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76
능운비를 뒤따른 왕천은 활짝 열린 대전의 문을 쳐다봤다.
“역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더니……”
마교에 있을 때만 해도 경쟁 구도에 막 발을 들인 사고뭉치에 불과하던 그가, 중원에 나온 뒤로는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 가고 있다.
와중에 첫 시작이 천주문이라는 거대 문파와의 전쟁이었다.
구대문파까진 아닐지라도, 정무맹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결코 작지 않은 곳이다. 드넓은 감숙 북방의 패자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들이 재기불능이 되었으니, 감숙 북방은 무주공산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비록 대설산 인근이 사파의 세가 강한 곳이라고는 하나, 향후 이번 사건의 주역인 단천문의 영향력이 커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더욱이 천주문과 지부장 놈의 뒷거래를 통해 팔려 갔던 이들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낸 일로 중원인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
막대한 보상금까지 약속받은 이들이 마교의 공덕을 사방에 소문내고 있기에.
벌써부터 거리 곳곳의 술자리에는 마교와 삼공자를 칭송하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돌았다.
관부조차 외면한 일을 마교가 해냈다고.
비록 마도이나, 삼공자는 인의(人義)와 도리를 아는 인물이라고.
손가락질은 관부와 천주문의 몫이었고, 칭찬은 고스란히 마교와 삼공자가 챙겨갔다.
문파 하나 부수는 것은 누구나 할수있는 일이지만, 사람들이 이토록 우호적인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일이었다.
더욱이 마교가.
늘 천대받고, 늘 간악하고 잔인한 인간 말종 취급을 받아 오던 마교가 말이다.
그 어려운 걸 능운비가 해냈다.
고작 약관의 무인이.
“자, 잠깐! 설마 여기까지 예측하고 일을 벌이신 건 아니겠지?”
문득 든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왕천이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하지만 이걸로 능운비라는 인물이 무림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른바 중원 놈들이 즐겨 하는 삼대토벌(산적, 수적, 마교)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공적이다.
“격이 틀리지, 격이!”
왕천이 대전을 향해 걸으며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또한 더없이 좋은 것은, 이번 일로 단천문이 능운비에게 충성심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와중에 정사에 치이며 은밀하게 숨어 살아야 했던 마교의 중원 지부가 당당히 양지로 나오게 되었다.
오랜 염원이 풀린 것이다.
더는 숨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설사 그것이 교주가 중원을 압박해 만든 결과라 할지라도, 모두가 능운비의 업적이라 여길 것이다.
“이러다가 중원 지부 전체가 우리 주군께 충성하겠다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큭큭큭.”
입까지 막아 보지만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왕천이었다.
물론, 더 위험해질 것이다. 능운비의 입지가 점점 더 넓어져 가는 것을 반대파에서 두고 보지만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천주문과의 싸움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정무맹도 마찬가지다.
마교라면 치를 떠는 놈들이 제대로 한방 먹었으니…….
그럼에도 꿈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능운비를 교주에 앉히고자 했던 그의 꿈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말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칠 기회만 노리고 있는 능운비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왕천이 의지를 불태우며 굳건하게 다짐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리 슬픈 표정을 지으셨을까?
문득 가슴이 아릿해졌다.
천주문주를 베던 주군의 표정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살수를 쓰신 게 처음도 아니신데……”
자신을 팰 때는 그리도 희희낙락하시더니.
하긴 뭐, 어디 보통싸움이었어야지.
어쩌면 자신이 본 것은 치열한 전투뒤에 찾아오는 허탈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땐 그저 옆에 있어 주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지위와 관계없이 티격태격하던 그들이지만, 그 끈끈함이야 어찌 말로 다할까?
그래, 자신이 누군가?
호위장이다.
주승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만큼 가깝고, 짧은 삶의 파고를 함께 버텨 온.
“흠, 술이라도 챙겨 올 걸 그랬네. 우리 주군께서 마음이라도 좀 푸시게.”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왕천이 활짝 열린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불도 켜지 않은 채 구석진 곳에 웅크린 능운비의 등이었다.
“……주군.”
가슴이 또 아릿해졌다.
어린 나이에도 제자로서 버텨 내야했을 압박감이 절로 이해가 되는 듯했다.
등이라도 보듬어 주어야겠다. 믿음직한 호위답게.
“주군!”
“……?”
왕천이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주어 부르자, 능운비가 고개를 홱 하니 돌려왔다.
“어, 왔어?”
“예.
“뭐 하다 이제 와?”
“……예?”
“뭐 해? 너도 빨리 뒤져.”
“……예, 예!?”
순간 멍해진 왕천이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고 보니 주군의 주위에 무언가 잔뜩 널려 있다.
“젠장, 이놈의 집구석. 값나가는 물건이 없네.”
“……”
실의에 빠져 있을 줄 알았던, 술이라도 한잔하며 마음을 풀어 드리려 했던 주군이…… 대전 곳곳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
값나가는 물건이 없다고 불평을 뱉어 내며.
“주, 주군?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월 하긴 뭘 하겠냐?”
“……”
“보상금을 마련해야 할 것 아냐? 본성에서 지원도 안 해 준다는데.”
“아, 보상금……”
“이 망할 놈들이 돈을 어디에다 꿍쳐 놨는지 알 수가 없으니, 일단 돈 될만한 거라도 챙겨야지.”
“……”
왕천은 결국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슬퍼 보였던 것이…… 사람들에게 약속한 막대한 보상금 때문에?
“야! 멀뚱히 서 있을 거야? 너도 빨리 뒤지라고. 싸움이 끝났으니 곧 비워줘야 한단 말이야.”
“아, 그……”
그랬다.
정무맹은 전쟁은 허락했으나, 영역까지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부 창설에 대한 협상에 자신들의 영역은 침범하지 말라는 단서조항이 있지 않았던가.
“안 되겠다. 대충 이거랑 이거 정도만 챙기고, 다른 전각을 뒤져 보자. 삭월대도 전부 불러와. 돈 될 만한 것은 전부 챙기라고 해.”
“……”
“참! 단천문 애들은 부르지 마라. 그 자식들은 몰래 빼돌릴지도 몰라. 알겠지?”
“……”
그 구체적이고도 치밀한 명령에, 왕천은 그저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자신은 대체 뭘 걱정한 거지?
하지만 웃음이 나왔다.
운비가 밝아서 다행이었다.
“주군!”
“응?”
“저기 병기대에 걸린 것도 챙기셔야지요.”
“……”
“백련정강은 돈이 됩니다.”
“아!”
왕천의 진지한 충고에 능운비가 탄성을 터트렸다.
“그렇지. 돈이 되지.”
“분입니까? 비급도 털어 가시죠?”
“비급까지?”
“그럼요? 그게 알짭니다. 금붙이 따위와는 비교도 안 돼요.”
“음, 하지만…… 비급은 좀 심하지 않아? 괜히 그걸 팔았다가 정무맹 쪽에서 딴지라도 걸면 곤란한데?”
“주군.”
“응?”
“암시장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필요하면 사파 쪽에도 은밀히 줄을 대 보구요. 아마 단천문이 그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오!”
“천주문이 관리하던 사업장 쪽도 털어 보시지요. 전에 보니 도박장이나 야시장도 많은 것 같던데.”
“그렇지! 맞아, 그쪽이 있었지?”
“그간 불법적인 사업으로 돈을 벌어왔으니 제법 쏠쏠할 겁니다. 내버려 두면 정무맹 쪽에서 먼저 손을 쓸지도 모르니 서두르시죠.”
“아, 왕천. 넌 정말……”
쓰레기야.
하지만 믿음직해.
다른 건 몰라도, 이쪽으로 이리 해박할 줄은 몰랐어.
“칭찬은 거두십시오. 저는 그저 호위로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 그래.”
속마음은 달랐던 능운비가 어색하게 웃었다.
야심한 밤.
믿음으로 똘똘 뭉친 주군과 수하는 도적이 되었고, 그날 천주문은 긴 역사동안 쌓아 온 모든 걸 털렸다.
사람들의 보상금을 위해.
더해 여비도 좀 챙길 목적으로.
* * *
천주문에서의 이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뒤진 덕택에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었다. 덕분에 보상금도 충분할 듯했다.
사흘째 되는 날, 단천문 무인들에게 천주문의 재산을 전부 챙겨 보낸 능운비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주천의 밤거리를 걸었다.
“홈, 평화롭네.”
“그러게요.”
능운비의 말에 옆에서 따라 걷는 왕천과 주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삼일.
관에 넘긴 천주문의 수뇌들이 그간의 죄를 낱낱이 자백했고, 천주문이 마교에 무너졌다는 소문은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그 치열했던 전쟁이 마치 별세계에서 벌어졌던 일인 것처럼 세상은 평소와 다름없는 밤을 보내고 있었다.
취객들은 고성방가하며 민폐를 끼쳤고, 호객꾼들은 앞다투어 손님을 모시느라 바빴다.
객점과 주루는 문전성시를 이루어 활기 찼다.
안에서는 천주문과 마교의 싸움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때로 칭찬도 있었고 때론 비난도 있었지만, 굳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가끔 몇몇 사람들이 능운비 일행을 힐끗거렸지만, 일행 중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 검을 차고 돌아다니니 그럴 만도 하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그들의 삶에 딱 한가지가 빠져 있었다.
치안 유지 차원에서 순찰을 도는 천주문의 무인, 그들이 없었다.
그럼에도 모두 아무렇지도 않다.
어쩌면, 애초에 그들이 있으나 없으나 사람들은 매한가지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글쎄……”
“단천문과 가장 가까운 지부는 사천과 섬서입니다.”
“응? 사천에도 있어?”
“예. 당가의 세가 원체 강한 곳이라서 성도와는 한참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일단은 그곳에도 지부가 있습니다.”
“음……”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던 능운비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섬서로 가자.”
“섬서로…… 알겠습니다.”
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섬서는 곧 화산이다.
즉, 능운비 일행은 진짜 정파가 있는곳으로 향하려는 것이다.
도가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니만큼, 마교는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능운비가 행선지를 섬서로 정한 것은 헤어짐을 위한 준비였다.
섬서를 지나면 곧바로 하남이 아니던가?
정무맹이 있고, 언제나 그리운 ‘그분’이 있는 그곳.
왕천과 주승, 그리고 삭월대와의 인연은 아쉽게 되었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하는것이다.
능운비는 사라지고, 척월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왠지 섭섭했다. 왕천과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못내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와 맺어 온 인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의 능운비가 가지고 있는 기억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가올 이별에 벌써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능운비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술이라도 한잔할까?”
“그럴까요?”
“그래. 싸움도 끝났는데 한잔해야지.”
“그러시죠.”
왕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승이 삭월대 무인에게 명을 전했다.
사람들에게 페 끼치지 않을 분위기 좋은 곳을 찾아보라고.
능운비는 곧 닥쳐올 미래를 생각하며 아쉬움 반 기대감 반의 마음으로 주천의 관도를 걸었다.
그때였다.
“어! 이보게!”
“……?”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익숙한목소리다.
하지만 누가 자신을 알아볼까?
피식 웃은 능운비가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데, 목소리가 이전보다 더 크게 들려왔다.
“이보게! 중길이! 옥청표국주!”
“……응?”
익숙한 목소리는 자신을 향해 있었다.
옥청표국주 이중길.
처음 천주문을 방문했을 때 사용한 위장 신분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신분을 알 만한 이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은?
“……용천?”
걸음을 멈추고 휙 고개를 돌리니, 골목 어귀 어둠속에서 머리만 빼꼼히 내밀고 있는 용천이 보였다.
“아니, 형님?”
“쉿! 목소리 낮추게.”
“……?”
“이리 오게, 이리. 어서!”
용천의 부름에 능운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몹시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긴 하지만 그 난리 통에 잘도 살아남았다.
아니, 어쩌면 전처럼 밖에서 술을 처먹다가 운 좋게 자신들의 칼날을 피했는지도 모르겠다.
능운비가 자신의 일행들과 함께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용천이 다시 한번 주위를 휙획 둘러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
“이 사람아, 여긴 어쩐 일인가?”
“예?”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네. 마교 놈들이 쳐들어와서 천주문이 쑥대밭이 되었어.”
“……”
그 마교 놈이 바로 자신이었다.
용천은 여전히 옥청표국주 이중길로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다행히 무사하셨네요.”
“천운이었네. 내 잠시 자네가 그리워서 술을 마시던 중에 소식을 들은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지. 내 삼 일 내내 기방에 숨어 있다가 겨우 나온 참이네.”
……역시나.
“그나저나, 근처에서 마교 놈들을 보지 못했는가?”
“글쎄요.”
능운비는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그 마교 놈이 지금 그의 앞에 있다는 걸 알면 어떤 심정일까?
“휴, 나는 이 길로 곧장 주천을 떠날 생각이네. 자네도 속히 가게. 천주문과 연을 맺었었다는 것을 알면, 그 흉악한 마교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그러기엔 소문이 좋던데요? 오히려 천주문을 욕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예끼! 그게 다 마교 놈들의 농간이야. 사람들이 속는 게지.”
“……”
능운비는 그의 뿌리 깊은 편견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가 무슨 죄가 있을까?
천주문에서도 제대로 취급받지 못했던 최하급 무인에 불과한데.
“참, 이거 보게. 내 혹시나 해서 챙겨 온 것이네.”
“뭔데요?”
“마교 지부를 이끌고 있는 제자 놈의 용모파기야.”
“……예?”
“나도 몰랐는데, 습격을 받기 전에 천주문에서 마교 놈들이 숨어들 걸 대비해서 주천에 뿌렸던 모양이야. 나도 좀 전에 담벼락에 붙어 있는 걸 겨우 구했네.”
참 한결같은 사람이다. 얼마나 겁을 집어먹었으면 담벼락에 붙은 걸 겨우 구한다는 게 말이 되는…… 어?! 잠깐만!
순간, 능운비 의 눈이 커다래 졌다.
뭘 어쨌다고?
천주문이 사람들에게 뭘 뿌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