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178
능운비는 오직 한 가지만 보고 달렸다.
자신을 앞서 달리며 길을 안내하는 향이의 뒷모습을.
다른 걸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소림 쪽은 정화가 잘 막아 주고 있을 테니까.
능운비는 정화를 생각하며 씩 웃었다.
* * *
“예? 면벽이요?”
“어? 어어……”
공문의 말에 정화가 어물쩍 대답했다.
“아니, 갑자기 웬 면벽입니까?”
“……나야 모르지.”
“몰라요? 능 시주가 면벽하러 들어간 굴 앞을 이리 떡하니 지키고 계시면서요?”
“아, 그게…… 능 시주의 안전을 위해서랄까?”
“안전이요?”
“그게…… 아, 그래. 너도 이미 보지않았더냐? 아이들이 마교라는 이유로 그를 어찌 여기는지.”
“그야……”
“또 무슨 이유를 들어 능 시주를 귀찮게 할지 모르지. 그러니 나는 괜한 분란을 막으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이곳에 접근할 수 없도록.”
정화의 말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황당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마교 제자가 소림에서 면벽이라니?
대관절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란 말인가?
그것도 고작 삼 일, 구룡쟁투가 시작 될 때까지만 하겠다고?
“허……”
공문으로선 어이가 없을 뿐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스승이 그렇다는데.
더욱이 지금껏 정화가 말도 안 되는짓을 좀 많이 했던가?
“알겠습니다. 그럼 호위는 제가 할테니, 스승님께선 그만 돌아가 쉬십시오.”
“응? 니가?”
“예.”
“……”
공문을 빤히 쳐다보던 정화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예?”
“내가 부탁받은 일을 어찌 너에게 시킨단 말이냐? 내 일은 내가 해야지.”
“……”
그 말에 공문의 양쪽 눈썹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했다.
그런 분께서…… 자신의 빨래 한 번을 안 하셨나요?
그간 온갖 귀찮고 잡스러운 일을 다 자신에게 떠넘겨 놓곤…….
“벽곡단도 직접 챙겨 주시게요?”
“어……”
“식수도요?”
“음.”
“그럼, 그때마다 자리를 비우시게요?”
“아!”
“내 참, 면벽하는 이의 뒷수발을 어찌 드는지도 모르시면서……. 그만 내려가세요. 제가 할 테니까.”
“안 돼! 이건 내 일이야! 벽곡단이며 식수는 니가 나한테 가져다주면 될 것 아니냐!”
“……”
별안간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살짝 놀란 공문이 의아한 표정으로 정화를 쳐다봤다.
하지만 어찌 사실대로 말할까?
저 굴 안에는 아무도 없다고.
그래서 반드시 내가 지키고 있어야만한다고…….
쓸데없이 부탁을 들어준다고 약속했다가 괜히 망어계(妄語戒: 거짓말을 금함)만 어기게 생긴 정화였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하아, 알겠습니다. 스승님 고집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귀찮은 건 질색이라며 방장 자리까지 내친 정화가 아니었던가.
“한데, 그 향이라는 시비는 어디 갔습니까?”
“어?”
“나가는 걸 보지 못해서요.”
“그게…… 같이 들어갔다. 면벽한다고.”
“예에?”
정화의 말에 공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같이 들어갔어요? 젊은 남녀가? 저 작은 굴에요?”
“……”
“스승님! 대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신성한 불문의 전당에서…… 그…… 그…… 그……”
공문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자, 정화가 그의 머리를 냅다 쥐어박았다.
“예끼, 이놈!”
“악!”
“생각하는 게 그냥 눈깔에 선하다, 선해. 이놈이 아주 음란 마귀가 단단히 씌었구나. 둘이 굴에 있으면 뭐? 뭔 일이라도 날까봐?”
“제자는 그저…… 혹시나……”
“닥치거라, 이놈! 부처님께서 네 마음속에 항시 계시거늘!”
“……”
“그런 생각만으로 음욕계(淫慾戒)를 어긴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명색이 십계승이라는 놈이, 쯧쯧.”
정화의 꾸지람에 공문이 입을 댓 발이나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러는 본인은…….
맨날 술 먹고 고기 먹어서 장문인께 혼나시면서.
그리고 자신은 그런 정화의 제자였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소리다.
“너야말로 그만 내려가거라. 이곳은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예……”
“아, 내일 아침 조반을 가져올때 푹신한 것 좀 하나 챙겨와라.”
“예?”
“오랜만에 맨바닥에 앉아 있으려니 엉덩이가 배겨서.”
“……”
공문이 초점 없는 눈으로 정화를 쳐다봤다.
저기, 소림 최고수 아니셨어요?
소림칠십이예의 단련을 모조리 통과하신 터라 다들 금강불괴를 이룰지도 모른다고 말하는데…… 엉덩이가 배긴다고요?
“빨리 안 가냐? 오랜만에 푸닥거리 한번 할까?”
“……가, 갑니다! 가요!”
정화가 끝내 주먹을 들어 올리자 멀뚱히 쳐다보던 공문이 쏜살처럼 내뺐다.
“하아…… 제자라고 하나 있는 게 나이를 먹더니만 이젠 말도 안 들어 처먹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정화가 굴을 힐끗 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삼 일이면 됩니다. 아무도 제 행적을 모르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사께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능운비는 그리 말하고 시비와 함께 소림을 떠났다.
“아미타불…… 대체 무슨 일이기에……”
자신을 바라보던 능운비의 눈동자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가득했다.
그리움, 격정, 조바심…….
“후우, 설마 별일이야 없겠지?”
하지만 내내 안심이 되지 않았던 정화는 밤새 불경을 암송해야만 했다.
* * *
“힘들어?”
“어?”
“조금 천천히 갈까?”
“……”
속도를 줄여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향이의 말에 능운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좀더 속도를 올리자.”
“괜찮겠어? 자꾸만 뒤처지던데? 힘들면 쉬었다 가고.”
“쉬긴!”
능운비가 보란 듯이 삼무보를 펼쳐 향이를 앞질렀다.
“큭, 자존심은……. 야! 같이 가!”
향이가 피식 웃고는 속도를 높여 능운비를 뒤쫓았다.
하지만 한번 벌어진 거리는 쉽게 좁혀 지지 않았다. 능운비가 삼무보를 극성으로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 달리면 내공 소모가 심할 테지만, 무슨 상관인가?
오늘 밤, 어쩌면 ‘그분’을 만나 뵙게 될지도 모른다.
삶의 전부였던 그.
그를 빼고서는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능운비였다.
덕분에 정화는 곤욕을 치르고 있겠지.
자신의 꾀에 속아 등봉현에 머무는 왕천과 삭월대가 실망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분을 만나는 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만 생각할 것이다.
좀 더 빨리!
내공을 완전히 쏟아부어서라도!
그러지 않으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이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파앙!
“……저게!”
능운비가 달리던 속도를 더욱 증폭시켜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자, 향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언제 저렇게 빨라졌지?
이젠 자신이 뒤쫓기에도 벅차지 않은가?
그런데…… 길은 알고 가는 건가?
“에이씨, 진짜…… 쓸데없이 힘쓰기 싫은데.”
투덜거림도 잠시, 이내 향이의 눈동자가 하얗게 물들었고, 내디딘 발이 땅을 힘껏 짓밟았다.
꾸우우…….
가볍기만 했던 이전과 달리 대지를 무겁게 짓누르는 일보, 뇌동(雷動).
콰아앙!
발이 떼어지는 순간, 땅바닥이 폭발하며 향이의 신형이 지상을 향해 내리치는 한줄기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둘은 마치 서로 경쟁하듯이 엎치락 뒤치락하며 달렸고, 밤이 완전히 깊기도 전에 정무맹이 위치한 정주 외곽에 도착했다.
“헉, 헉……”
도심에서 떨어진 외곽의 숲.
거친 숨을 몰아쉬던 향이가 손가락을 곧게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야.”
“헥, 헥…….”
향이의 손가락 끝을 좇아간 능운비의 시선에, 불이 환하게 켜진 장원이 보였다.
정무맹 장로, 황병찬의 장원이었다.
“지키는 놈들은 얼마 안 돼. 대략 서른 명쯤 되어 보이더라. 쓸 만하다고 할 정도의 놈은 한둘?”
“응.”
그 정도면 잠입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다.
“근데, 황병찬은 아직 퇴청하기 전인가 본데?”
“응?”
“저기 저 전각이 황병찬의 침소였어. 앞에 지키는 놈들이 없는 걸 보면……”
“잘됐네. 일단 숨 고르면서 운기부터 좀 하자.”
“……”
능운비의 말에 향이가 피식 웃었다.
“그래, 너 먼저 운기해. 내가 호법을 서 줄게.”
“좋아.”
능운비는 마다하지 않고 곧바로 좌정하며 눈을 감았다.
내력은 거의 고갈되었고, 다리 근육은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능운비가 운기를 시작하는 모습을 쳐다보던 향이가 피식 웃으며 근처 나무에 몸을 기댔다.
하긴, 엄청난 속도였다.
전력을 다한 자신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도착하지 않았던가?
그동안 몇 번이나 보아 온 그의 보법은 내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켜 사용하는 것이었다. 짧은 순간 자신조차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를 내지만, 내력 소모가 너무 크다.
말하자면, 장거리를 이동할 때 적합한 보법은 아니었다.
그래도 정말 대단하다. 자신의 눈에는 코흘리개 꼬마 같았던 그가 언제 이렇게까지 성장했단 말인가?
“중원으로 나온 후……”
아마도 그때부터 였던 것 같다.
능운비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흠, 대층 내가 조언해 준 이후부터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놀랍다. 고수의 조언은 언제나 많은 것을 깨닫게 하는 법이라지만, 성장하는 것은 오로지 받아들이는 이의 몫이니까.
청각을 초월하는 방법, 그리고 수련을 위한 비무.
자신이 그에게 해 준 것은 그게 다였다.
그 뒤부턴 스스로 방법을 찾아서 촉각을 초월했고, 이어 위강까지 이루어버렸다.
“이대로면…… 강기도 금방이겠네.”
정말 괴물 같은 성장 속도였다.
의기에서 위강으로, 그리고 다시 강기를 깨닫기까지 불과 일 년이 조금 더 걸렸다는 게 말이 되나?
그의 재능이 어릴 때부터 특출났다고 듣긴 했지만…….
심지어, 옆에서 지켜보니 능운비의 진짜 재능은 다른 것이었다.
무공에 대한 갈망, 그리고 힘들어도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끈기.
무엇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줄알았다.
본인이 알고 그리 행동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성의 설산장이 그랬고, 중원의 지부들이 그랬다.
뿐인가?
지부들과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진산과 청진, 독고성, 맹주에 소림까지.
마교라면 고개부터 돌리던 이들이 그에게만큼은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정말이지 재미있는 놈이란 말이야. 하긴, 그러니 교주가 그를 후계로 점찍은 것이겠지.”
향이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하지만 무슨 생각 때문인지, 이내 그녀의 눈빛이 우울해졌다.
우리도…… 섞일수 있을까?
오랫동안 원수처럼 반목해 온 마교와…….
그럼 자신도 더 이상 비수를 들지 않아도 될 텐데.
다른 여인들처럼 치장도 하고, 저잣거리에 파는 장신구나 구경하며 진심으로 해맑게 웃을 수도 있을 터인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능운비라는 인물이 그리 만들어 줄 것만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러니까…… 넌 반드시 교주가 되어야 해.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고 말겠어. 물론…… 나중에 교주가 된 너를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향이가 씁쓸하게 웃던 그때.
“뭐?”
운기를 끝낸 능운비가 내력을 갈무리하며 일어났다.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어?”
“아니, 아무 말도안했는데?”
“그래? 잘못 들었나?”
“그런데 벌써 끝났어? 내력을 전부 회복한 거야?”
“반쯤? 뭐, 잠입하는 거니까 그 정도로 괜찮을 거야. 어쨌든 이제 네가 해. 내가 호법을 설 테니까.”
“어? 어어……”
향이가 풀썩 주저 앉아 눈을 감았다.
이내 운기에 들어간 그녀의 모습을, 능운비가 떨떠름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뭐지, 이 녀석?
왜 이렇게 당황하는 거야?
설마……내 욕이라도 하고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