어둠 속에서도 능숙하게 흔적을 지우고 다시 몸을 날렸다.
천산을 벗어나기 전까진 계속해서 반복해야 했다.
뛰고 채우고, 뛰고 채우고를…….
* * *
“그게 무슨 소리냐? 삼공자께서 수련장 밖으로 나와 호위망 속을 돌아다니신다고?”
“그렇습니다. 호위망을 이끄는 흑표기(黑豹旗)의 대주 주승이 어찌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 달라 전서구를 보내왔습니다.”
“음……”
설산장의 외당을 담당하는 공형우의 보고에 선화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설화장은 다섯 개의 무인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각각 황, 청, 백, 적, 흑. 서로 다른색으로 그려진 표범기를 신물로 삼는 그들.
선화연은 그중 셋을 능운비가 머무는 동굴 주위에 깔아 두었다. 삼공자를 호위하자면 그 정돈 되어야 한다며 왕천이 핏대까지 세우며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 좁은 공간 안에 대략 일천명 정도가 오밀조밀하게 배치되었다.
한데 왜?
수련하신다며 돌아간 삼공자가 어찌 호위망 안을 배회하고 있단 말인가?
“거참……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겐지.”
선화연이 한 손으로 머리를 관 채 물었다.
“그래, 어찌하고 계신다던가?”
“그게 막 달리다가 운기를 하시고, 또 막 달리다가 운기를 하시고……”
“응?”
“한데 경공의 수준이 엄청나답니다.”
“엄청나?”
“예. 언뜻 답설무흔(踏雪無痕)이 아닌지 의심이 된다는 얘기도 적혀 있었습니다.”
“응? 답설…… 뭐?”
“답설무흔요. 그 막 눈 위로 달려도 발자국 하나 남지 않는다는 그런 전설적인 경공요.”
“……”
선화연이 잠시 말을 멈추고 지도 위에 능운비의 이동로를 표시하는 공형우를 빤히 쳐 다보았다.
내가 답설무흔이 뭔 뜻인지를 몰라서 물었겠어?
말이 안 되잖아. 이제 막 의기에 오른 사람이 고작 몇 시진 만에 강기에 올라선 것도 아니고, 답설무흔이라니?
선화연의 눈빛에서 황당함을 느낀 것인지 공형우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주승이 거짓말할 리는 없죠.”
“……하긴, 그건 그렇지.”
흑표기는 다섯 중 가장 강한 무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주인 주승은 그들 중에서도 최고다. 왕천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그가 틀린 말을 할 리는 없다. 즉, 답설무흔까진 아니어도 능운비의 경공술이 가히 엄청나다는 뜻인데…….
“그런데…… 삼공자님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답니다.”
“이상해? 답설무흔을 펼치는 것보다?”
“예. 호위망을 만날 때마다 갑자기 은신을 하며 움직이시는 게……”
“은신?”
“예. 정말 감쪽같다며 주승이 전서구에 놀람을 동봉하였습니다.”
“……”
공형우가 제 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선화연에게 전서의 원본을 내밀었다.
작은 쪽지에 적힌 깨알 같은 글씨.
이래서 놀랍고, 저래서 놀랍고. 아주 구구절절 놀란 내용투성이다.
대부분 삼공자가 대단하다는 칭찬 일색이나, 그것만으론 도무지 삼공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홈, 대체 왜지?”
“그러니까요. 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주승도 혹시 몰라서 삼공자께서 눈치채시지 못하도록 몇몇만 데리고 뒤쫓고 있답니다.”
“흠……”
설마하니 그가 도주하는 중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선화연과 공형우가 고심에 빠져 있던 그때.
“어머님, 천입니다.”
“천이?”
왕천이다.
삼공자를 호위하고 있어야 할 그는 또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들어오너라.”
“예.”
안으로 들어온 왕천은 직사각형의 나무 상자를 들고 있었다.
“삼공자님 곁을 비우고 어찌 여길 왔나 했더니, 검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예. 수련 중에 투박한 철검을 쓰시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비고를 좀 뒤져 보았습니다.”
“아, 그랬구나. 잘하였다.”
왕천의 답에 선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허락을 받으러 온 것이리라.
상자에 담긴 것이 보통의 물건은 아니라는 소리다.
“무엇이더냐?”
선화연의 물음에 왕천이 답 대신 빙긋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딸깍.
열린 상자 안에는 강보에 싸인 아기처럼 소중하게 놓인 검한 자루가 보였다.
“비연?”
“예.”
의외라는 듯 선화연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그럴 만했다.
비연검(飛燕劍). 휘둘러지는 모양이 마치 공기를 타고 나는 세찬 제비처럼 날렵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어찌 그것이냐? 삼공자께서 쾌검을 익히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는데?”
“아, 실은 저도 그리 생각했는데……”
왕천은 자신이 보았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마치 공기의 저항을 받지 않는 듯 자연스럽게 흐르던 그것. 단숨에 열두 개의 햇불을 꺼트린 쾌속의 경공.
“그 정도라고?”
“예 너무 빨라 제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허!”
왕천의 평가에 선화연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왕천이 그리 말한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다.
하면? 설마 자신이 능운비의 실력을 다 보지도 못했던 것인가?
“어!? 잠시만요, 가모님.”
“……?”
옆에서 듣고 있던 공형우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무릎을 탁 치며 놀랐다.
“혹시 지금 삼공자님께서…… 수련중이신 건 아닐까요?”
“으응? 게 무슨 소린가?”
“호위장의 말을 들으니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
“생각해 보십시오. 수련할 시간이 없다고 술자리마저 거절하신 분이 아닙니까?”
“음, 그랬지.”
“내일 돌아간다고 하니 촉박하다 느끼신 게 분명합니다.”
“촉박해?”
“예. 삼공자님께선 아마 돌아가기 전 단번에 실력을 향상시킬 방법을 선택하신 겁니다.”
“단번에?”
“예. 가모님도 아시다시피 어찌 무공의 성취를 혼자만의 수련으로 얻겠습니까?”
“그러니까 자네 말은, 삼공자께서 호위망을 상대로 잡았다?”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공형우의 말을 들어 보니 일리가 있다.
하긴, 지금 그에게 호위망보다 뛰어난 상대가 어디 있단 말인가?
겹겹이 구성된 호위망을 뚫으며, 왕천이 보았다는 그 경공을 연습하는 중인 것이다.
한 번에 열두 개의 햇불을 꺼 버릴만큼 빠른 경공이라 했으니, 가히 답설무흔 같다 표현한 주승의 말도 이해가 되었다.
“이거 원! 내 삼공자님의 의도를 이제야 깨닫다니! 그래 맞아. 촉박해지신게지. 돌아가서는 지금처럼 수련치 못할 테니까 말이야.”
“아무렴요!”
잘하면 손백까지 쳐 댈 것 같은 둘의 대화에 왕천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누가 뭘 어쩌고 있다고?
“이런, 하면 어찌할까? 삼공자님께서 그리 열심히 하신다면 내 어떻게든 수련에 도움을 드려야 할 것인데…….”
선화연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공형우가 이내 기막힌 생각을 떠올렸다는 듯 자랑스럽게 말했다.
“수준을 좀 높여 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수준을 높인다?”
“예.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응수해드리는 겁니다.”
“그거 좋구만! 자네의 생각이 내 생각일세. 서둘러 가서 명을 전하시게.”
“예, 가모님!”
명을 받은 공형우가 신이 잔뜩 난 표정으로 뛰쳐나갔다.
오해가 깊어진다.
하기야, 원래 상황이라는 것이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른 법 아니던가.
능운비에 대한 그들의 호감이 도주마저 아름답게 보고 있었다.
물론, 진실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능운비의 행적이 표시된 지도를 빤히 바라보던 왕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어머님?”
“응?”
“혹시, 지금 주군께서 탈출을 감행하신 건가요?”
“탈출이라니? 수련하시는 게지. 우리 설산장의 무인들을 대상으로.”
“……그런데 왜?”
선화연이 얼굴 가득히 웃음을 머금고 말했지만, 왕천은 못내 의아했다.
능운비가 달리는 경로가…… 어째 마교의 북쪽 경계와 맞닿은 계곡으로 향하는 것이…… 뭔가 쎄한데?
* * *
이상했다.
뭐지? 이 갑갑함은?
걸리지 않으려 오감을 집중한 채 이동 중이라 작은 발소리에도 귀를 쫑긋세우게 된다.
그런데 무언가 달라졌다.
수준이 낮아 멀리까지 읽을 수는 없었다. 아니, 멀리도 필요 없다. 자신의 주위만으로 충분했다.
앞에서 느껴지는 인원의 밀집도가 대폭 늘어났다. 와중에 대기가 몇 배 이상으로 무거워진 것처럼 몸을 짓눌러 온다.
호위망이 촘촘해진 것이다.
젠장, 마교 놈들이 빠르기도 빠르지.
벌써 자신의 도주를 눈치챘단 말인가?
하면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심지어 점점 더 수가 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곧 지금까지 뚫고 온 호위놈들까지 제 뒤를 쫓을 것이다.
그리되면?
……도망갈 기회는 없다.
“……”
곧 계곡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호위망 좀 촘촘해졌다고 돌아갈 순 없는 일 아니겠는가?
멀리 어둠 속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능운비가 이를 악다문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씨발, 이렇게 되면! 그냥 뚫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