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296
데워진 찻물이 잔에 따라지는 동안, 현현자는 말없이 능운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
“의아하여 그러오.”
“무엇이 의아하십니까?”
“여느 마교도와는 다른 듯하여.”
그 말에 능운비가 피식 웃었다.
“여느 마교라…… 그럴 수밖에요. 저는 마교의 교주가 아니라 일월신교의 교주로서 찾아온 것입니다.”
“허허, 이름이 바뀌었다 한들 지나온 시간 동안 쌓인 앙금이 어찌 사라지겠소?”
“이해합니다. 곤륜에는 아직도 위패조차 모시지 못한 선대들이 가득할 테니까요.”
능운비의 말에 현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와 가장 오랜 시간 대척해 온 문파가 바로 곤륜이었다. 마교가 중원 정벌을 꿈꿀 때마다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이 그들이었기에, 중원의 누구보다 큰 피해를 떠안아야 했다.
그렇게 죽어 간 동문들의 시신이 어디 곤륜이 자리 잡은 땅에만 있겠는가?
멀리 경계 너머 마교의 들판에도 동문들의 시신이 가득했다.
이미 그 육신은 썩어 땅에 스미었을것이나, 넋은 남아 있을 터. 매년 위령제를 지내 그들을 위로해 온 곤륜으로서는 마교에 대한 원한이 누구보다 클수밖에 없었다.
뿐인가?
무공의 특성상 마성에 지배당해 이지를 잃고 떠도는 자들이 많았다.
그런 이들은 대개 청해로 넘어와 난동을 부리곤 했으니, 곤륜의 고충이 어찌 이해되지 않을까?
능운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비록 제 선대의 일들이나, 대신하여 곤륜에 사과를 드리는 바입니다. 만약 곤륜이 수습지 못한 시신들을 이유로 마교의 땅에 오겠다 하시면, 허락하라 할것입니다.”
“헛헛, 감사한 일이오. 하나 사과를 받는다 하여 사라질 일이 아님을 아시리라 믿소.”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현현자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비록 공식적인 경로를 통한 것은 아니나, 능운비는 마교의 수장이다. 그의 사과는 분명 큰 의미를 지닐 것이다.
하지만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왠지 그가 나누러 왔다는 대화가 몹시도 불안했다.
그 많은 이들을 이끌고 경계를 넘었으니, 그 뜻이 천하에 미칠 것은 자명한 일인 것을…….
“교주.”
“말씀하십시오.”
“이제 그만 나를 찾아온 뜻을 밝히시는 것이 어떻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말이었지만, 능운비는 고민 하나 없이 답했다.
이미 뜻한 바가 확실했고, 전할 말 또한 정해 두고 온 걸음이 아니던가?
“봉문하십시오.”
“……뭐, 뭐라? 봉문?”
“예.”
“그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이오!”
대뜸 봉문을 하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기에 현현자의 얼굴에 노기가 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현자가 감정을 추스르기를 기다린 능운비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장문인.”
“……말씀하시오.”
“저에 대해 아시지요?”
알다 뿐인가?
그가 중원에서 벌인 일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 시기에 중원이 그리 격동했던 적이 또 있었겠는가.
“정무맹 전복 음모.”
“……”
“그리 알려졌지요.”
“으음.”
“어찌 보십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요?”
현현자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정무맹주 이옥상에게 죄가 있다 보십니까?”
능운비의 질문은 직설적이었고 날카로웠다. 마치 변초 없이 실초만으로 곧게 찔러 오는 것만 같았다.
“또한, 소림과 화산에 죄가 있다 보십니까? 종남은 또 어떠합니까?”
“교주……”
“장문인, 정녕 모두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십니까?”
현현자는 차마 답하지 못했다.
저자에 그에 대한 말들이 나돈 지 오래되었으나, 속인들의 말일뿐이었다.
물론 그 역시 외부로 드러난 것 이외에 속사정이 있음을 의심하였으나, 산정의 도인이 무에 그리 관심을 가졌겠는가?
도인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아 왈가왈부하지 않는 법이었다.
“나는 도사요.”
“압니다.”
“속세의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소.”
“하나 지키려 하시는군요.”
능운비가 피난길에 올랐다 돌아오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 칼끝은 그릇된 자들을 향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 한들, 교주가 가는 길에는 그릇되지 않은 자들이 훨씬 더 많소.”
“압니다. 곤륜은 언제나 그를 위해 싸워 왔다는 것 또한. 해서 이리 찾아와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
“만약 곤륜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제 청을 귀하게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교주! 아무리 그렇다 한들 개인적인 은원을 핑계로 전쟁이라니요!”
“그리 보십니까?”
미소를 머금은 능운비가 현현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찬찬히 말했다.
“장문인, 저는 일월신교의 십오 대 교주입니다.”
“……”
“저의 뜻은 곧 신교의 뜻이고, 저의 걸음은 곧 신교의 걸음입니다. 하니 제 은원 또한 신교의 은원과 같은 것입니다.”
“교주!”
“또한!”
“……”
“이미 뒤돌아 걷기에는 늦었습니다. 뒤돌아 걸을 생각도 없습니다. 곤륜에 닿은 순간 이미 천하를 향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니, 저는 따르는 이들에게 족적을 보여 주어야 함입니다.”
“무량수불……”
확고함이 가득한 능운비의 목소리에 현현자가 굳은 얼굴로 눈을 질끈 감은채 도호를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흐르는 물결의 수면처럼 잔잔했으나, 그 안에 담긴 뜻은 거칠기만한 위협이었다.
족적을 보인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그는 지금 곤륜에 두 가지 선택지를 내민 것이나 다름없었다.
봉문을 하든가, 그의 걸음에 짓눌려 으스러지든가.
“허어……”
어느 것도 쉬이 답할 수 없었기에 현현자는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쪼르륵.
그러나 정작 능운비는 태연히 찻잔을 채웠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향을 음미하며 은은한 미소까지 머금었다.
마치 이미 곤륜의 끝자락을 아는 사람 같았다. 둘 중 어떤 선택도 자신의 걸음을 막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듯했다.
“후우, 귀하는 참으로 오만하구려.”
“제 스승은 그리하라 가르치시더군요.”
“……”
“제게 권좌를 넘겨주시며, 큰 산을 이루고 굽어보는 자리라 하셨습니다.”
“나는 이리 홀로 찾아와 곤륜을 겁박하는 그대에게 어떤 답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
복잡한 심경이 가득한 현현자의 말에 능운비는 그저 웃기만 했다.
“비록 그대의 오만함이 무척 합당하다 하나, 이곳에 마교, 아니 신교인은 교주 한 사람뿐이오.”
“압니다.”
“나는 곤륜의 장문인으로서 당장에 제자들에게 살계를 열어 그대를 척살하라 명할수있소.”
“그 또한 압니다.”
“어떤 이도 나의 결정을 손가락질하지 않을 것이오. 되레 마두의 목을 베었다 칭찬할 것이오.”
“그리하겠지요. 마교의 발호를 막은 일로 곤륜은 칭송받을 것입니다.”
“한데 나를 찾아와 곤륜에 봉문을 명하시니…… 무량수불.”
현현자의 말에 능운비가 웃음기를 거두고 입가에 머물렀던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장문인.”
“……”
“저는 강합니다.”
단 한마디였다.
그리고 현현자는, 감히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 알고 있소. 느껴지오. 그대의 강함도, 그대의 자신감도.”
“……”
“하여 나는 더욱 고민이 되오. 과연 지금 내가 내릴 결정이 옳은것일지.”
“말씀드렸듯, 제 칼끝은 오직 그릇된 자들에게만 향할 것입니다.”
“그 또한 알고 있소. 하나 곤륜을 바라보는 이들은 그리 여기지 않을 것이오.”
현현자가 심중 깊은 곳에 있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속세를 떠난 몸이나 속세에 매여 있기도 하오.”
“……”
“그대의 행보가 옳다고 한들, 내 마음이 가는 결정은 곤륜을 욕보이게 될것이오”
그 말에 능운비는 그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결정은 곤륜을 살리는 것이나, 또한 곤륜의 역사에 누를 끼치는 것이요.”
기록될 것이다.
곤륜이 마교에게 길을 내어 주었다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곤륜이 막지 않았기에 중원이 마교에게 짓밟혔다고.
하나, 그 또한 이미 생각을 정하고 온 걸음이었다.
“장문인.”
“말씀하시오.”
“제가 고민을 덜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고민을 덜어 준다?”
“예, 그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못하도록.”
“그게 무슨……?”
현현자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능운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물러나며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공손히 두 손을 모아 포권했다.
“일월신교의 교주 능운비가 천지에 고하는 바요. 만약 홀로 곤륜을 넘지못한다면, 치세 이래 마교가 다시 중원을 넘는 일은 없을 것이오!”
“……!”
사방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우렁찬 목소리에 현현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게 무슨?
하지만 이미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들어 버렸다.
곤륜의 제자들도, 곤륜의 제자가 아닌자들도.
그 순간 현현자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안다.
그가 이리 직접 찾아올 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면 그를 따르는 이들의 걸음이 곤륜을 향했을 것이다.
곤륜의 자부심이 높다 한들 마음만으로 어찌 마교의 강대한 힘을 막을 수 있겠는가?
도관은 불타고, 제자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마교와 싸운 곤륜의 이름은 대대로 지켜졌을 것이나, 이름을 이어가는 이는 사라졌을 것이다.
결국은 허명만이 남아 세인들의 귓가에 맴돌았을 것이다.
하나 능운비는 자신을 찾아와 대화를 청했다. 곤륜에 단신으로 도전함을 모두가 알게 했다.
그의 외침을 들은 모두가 증인이니, 곧 저자의 소문을 타고 천하의 모든 곳에 퍼트려질 것이다.
일월신교의 교주와 곤륜의 싸움.
승부가 어찌 결론지어지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곤륜이 마도의 준동을 막으려 최선을 다했다고…….
“허!”
현현자는 왠지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곤륜을 배려해 준 그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그 마음을 알면서도 자신은 그를 막을수밖에 없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능운비를 가만히 바라보던 현현자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곤륜이 교주의 도전을 받아들이는바요.”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능운비는 그저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움에 사무친 현현자가 무거운 마음을 떨치고 한마디를 더했다. 그의 걸음을 그저 보내 줄 수는 없으니 막아야 하나, 그가 보여 준 배려에 대한 고마움은 표해야 했다.
“교주.”
“예.”
“곤륜은 오늘 이후로 지난 시간 동안 마교와 쌓았던 은원을 더는 거론치 않을 것이오. 이는 승부를 떠나 그대가 보여 준 배려에 대한 곤륜의 답이라오. 또한 당대의 장문인으로서 전하는 곤륜의 진심이오.”
현현자의 말에 능운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맑게 미소를 지었다.
하나 이제 결론을 지어야 했다.
능운비가 마을에서 벗어나 자리를 잡자, 현현자가 사심 하나 담기지 않은 웅혼한 목소리로 외쳤다.
“곤륜의 제자들은 지금 즉시 운롱대팔식을 펼쳐라!”
그리고 그날, 곤륜산 아래 청음현에서 벌어진 싸움에 관한 소문이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갔다.
운룡은 강건했으나, 일월의 힘 앞에는 무용지물이었다고.
또한, 이후 곤륜이 봉문을 선언했다는 이야기는 중원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