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such thing as a war in France RAW novel - Chapter 305
#305화. 원수의 노후는 그리 평안하지 않다(7)
“자, 학생들. 오늘 역사 수업은 꼭 시험에 나오니 집중해서 들어라.”
“여자친구 이야기 해주세요!”
“맞아요! 엠마 선생님이랑 연애하시잖아요! 저희도 다 알아요!”
“그건 다음에 하고, 학생들은 시험에 집중해야지.”
한창인 학생들이 남의 연애, 그것도 무려 선생님의 연애라면 얼마나 관심이 많겠냐만 선생은 단칼에 선을 긋고 바로 칠판에 연표를 적어갔다.
“내 매번 강조하지만 다 외우라곤 안 한다. 사건의 날짜, 인물, 그리고 앞뒤 맥락. 딱 이 세 가지만 기억하면 돼. 그럼 최소 B는 맞는다.”
“으으, 그래 놓고 매번 어렵게 내시잖아요!”
“카아아악! 이번에도 다 서술형이다!”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학생들의 거센 반발이 튀어나왔지만 이 청소년기 아이 다루는 데 능숙한 선생은 무시하고 칠판에 연표를 계속 적었다.
“이번 범위는 세계 대전 이후니까, 괜히 이전 시험 범위 공부하는 놈 없도록 해라. 자, 그럼 55년, 이 해에 가장 중요했던 사건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그래, 레미?”
“스탈린의 죽음이요!”
“그래, 이때 소련의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었지. 그래서 일어난 게, 바로 10년 만의 연합군 결성이다.”
핵심 단어들을 연표 아래에 적으며 선생님은 역사를 풀어갔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개혁으로 잠시 시끄러웠으나 세상은 황금기를 달리고 있었다. 핵무기의 위협도 잠잠해지니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다고 떠들었지. 딱 소련의 내부 항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어려서부터 얕게라도 여러 차례 배워왔던 내용이나 학생들의 눈은 어느 때보다 흥미진진해져 있었다.
“사실 징집령이 내려진 것은 아니다. 일부 국가에 한해 소집령만 내려졌어. 전에도 강조했지만 세계 대전 이후 두 번의 전쟁 위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핵무기의 등장. 오늘 배우는 내용이 바로 두 번째. 소련의 서기장 사망 사건이다. 당시 세계 대전을 치렀던 모든 국가들이 파리로 모여 소련의 변화를 지켜봤다. 당대회와 각료평의회의 결과를 기다렸고, 그 이후 결과에 따라 전쟁 가능성을 계산하려 했지.”
“근데 전쟁은 안 일어났잖아요?”
“대신 냉전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그 냉전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야.”
어려서부터 반공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저 소련이 얼마나 나쁜 국가인지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않도록 배웠으나 매번 들어도 이 이야기는 질리지 않았다.
“냉전을 처음 연 것 베르게르 모헬 원수님이었다. 당시 소련은 정상 국가로 본인들을 위장했으나 이를 꿰뚫어보고 곧장 소련을 적국으로 정했다.”
“그냥 꼴보기 싫어서 적국으로 정하신 것 같았는데….”
“라파엘, 뭐라고?”
“아, 아니에요.”
한 학생의 중얼거림에도 선생은 곧장 반응했으나 라파엘은 괜한 말을 잇지 않았다.
“아무튼, 당시 모헬 원수님의 결론은 설령 소련의 내부가 변해도 외부에서는 충분히 통제 가능하다고 판단하셨고, 평화를 깨지 않기로 하셨지. 그 덕에 우리 학생들은 전쟁이 먼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거야.”
“선생님도 전쟁 세대예요?”
“그때 나는 중학생이라 아무것도 몰랐지만 기억은 또렷하다. 끝도 없는 승전보. 전 세계가 열광하던 영웅들의 이름. 나도 거리에 나와 삼색기를 흔들었고 프랑스의 새로운 시대가 개막했지. 하루하루가 영광스러운 날이었고 기념비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었단다.”
잊고 싶지 않은 선생님의 추억 회상에 학생들마저 빠져들며 가슴이 뛰는 느낌을 공유했다.
“피이, 그냥 전쟁하면 귀찮아진다고 후딱 마무리 짓고 오를레앙으로 돌아가신 건데….”
딱 한 학생 빼고 말이다.
“라파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냥 앞에 나와서 하렴.”
“흠흠, 없습니다.”
“그럼 수업은 방해하지 말고 필기 열심히 하렴. 저번처럼 시험지에 ‘그랑다르메 원수는 운이 좋아야 된다’같은 답 적었다가는 혼날 줄 알아라.”
“네에.”
생님은 다시 옜 기억 회상 삼매경에 빠졌고 그럴수록 볼에 바람을 채운 라파엘은 턱을 괸채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할아버지! 냉전은 언제까지 이어지나요?’
‘에잉, 내가 딱 스탈린 죽으면 후딱 끝내려 했는데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네!’
‘그럼 끝내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거 얼마나 힘든데. 라파엘, 할아버지가 매번 말하지. 굳이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이크, 대어다!’
그리 말하며 줄을 휘감던 할아버지는 큰 물고기를 낚았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시며 기뻐하셨다.
‘가방에 달린 저 장식도 그래.’
어려서는 몰랐는데 중학교 갈 때 돼서야 알았다. 할아버지가 주신 어린애 주먹만 한 동전이 진짜 노벨 평화상이었단 것을. 심지어 핵무기를 배치해서 얻은.
“에휴, 난 모르겠다.”
“뭐? 라파엘, 선생님이 이렇게 열심히 설명해줬는데 모르겠다고?”
“아, 아니요? 다 이해했는데요?”
“그럼 설명해보게. 왜 5, 60년대 인권 운동이 범세계적으로 일어났는지.”
“어…. 그거 더글러스 맥아더 대통령이 모헬 원수님께 징징 거려서-”
“책들고 뒤로 가.”
“예에.”
“정답은 인종차별이 제국주의와 나치의 잔해라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때 모헬 원수께선 그 평화 연설로 노벨 평화상 후보에 한 번 더 오르셨지. 물론 정중히 거절하셨지만.”
차마 라파엘은 ‘아, 그거 할머니 생일이랑 겹쳐서 취소한 건데’라고 말하지 못했다.
역사 시간만 되면 매번 억울함이 하나씩 쌓여가는 것 같았으나 어찌저찌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라파엘은 그 억울함이 조금은 가셨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우하하, 우리 손주 왔나!”
백발을 뒤로 넘기고 가죽 자켓에 청바지를 입은 할아버지는 환하게 그를 맞이해줬기 때문이다.
“어우, 담배 냄새. 집에 할머니 없나요?”
“잠시 일 때문에 나갔다.”
“돌아오면 또 혼나겠네.”
“괜찮아, 오기 전에 냄새 빠져.”
낄낄거리며 자신의 바이크를 닦던 걸레를 던진 뒤, 할아버지는 라파엘과 함께 마당을 걸으며 대화를 시도했다.
“그래,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과학자? 축구 선수? 대통령?”
“어, 모르겠는데요. 할아버지는 어려서 뭐가 되고 싶으셨어요?”
“…. 글쎄, 기억이 안 나네.”
“그래도 좋아하시던 건 있을 거 아니에요.”
“흐음, 선택지가 없어서 말이지. 너에게 말했다시피 내 윗사람들이 워낙 성격 더럽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인간들이었던지라…”
그러곤 대화는 수 없이 들었던 ‘과거의 나쁜 사람들 이야기’. 역사에는 위인이라 기록된 자들의 뒷담으로 이어졌다.
“어우, 내가 그 인간들 뒤통수 못 후린 게 인생의 한이라니까?”
“근데 결과적으로는 대단한 사람이 되셨잖아요.”
“흐음, 라파엘.”
오랜만에 나왔다. 사람의 심리를 꿰뚫을 것만 같은 진중한 눈빛. 예고도 없이 나오는 저 시선에 라파엘은 새삼 할아버지가 마냥 시골 노인은 아님을 다시 인지하며 답했다.
“왜요?”
“내 젊어서 하나 간절히 원하던 게 있었다면, 그건 살아남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요?”
“그리고 가능하면, 내 가족, 지인, 주변 사람들까지. 그게 내 꿈 아니었을까? 그걸 위해 아등바등했던 거겠지.”
한 톨의 의심도 없이 국가를 이끌던 사람의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절박해 보이는 답이었으나 왜인지 더는 파고들 수 없었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깨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여왔다.
“담배 냄새 뭐야! 베르게르 당신 또 집에서 담배 폈지!”
“뭐, 뭐야. 왜 벌써 온 거야? 이, 이건 너한테 주마. 네가 핀 거로 하자.”
“할아버지, 전 담배 안 피잖아요.”
“아냐, 네가 피다가 걸린 걸로 해야 내가 살아. 라파엘, 이 할아비는 지금 나이에 처맞으면 진짜 갈지도 몰라.”
그러면서 담뱃갑과 오일라이터를 건넨 할아버지는 아끼는 가죽 옷을 허공에 털며 냄새를 빼려 했다.
그러나 냄새가 바로 빠질 리 만무.
“찾았다.”
“내, 내가 다 설명할게!”
“설명은 무슨.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는데.”
“그건 라파엘이 담배 피우다가 나한테 걸린 거야!”
궁색한 변명에 할머니가 자신을 돌아보자 라파엘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이 노인네를 내 지옥으로 보내야겠다.”
“사, 살려줘! 라파엘! 경찰 불러! 경찰!”
“괜찮아요. 할아버지는 수많은 전쟁터에서도 살아 돌아오셨잖아요. 전 할아버지를 믿어요.”
멱살 잡힌 할아버지에게 어린 라파엘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조용히 무운을 비는 것뿐.
수천만 병력도 죽이지 못한 할아버지인데 설마 죽기야 하겠나.
죽으면, 뭐 그건 하늘이 점지해준 운명이겠지.
“전 시험 때문에 공부하러 들어갈게요. 살아계시면 저녁 때 봬요.”
“끄아아아악! 옷! 내 가죽옷! 세상에, 옷을 찢었어? 샤를로트? 샤를로트!”
문득 자신의 방으로 향하며 라파엘은 할아버지의 시대가 궁금해졌다.
저런 할아버지한테 졌던 추축국들은 어떤 나라였을까? 적 지휘관은? 함께 싸운 아군은?
“…페인트탄이나 비비탄으로 싸운 건 아닐 거 아냐.”
실제로 할아버지 서랍에 있던 권총은 역사책 속 사진에도 종종 등장하던 총이었다.
정말 역사가 제대로 기록된 게 맞긴 한 걸까. 세상은 아직 할아버지에 대해 잘 모르는 거 아닐까.
“모르는 게 나아서 조작된 건가?”
확실히 할아버지 주변에 있는 분들은 하나같이 철없고 나잇값 못하는 분들이었다.
드골 할아버지, 파비앵 아저씨만 봐 그냥 술 한 병 들고 할아버지 집에 창문으로 몰래 들어오다가 할머니한테 걸려서 혼나던 분들 아닌가.
“하아, 진실과 거짓도 판별하기 어려운데 세상은 얼마나 더 어려울까. 역시 난 아빠처럼 대통령 같은 건 하면 안 돼.”
그런 건 진짜 뚸어나고 대단한 사람들이 하는 거지 학교에서 역사 시험도 어려워하는 사람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
라파엘은 어려서부터 단 한 차례도 스스로가 비범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의 말에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대신 수긍하길 택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주위 현상들에 굳이 깊게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
학구열도 높지 않고 세상만사가 그러려니 흘러가도록 두는 편.
“정말 난 색감도 없는 사람이네. 저 나이에도 활발하신 할아버지랑은 다르게.”
“아들, 학교 다녀 왔니?”
“아, 네.”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불렀다. 아마 할머니와 함께 돌아온 모양이다.
“할아버지랑 다르다니, 무슨 말이야?”
“그냥, 전 특출나지 않다는 뜻이었어요.”
“왜 그런 생각을 했니?”
“사실이니까요. 박탈감이나 비교 의식이 아니라 그냥 나름의 주제 파악이랄까요.”
“흐응. 오늘인가.”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콧소리를 내던 어머니는 갑자기 라파엘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다.
“어, 어머니?”
“잠깐 내가 보여줄 게 있어. 빨리. 할아버지 돌아오시기 전에.”
그러곤 할아버지가 파리에 올라올 때만 개방되는 서재로 향하시더니 조심스레 자물쇠를 몇 번의 절그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땄다.
“…어떻게?”
“너희 아빠한테 배웠지.”
아직 밖에서 할아버지의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는 걸 보니 할머니의 분노는 아직 수그러들 기미가 없어 보인다.
“분명 이쪽 서재에도 몇 권 있을 텐데….”
“그니까 무얼 찾으시는 거예요?”
“너희 할아버지가 만든 책. 다 오를레앙 저택에 있지 않거든.”
허나 서재 바로 뒤편에는 위아래로 훑어봐도 검은색 제목 없는 양장본이 안 보였다.
“어디 있으려나…. 아, 찾았다.”
책장 가장 아래 먼지 쌓이지 않도록하는 천에 가려진 몇 권의 책들.
하나 뽑아 든 어머니는 먼지를 후 불어내고 그 책을 라파엘에게 건넸다.
“저 어릴 때네요? 무슨 책인데요?”
“일단 펼쳐보렴.”
마치 비밀 장부처럼 생긴 검고 낡은 책. 조심스레 펼친 라파엘은 실수로 앞의 몇 장을 넘겼으나 순간 한 사진에 눈을 빼앗겼다.
그건 할아버지가 연설하시는 연단 아래에 더글러스 맥아더 대통령의 박수하는 사진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아래에는 짤막한 문구도 보인다.
“…이게 뭐예요?”
“너희 할아버지의 그림 일기 같은 거야.”
저리 천박해 보이는 말투를 쓰셨다고? 아니, 지금도 쓰시긴 하는데 사진과 너무 맞지 않지 않나.
“이거 설마 그 인권선언하셨다던….”
“응.”
“그 범세계적인 인권 운동의 시초-”
“그거 맞아, 아들.”
“…….”
“너도 이제 알 때가 된 것 같아서 보여준 거야. 다음에 저택으로 가면 더 찾아보자.”
꽤나 충격 받았는지 라파엘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또 한 번 떠오르는 의문.
진짜 옛 대전쟁, 세계 대전은 도대체 어떤 시대였던 걸까.
어떻게 우리 할아버지가 영웅 소리 듣고 조금 수준이 낮아 보이시는 친구 분들도 위인 소리 듣는 걸까.
할아버지의 큰 비밀을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라파엘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