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such thing as a war in France RAW novel - Chapter 306
#306화. 위키(마지막 화)
딸깍.
[베르게르 모헬] [공식 초상화]목차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명언
7. 기타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 통칭 모헬 원수.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장군이다.
23대 모헬 가(家)의 가주이자 유일한 직계로, 살아남은 모헬의 선조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의 주역으로 활동한 베르게르 모헬은 베를린 공세 당시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의 군대를 지휘한 기록을 세웠다.
후대에 와서는 꽤나 도박적인 수도 두었다는 점이 밝혀졌지만 20세기 말까지 전 세계는 모헬 원수의 무한한 확신과 맞서길 두려워했다.
여러 업적이 있으나 대통령에 오르고 나서도 원수라는 칭호로 가장 많이 불렸던 점을 생각하면 군인으로서의 업적이 제일 크다고 평가받는다.
모헬은 14세에 마차 사고로 부모를 잃고 프레드릭 다비드 변호사와 함께 자랐다. 1908년에 사관 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으며, 1912년 벨기에 국경과 가까운 아라스의 제33 보병 연대에 소위로 임관한다.
뛰어난 군인을 무수히 많이 배치한 아라스 33연대에 관한 낭설이 많으나 여러 조사 결과 부대에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 그는 아라스 33연대에서 그의 인생에 함께할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
후일 총사령관을 역임하고 퇴임할 자키 파비앵, 제17대 대통령 샤를 드골, 프랑스 대원수 필리프 페탱.
그 외에도 같은 부대 출신들이 차후 대육군에 뿌리 깊게 박혀 고위직을 역임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천운에 가까운 일이었다.
처음 베르게르 모헬이 이름을 날린 것은 프랑스 제3공화국이 채택한 대독전쟁 계획이었던 제17계획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이다.
최초 순화된 보고서가 상부에서 묵살되자 그는 큰 반발심을 가지고 사비를 들여 프레스기를 통해 수십 부를 복사, 반쯤 무작위로 배포하여 재판에 서게 된다.
“처음 받았을 때 꽤나 놀라운 내용들이 담겨 있어 이 자식에 관해 알아봤지. 근데 부대에서 평가는 전혀 다르더라고. 패배주의적 사고, 군 기강 문란, 불순한 사상, 보고 체계 위반. 하여튼 심상치 않은 놈이야.”
-막심 베이강의 자서전 중, 샤를 란레작 장군과의 대화-
물론 모두가 베르게르 모헬의 비범함을 몰라본 것은 아니다. 당시 기병 개혁의 선두주자였던 막심 베이강, 연대장이었던 필리프 페탱은 모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베르게르 모헬은 참모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좋은 쪽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가 바로 아르덴 숲, 본인이 직접 개발한 기관단총을 들고 뛰어다니며 아르덴의 악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알자스-로렌 전선 전역이 초토화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전공은 특히나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 덕에 낮은 계급으로도 그는 윗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는데, 그중 하나로 당시 프랑스군에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던 20군단 군단장 페르디낭 포슈가 있었다.
마른에서의 대반격 이후 군단장을 넘어 북부 총사령관이 된 페르디낭 포슈 장군은 끊임없이 베르게르 모헬을 사지로 몰아넣는다.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필리프 페탱 또한 이에 반쯤 동의했던 것으로 보이며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모헬과 함께한다.
사실상 노예 하나에 주인 둘이라고 보면 된다.
모헬은 1913년 다음 전장을 구상했는데, 이는 개전한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현실화 된다.
북부로의 경주와 동시에 본인들의 부대가 위치했던 아라스로 향한 제33 보병연대는 사단급 규모의 전투에서 승리, 이것이 최초의 참호전이었다.
이때 모헬 원수는 아군의 추가 피해를 우려해 적의 추격을 반대한다.
아직 전쟁 초기라 각성하기 전이다. 나중에는 등 보이면 무조건 쫓아가서 다 죽인다.
이후 거대한 전선으로 인해 전역 분할이 이뤄지자, 북부 전선에서 베르게르 모헬은 2년간 싸운다.
대부분의 시간을 적 포탄 사거리 안에서 병사들과 함께 지내며 그는 최전선 야전 지휘관으로 지냈다.
급속도로 올라가는 계급과 함께 베르됭 전투, 릴 전투, 벨기에 해방 등 굵직한 전투의 최선봉장에 서기도 한다.
1919년, 본래 그랑다르메를 이끌던 조제프 조프르의 실각과 더불어 대전쟁이 승전으로 끝나고 본격적인 삼원수의 시대가 개막한다.
1916년과 1917년 프랑스군이 서부 전선에서 보여준 성적은 극적으로 달랐기에 세 사람은 전쟁 영웅으로 전국적인 지지를 얻었고, 정계와는 전시 총리였던 클레망소와 불가침을 계약한다.
이런 형태로 세 사람이 자리 잡은 이유는 단 하나. 바로 20년 뒤에 있을 전쟁 때문이었다.
베르사유 조약 이후 다음 전쟁을 예고한 자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정확한 구도와 미래를 예측해 이를 대비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심지어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소비만 하는 거대 집단을 키우고 평판, 지지, 권력을 전부 휘어잡는 것은 말이다.
여기서 모헬 원수가 정계로 발을 돌린 이유가 나온다. 더 정확히는, 세 사람이 누군가는 정계로 가야 한다고 동의한 이유가 말이다.
“내 살날이 많이 남지 않았는데, 분명 나도 없고 자네도 은퇴하면 모헬은 폭주할 거야. 일 떠넘겼다고 다 내팽개치거나 세상을 뒤엎겠지.”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정계로 향해야 한다, 이 말씀입니까.”
“페탱, 전쟁이 머지않았네. 지금의 평화가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져. 그리고 그 사실은 누구보다 모헬이 잘 알겠지.”
“…한번 잘 만들어 보겠습니다.”
“내 부탁허이.”
-대원수의 일기장, 두 원수 사이의 대화 중에서-
많은 부분에서 포슈와 페탱이 얼마나 베르게르 모헬을 아끼고 위했는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아오, 씨발 진짜 노친네들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냐. 이젠 정치질까지 하라고? 콱 내가 먼저 뒈져버려? 나 진짜 미국 이민 가버려?”
-빅터 드베니의 자서전, 위대한 상관을 모시며-
다만 그 과정에서 베르게르 모헬의 자의가 얼마나 포함되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다.
1930년대에 들어선 프랑스의 군부정권의 실상은 정상적인 선거와 합법적인 방식으로 수립된 정부였다.
비록 이전에 베르게르 모헬을 자극하는 사건이 여러 차례 일어나고 이에 정부가 주문하지 않은 군사 퍼레이드 등으로 화답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는 단 한 차례도 법을 어기지 않았다.
최근에는 전쟁후유증이 심했던 모헬이 다 죽여버리려 했으나 은퇴한 대원수 페탱의 18번 연속 파운딩이 무서워서 법을 지킨 것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프랑스 제4 공화국은 오늘날에도 군부 정권, 독재 정권이란 비판을 받기도 한다. 특히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한 것은 변명할 여지 없이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 되는 행위이다.
페탱이 첫 은퇴를 하기 전 소장이었던 베르게르 모헬을 곧장 원수로 진급시킨 일은 확실히 모헬이 정계로 가는 기반이 되는 사건이었다.
자신의 고향이었던 오를레앙의 지명을 따와 오를레앙 당을 창설, 그 속에 다수의 군부 출신 인사들과 기존 의원들을 포섭한 모헬은 빠르게 프랑스를 집어삼킨다.
본래 국민의 지지는 엄청났으나 과반을 넘어 개헌이 가능한 3분의 2 이상의 의원을 확보한 것은 순전히 그의 리더십과 카리스마 덕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에 입문했으나 베르게르 모헬은 사상적인 부분에서 그다지 많은 발언을 남기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 당시 최초로 반공 기조를 국외로 드러냈고 군부 출신 대통령으로 극단주의를 드러낼 법도 했음에도 그는 되려 ‘극단주의 금지법’을 발의해 본인의 지지층이던 보나파르트주의자들 및 왕정복고주의자들에게 반발을 산다.
사실 그는 지독한 사상 혐오가였다. 파시즘도 싫어, 나치도 싫어, 민주주의도 싫어, 공산당도 싫어, 그냥 다 싫어한다. 이는 영국 의회와 미국 의회에서 하는 발언만 봐도 알 수 있다.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베르게르 모헬의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 확고한 확신을 가진 만큼 남에게도 확신을 가졌다.
“날… 믿어줬구나.”
-베르됭 전역으로 향하다가 회군하며-
“아니, 나치 그 친구들 자기 입으로 전쟁하겠다잖아? 좀 믿어주자고.”
-1939년 7월 국무회의 발언-
“이탈리아군? 아아, 난 그들이 병신이라고 굳게 믿는다. 4주면 충분해.”
-뮌헨 회담에서 돌아온 뒤, 전쟁을 명령하는 과정에서의 발언-
그가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행정, 정책에 크게 발전을 이바지했다는 평가는 많이 없다. 오히려 여러 개혁을 뒤에서 지켜보며 힘만 실어줄 뿐, 딱히 직접적인 업적은 없다시피 하다.
허나 딱 하나. 전쟁에 관해서 그는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1923년 군축 이후 줄었던 국방비가 1938년에는 세 배로 뛰었다는 점이 그 증거다. 당시 세계가 대공황의 여파로 여전히 허덕이던 점을 생각하면 홀로 군비 지출 압도적 1등을 달성한 셈이다.
이는 38년 10월 1일, 뮌헨 회담에서 돌아와 이탈리아와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확실한 효과를 보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는 세계 5위, 낮게 잡아도 6위의 강국이었다. 지중해에서 영국과 힘겨루기를 하기도, 식민제국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하기도, 발칸에 강한 영향력을 선보이기도 하는 국가였다.
그런 국가를 베르게르 모헬의 군대는 28일 만에 수도까지 완전 점령하였고 이후 두체마저 자신의 허수아비로 만들기에 이른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라인란트 진군을 한 나치 독일군조차 국경을 넘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것으로 부족해, 모헬은 자신의 상관이던 페탱을 벨기에로 보내 전쟁 위기를 고조시킨다. 상사부하 역전…
이후 뮌헨 회담의 연장선, 브레다 회담장으로 돌아온 모헬은 협상이 아닌 일방적인 고지를 한다. 그리고 나치는 예상보다 강력한 프랑스군에 라인란트에서 물러나고 주데테란트를 반환한다.
이때 라인란트를 48시간 내로 비우지 않으면 전부 죽인다는 발언을 했다는 풍문이 있다. 그의 성격상 분명 다 죽였을 거다.
이때 드러나는 점은, 모든 사건의 명분에 동맹 보호라는 내용이 끼어있다는 점이다. 이는 프랑스의 오랜 외교 패권 형성 방식, 바로 동맹을 늘리기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체코와 그리스는 온전한 프랑스 동맹으로 거듭난다.
이 사건 이후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 평화가 이어지고 세계는 다시 한번 전쟁이 휩싸인다.
대통령에서 다시 군인으로 돌아온 베르게르 모헬은 연합군 총사령관직을 수행, 역사에 다시 없을 다국적 대군을 성공리에 지휘한다.
베를린 공세 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성격을 알 수 있으니 링크를 눌러 자세히 알아보자(삭제된 페이지입니다.)
베를린-바르샤바-민스크-모스크바. 네 나라의 수도는 지도에서 선으로 그을 수 있을 정도로 직선상에 위치해 있는데 모두 모헬이 직접 함락하거나 점령 직전까지 갔다.
베를린 이후 세 원수는 흩어져 각자의 군을 이끌고 지휘했는데 모두 자신의 능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다만 같은 시기 오스트리아 공략을 맡았던 모리스 가믈랭만 장군은 그에 비해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상륙 작전으로 손에 넣고 모스크바 앞까지 빼앗겼던 소련이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일본 덕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FDR은 상당히 오랜 기간, 많은 투자와 무리수를 감행해 프랑스를 아시아 전장으로 끌어들이길 원했다. 본인들이 차후 유럽 시장에서 배제될지 모른다는 공포감, 그리고 아시아 전쟁에서 피해가 클 것을 염려한 것으로 이는 본래 아시아에 큰 흥미가 없던 베르게르 모헬에게 직접 출전까지 하게 만드는 결과를 이끌었다.
길고 어려웠던 유럽 전쟁과 달리 아시아 전쟁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재조직한 독일국방군과 같은 전력이 오히려 강화되었고 적은 아사와 병사로 인해 전력이 심히 저하된 상태였다. 참고로 미군은 그런 와중에도 섬에 상륙했다 하면 꼬라박았다.
여러 전투가 있지만 그중 유일하게 공세사령관으로 진두지휘를 했던 45년의 전투가 유명하다. 당시 만주군은 병력과 물자를 보충한 상태로 규모는 꽤 컸으나 기갑과 병력의 질적 차이가 극심했고 무엇보다 사기가 단숨에 꺾여 제 발로 찾아와 항복하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1945년, 2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한 베르게르 모헬은 이후 아시아에 더 머무르다가 11월 선거를 위해 본토로 귀국, 별다른 선거 활동 없이 91.9%라는 희대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3선 임기를 시작한다. 여전히 선거 조작 의심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으나 여러 기록이 당시의 선거가 적법한 절차대로 진행되었음을 증명한다.
마지막 임기 동안 그는 역설적이게도 본인의 권력 축소에 집중한다. 이에 그와 생시르 사관학교 동기이던 샤를 드골을 다음 후보로 내세우지만 군부 정권 청산을 원하던 그는 오를레앙 당의 분열마저 의도하게 된다.
베르게르 모헬의 3선 임기는 비록 개헌을 통해 이뤄졌으나 여전히 많은 학자들은 그가 더 오래 집권했다면 현대 프랑스는 유럽 통합을 넘어 통일까지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반대로 세기가 바뀐 오늘날에도 여전히 베르게르 모헬을 그리워하는 프랑스인들의 모습에 4선 임기까지 했다면 프랑스 제4공화국의 민주주의는 완전히 소멸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내가 어디까지 해줘야 해? 엉? 4선? 지랄 말라 그래. 페탱도 갔겠다, 누가 날 막을 건데!”
-1949년 7월, 각료회의에서 4선 임기를 포기하겠다 선언하며-
본인이 원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자격이 없다고 여긴 것인지 확실하진 않으나, 분명한 사실은 베르게르 모헬은 권력욕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53년, 우연찮게도 당시 프랑스 노동법상 노동자의 퇴임 나이와 딱 맞게 베르게르 모헬은 63세의 나이로 엘리제 궁에서 오를레앙 저택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후 그는 칩거와 등장을 반복하며 역사에 여러 족적을 남긴다. 대표적인 예시로 2년간의 잠적 뒤, 미국 의회에서의 인권선언이 있다. 인권 운동은 부산물이고 나치로 마녀재판을 일으키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보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그들은 이 재판을 주문한 것이 더글러스 맥아더 대통령이라고 주장한다.
1972년 가을. 아내 샤를로트 모헬이 사망하자 모헬은 이듬해 봄, 저택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그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원인은 아내의 사망 이후 하루 6갑으로 늘린 흡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평가는 국가마다 극적으로 갈리는 편이다.
한 개인의 압도적인 능력은 모두가 인정하나 가장 크게 갈리는 주제는 그의 선악의 정도 차이이다.
식민지였던 국가들에게 베르게르 모헬은 해방을 선사해준 고마운 나라이겠으나 반대로 러시아에게는 여전히 사람을 가축처럼 보는 비인간적이었던 광인으로 평가받는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그가 만든 많은 결과로 인해 평판은 올라갔으나 당사에는 꽤나 많은 논란이 있었다.
“쓰읍, 모헬 원수라면 핵을 쓸 것 같은데….”
“쓰는 걸 넘어 소련이 항복해도 새해 폭죽으로 도시 위에 하나씩 떨어트릴 놈입니다.”
“그렇긴 해. 그럼 핵무기를 안 넘겨주면….”
“그럼 우린 핵 없는 국가와 전쟁을 하겠지요?”
-1946년 트리니티 실험 성공 이후 루스벨트 대통령과 조지 마셜 총참모장의 대화 중 발췌-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에서는 그를 초인에 가까울 정도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만주에서의 압도적이었던 전공 때문으로 보이며, 독립을 도운 이후 막대한 원조와 끊임없이 인권운동가로 활동한 경력 또한 아시아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게 된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우생학이 옳았다면 전 전쟁을 멈추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열등하다는 것들을 전부 청소했겠지요.”
“피부가 벗겨지고 신체가 떨어져 나가면, 놀랍게도 모든 인종이 붉은색 피를 흘립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1955년, 미 의회에서의 연설에서 발췌-
특이하게도 독일과 일본에서는 비정상적으로 능력을 과대평가 받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사이비 종교까지 생겨날 만큼 2차 세계 대전에서 베르게르 모헬이 보여준 능력은 놀라웠다. 독일은 나치의 만행과 자신들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한 것이고 일본은 그냥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한 게 쪽팔린 것 같다.
허나 당대 세계를 휘어잡던 프랑스의 기세를 생각하면 전혀 놀랍지 않다. 오히려 후대에서는 끊임없이 그의 선구안에 대한 재발견이 이뤄지고 있으니 말이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인권 멸시와 독재 옹호 발언들이다.
베르게르 모헬이 죽고 나서 공개된 여러 정보에 따르면 그는 명백히 PTSD 증상을 앓던 정신이상자였으나 이를 떠나서 그는 지휘하는 과정에서 적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사건으론 세르비아 광장 학살이 있다. 이때 사용된 마셜에게 선물 받은 권총은 평생 최소 80명 이상을 직접 죽이는 데 사용되었다고 알려졌다. 이에 현재 이 권총은 역사상 가장 비싼 권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독재 옹호는 20년대 프랑스의 정계가 혼란스러웠던 점이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독재라도 하면 국가가 갈가리 찢기진 않는다고 본 것인데, 이는 국가마다 차이가 커 언제나 옳다고 볼 순 없는 시각이다.
한때 영국에 퍼졌던 솔로몬의 73번째 대악마, 죽은 사람을 지옥에서 다시 죽이는 학살자, 피를 하루라도 안 마시면 잠을 못 자는 괴물 같은 괴소문은 그리 객관적이지 못하다.
국가마다, 혹은 시대마다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의 압도적인 능력이다.
동맹을 늘려 세력을 키운 것처럼 외교 면에서도 꽤 성공적이었으나 단연코 군재만큼은 역사에 다시 없을 정도다.
특히 그의 지휘 능력보다 더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게 바로 전쟁을 예고하고 그것을 유도하는 능력이다. 무엇이 대단하지 모르겠다면 ‘알파벳으로 알아보는 유럽 전쟁 이야기’ 어린이 필독서를 읽어보길 바란다. 그는 확실히 일반인과는 다르다.
베르게르 모헬의 모든 업적, 선행, 악행, 발언 등을 다 뒤로하고. 결국 그는 말년에 권력을 내려놓고 유유자적하게 살아갔다. 군권만은 내려놓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자들도 있으나 정확히는 내려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대통령직에서 내려왔음에도 아직 많은 나라들이 한 개인에게 안보를 크게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한 개인으로서 베르게르 모헬은 꽤나 가정에 헌신하는 남자였다. 상류층 사회에서 애인을 공식적으로 두던 20세기 분위기와 달리 베르게르 모헬은 평생 샤를로트 모헬과 함께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가 정치인의 사생활에 꽤나 엄격해지기도 했다.
18대와 19대를 역임한 가스파르 리 모헬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꽤나 인간적으로 표현했다.
반면 그의 손자, 라파엘 리 모헬은 베르게르 모헬에 관해 세상과는 꽤나 다른 시선으로 바라봤다. 실수가 많다거나 아내를 무서워한다 등의 평가를 남겼으나 이는 말년의 모습만 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젊을 적 베르게르 모헬을 안 봐서 그런 거다. 알면 인간으로 저런 소리를 할 수가 없다.
아돌프 히틀러나 베니토 무솔리니와 달리 언론의 노출이 많지 않아 공식적으로 남은 명언이 많지 않다.
“라인란트 말고 주데테란트. 거기부터 빼라고.”
-브레다 회담 중 아돌프 히틀러에게 건넨 협박-
“히잉, 모헬은 아가야. 아가 모헬은 아무것도 몰라. 너무 몰라서 은퇴한 필리프 페탱 원수가 필요해.”
-저지대 연합 사령관 임명 명령서에 사인하며-(여전히 진실 여부 논란이 있는 발언이다.)
“원수는 책임지는 자리이다.”
-노변연설, 원수의 마지막 인사 중-
대체로 그의 사상과 신념이 드러나는 말들은 사석에서 하였기에 명언이 많지 않다. 왜냐면 하고 싶은 말은 입이 아니라 주먹으로 다 했기 때문이다.
1965년 1월 21일, 막심 베이강 원수가 죽고 유일무이한 프랑스 원수가 되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장례식장에서 그가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사생아였음을 밝힌다. 이는 차후 조사를 통해 사실로 드러난다.
모헬 컴퍼니가 2차 세계 대전 직후 자신의 권력 축소를 위해 국내 대부분의 재산을 처분하고 해외로 돌린 과정에서 많은 음모론을 낳았다.
모헬 가문의 재산은 그의 퇴임과 동시에 극적으로 증가한다. 증가분이 해외에서 이뤄졌기에 권력을 이용한 재산 증식은 아니었다. 여전히 공개되지 않은 재산이 적지 않으나 라파엘 리 모헬은 죽을 때까지 세계 부자 순위 1위를 유지한다.
가장 큰 음모론이자 논쟁거리가 되는 부분이 바로 후손들의 미들 네임 ‘리’이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보통 친척이나 친한 지인의 이름을 미들 네임으로 넣었으나 베르게르 모헬에게는 친척이 없었다.
베르게르 모헬이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안다고 1대 부관을 지냈던 자키 파비앵이 여러 차례 증언하고 2대 부관이던 빅터 드베니도 부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베르게르 모헬에게 영향을 준 한국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허나 이는 어떠한 음성 기록이 없어 증명할 수 없는 소문이다.
현대인들에게 베르게르 모헬이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우린 여전히 그가 만든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외교와 정치를 넘어 역사, 문화, 생활까지 베르게르 모헬의 여파가 남겨져 있다.
한 개인에게 역사에 다시 없을 능력이 존재했고 현대 인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스스로 주제를 파악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우리는 그의 겸손한 발언 하나에도 광오함을 느낄 수 있다.
희대의 광인인가 아니면 다시 없을 초인인가.
우린 여전히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