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304
긴 행렬을 이룬 인마가 드넓은 관도를 따라 북쪽으로 달렸다.
채찍을 쓰지 않았기에 빨리 달리지 않는다 해도 말의 요동을 버티기가 힘들 터였으나, 행렬을 이끄는 냉담(冷淡)한 인상의 노인은 고삐조차 잡지 않고 있었다.
그저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달리는 그의 뒤로, 수십이 넘는 녹의인들이 호위하듯 바짝 붙어 말을 몰았다.
그리고 노인의 옆, 높이 솟구쳐 바람에 휘청이는 깃대에는 두 마리 뱀이 서로를 탐하듯 꼬여 있는 형상이 그려진 당가의 가주기가 매달려 있었다.
냉막한 인상의 노인.
그는 당금 사천의 지배자로 군림해 온 당가주 당천익이었다.
“능운비가 벌써 도착했단 말이지?”
당가를 떠난 지 삼 일.
당천익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 그의 서신을 받았을 때는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당가는 여타의 문파들과 달랐다.
정의?
그따위 막연한 말은 좇지 않는다. 가주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문파의 이득이다.
하여 역대 가주들은 언제나 옳고 그름에 앞서 당가에 이득이 되는 쪽을 선택해 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오직 그것만이 당가를 긴 세월 사천의 패자로 군림하게 한 이유였다.
그런 까닭에 세인들은 당가를 정파로 보기도 하고 사파로 보기도 했다.
때론 피도 눈물도 없다고 욕하거나, 사갈이라 폄하하기도 했다.
하나 그런 당가도 그 무엇보다 앞서지켜 온 철칙이 있었다.
사천에 처음 자리를 잡고 당가의 터를 일군 초대 가주 때부터 지켜 온 그것.
바로 혈족 우선주의와 원한에 대한 처절한 보복이다.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고, 원한을 입으면 혈족의 단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뒤쫓아 가 보복한다.
그런 성정으로 인해 누구도 당가를 무시하지 못했다.
비록 그 세는 뭇 세력들에 비해 과히 대단치는 않았으나, 모두가 두려워하며 먼저 고개를 숙였다. 당가의 사업에 관련된 자들은 절대로 함부로 당가를 업신여기지 않았다.
이득 추구와 철저한 보복.
그것이 지금의 당가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한데 능운비는 이미 당가와 원한을 맺었다.
그가 중원을 휘젓고 남궁가로 위장해 도망치던 시기.
그의 손에 당가의 무인들이 죽었다.
현 가주의 조카 당문독과 그가 이끌던 암영대 무인들, 혈족이 죽은 것이다.
하나 아무리 당가라 해도 무턱대고 원함을 품고 복수하지는 않았다.
어떤 죽음인가가 중요했다.
만약 당문독과 암영대의 죽음이 암습에 의한 것이었다면, 혹은 이유 없는 죽음이었다면 상대가 천하삼세의 하나인 마교라고 해도 당장에 북쪽으로 진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문독은 전장에서 죽었다.
도주하는 자와 막아선 자의 정당한 승부였으니, 어쩔 수 없는 죽음이었다.
다만 언젠가 복수해야 했다.
만약 또 다른 전장에서 그를 만난다면 반드시…….
그런데 놈이 돌아왔다.
일월신교라는 이름으로 천하 군림을 꿈꾸며.
그리고 자신에게 서신을 보냈다.
천하로 가는 길을 열어 달라고. 그리하면 사천에는 어떠한 피해도 끼치지 않겠다고.
이런 경우엔 혈족의 죽음을 내세울수가 없었다.
가주 회의를 통해 오랜 토의를 거친 당가의 수뇌들이 그리 판단했다.
원한이 배제되었으니, 복수가 먼저인지 가문의 이득이 먼저인지를 따져야 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득을 좇기로 결정되었고, 곧 저울질이 시작됐다.
정무맹과 일월마교.
둘 사이에서 당가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그런 과정을 거치던 중에 살변이 일어났다. 사천의 북쪽 당가의 구채구 지부에 머물던 방계의 혈족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흉수로 지목된 이는 당가와 대치하던 일월신교 예하 야수문주 소선화였다.
이유 없는 죽음이었다.
논의되고 있던 이득은 철저하게 배제되고, 혈족의 죽음에 대한 분노만이 들끓었다.
하지만 이내 떠오른 의문이 당천익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의아한 죽음이었고, 의아한 구금이었다.
소선화라는 자가 사건 현장에서 지부 무인들에게 잡혔다고 하지 않았던가?
말이 되지 않았다. 지부에 무슨 힘이 있어서 그녀를 잡을 수 있었겠는가?
또한, 근처에 당가 지부를 한 식경도 걸리지 않아 초토화시킬 만큼 강한 일월신교의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의아했던 당천익은 결국 당화경과 함께 청화대를 급파하고, 구채구 인근의 전력을 모조리 집결시켰다.
묘한 죽음이었고,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분명 무언가 있을 것이다.
기실, 답은 뻔했다.
당가와 일월신교를 충돌시켜 이득을 얻을 만한 자.
“정무맹……”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말을 타고 달리는 당천익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그는 그리 멍청하지 않았다. 뻔히 보이는 계략에 속아 휘둘릴 정도로 불같이 움직이는 성격이었다면, 형제들을 제치고 당가의 주인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지금껏 당가를 이끌어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만 아직은 심증뿐이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황만이 소선화를 흉수로 지목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천익은 알았다.
정무맹의 그늘 뒤에 숨어 있는 자들.
긴 세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여 온 그들의 짓거리들을 어찌 모를까?
누구보다 이득에 충실해 온 당가이기에 그쯤은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당가가 그들과의 밀월 관계를 이어 온 것은, 철저한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그들이 당가에게 손해보다는 이득을 가져다주었기에 공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만약 이 묘한 죽음에 그들이 관련되어 있다면.
제 권력을 지켜 내려는 짓거리에 당가를 이용하고자 이따위 모략을 꾸민것이라면.
당가의 모든 것을 걸고 철저히 부술것이다.
세인들이 당가가 일월신교와 손잡은 배덕자라 손가락질한다고 할지 라도.
하여 청해 본 것이다.
능운비, 그는 지금의 일에 대해 어찌 판단을 내릴까?
물론 정사의 방어선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섬서를 두고 이쪽으로 오기란 쉽지 않을 터다.
다만, 그럼에도 청해 본 것은 그의 대응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정무맹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공생 관계를 맺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그가 왔다.
“직접 말이지.”
당천익이 한층 짙어진 웃음을 머금은 채 구채구가 있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구채구 인근에 자리한 송반현을 지나던 때였다.
“가주님, 송반 지부의 무인들 같습니다.”
휘하의 무인이 손가락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이윽고 먼지를 일으키며 급히 달려온 인마가 당천익의 앞에 당도했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무인이 어느새 멈춰 선 당천익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송반 지부장 백현태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다. 그만 일어나라.”
“예!”
“어쩐 일이냐?”
“청화대주 당화경이 가주님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 속히 서신을 전하라 연락을 보냈습니다.”
“청화대주가?”
“예!”
“음…….”
청화대주라면 지금쯤 교주를 맞이하고 있어야 한다.
한데 그가 왜?
설마 지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당천익이 굳은 얼굴로 손을 내밀자, 백현태가 황급히 품 안의 서신을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호오?”
찬찬히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당천익의 표정이 묘해졌다.
“청화대주가 진땀깨나 흘리고 있겠구나.”
“예?”
당천익의 말에 그를 호위해 당가를 출발했던 녹혈대주 당화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청화대주가 진땀을 흘리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실수로 일월신교의 교주가 대로 했다는구나.”
“예?”
“큭큭, 단숨에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면 제법 심계가 있는 녀석이라는 뜻이지. 또한 이 일로 당화경이 아닌 나를 초조하게 만들려는 생각이었을 것이고.”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당화정의 말에 당천익은 웃기만 했다.
“화정아.”
“예, 가주님.”
“청화대주에게 서신을 보내거라. 내가 노구에 몸이 피로한지라 조금 늦어진다고.”
“예?”
“그저 그렇게만 전하거라. 노구에 땡볕을 쐬었더니 힘이 드는구나.”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당천익의 나이가 올해로 칠십에 가깝지만, 여전히 정정했다. 막말로 여전히 당가의 모든 사안에 관련하여 왕성한 활동량을 과시하는 그가 피로라니?
그리고 구채구까지는 고작 반나절만 더 달리면 될 테니, 해 질 녘이면 충분히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당가에서 가주의 권위는 그 무엇보다 지엄했다. 명을 받았으니 따라야 할 뿐이었다.
“하면 경로를 송반 지부로 잡겠습니다.”
“오냐.”
“송반 지부장은 먼저 가 가주님께서 머물 준비를 하라!”
“예!”
당화정의 명에 송반 지부장이 힘차게 복명하고는 곧바로 말을 몰아 사라졌다.
“큭큭, 입심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당화경을 그리 난처하게 만들었다면 말주변이 보통이 아니란 뜻이겠지. 이거 앞으로 나눌 대화가 참으로 즐겁겠어.”
능운비를 떠올린 당천익은 송반 지부로 향하며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계속해서 웃기만 했다.
* * *
“선화야.”
“교주님!”
막 전각 안으로 들어온 소선화가 능운비를 발견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만 일어나거라.”
“예.”
능운비는 직접 그녀를 일으켜 자리에 앉혔다.
“몸은 괜찮으냐?”
“고생스럽지 않았습니다. 의외로 당가의 뇌옥이 편안하더라구요. 밥도 잘 나오고.”
“녀석……”
환하게 웃는 소선화의 모습에 능운비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한데 어째서 이곳에 계십니까? 섬서의 전선은 어찌하구요. 정사의 저항이 생각보다 대단하다 들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교주님께서 몸을 빼시면…….”
“네가 잡혔다 하니 걱정이 되어 견딜수가 있어야지?”
“아니, 제가 뭐라고……”
“괜찮다. 강자서가 괜찮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군사가요?”
“그래.”
“그럴 리가……”
“되레 나에게 부탁하더구나.”
“예? 무슨 부탁을요?”
“너를 구하고 당가를 손에 넣어서, 호북성으로 진격하라고.”
“그런…… 하면 섬서에 모인 정사의 전력이 예상보다 약했단 말입니까?”
“아니,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정무맹이 작심하고 모은 모양이더구나.”
“한데 어찌……”
“역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겠지.”
“예?”
“군사가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만, 오면서 생각하니 그 의도가 어렴풋이 짐작되더구나.”
“의도요?”
“그래.”
“무슨……?”
“당가가 너를 흉수로 지목해 구금했지만,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
“되레 나에게 찾아와 해명하라고 당가주가 직접 서신을 보내왔더구나.”
“당가주가요?”
“그래. 휘에게 전하였던 모양이다.”
“음…….”
“혈족의 죽음을 절대로 용납지 않는 당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가요?”
“그래. 만약 네가 살변을 저질렀다는 증좌가 확실했다면…… 넌 이미 죽었을 것이고, 당가는 마교를 향해 진격했을것이다.”
“……”
“하나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구채구에서 일어난 방계의 죽음에 의심을 느꼈다는 뜻이지.”
“어떤 의심을요?”
“이 죽음에 정무맹이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예?”
“아마 당가주가 그러한 의심을 가졌을 것이다. 해서 나의 반응을 떠보고자 만남을 청한 것일 테지. 어쩌면 정무맹을 향해 칼을 들어야 할지도 모르거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면 그들이 정무맹과 싸우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굳이 이해할 필요 없다. 당가는 원래 그러한 이들이니까.”
능운비의 말에 소선화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교주님은 마치 오래전부터 당가를 알아 오신 것 같네요.”
그 말에 능운비가 빙긋이 웃었다.
알다마다.
한때는 그들을 조사한 적도 있었고, 수차례 목숨을 잃을 위기도 있었다.
“녀석, 내가 너희와는 달리 중원을 열심히 헤집고 다녔다는 사실을 잊었더냐?”
“하긴……”
“어쨌든 네가 참아 준 덕분에 당가와의 교섭이 잘 끝날지도 모르겠다. 잘 판단했다. 만약 네가 도주하고자 했다면, 정무맹 놈들이 꾸민 함정을 역이용 할 방도가 없었을 테니.”
“그런가요?”
소선화가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순순히 응한건데 뭐가 됐든 잘 했다 하시니 기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