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252
#1251.
연합하다 (1)
휴대폰 액정으로 한 남자가 보인다.
깔끔한 진회색의 슈트.
분이 묻어날 것같이 눈처럼 새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트렌디한 남색의 슬림 타이.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가 신뢰감을 더해주고, 슈트 위로 걸친 롱 코트가 우아함을 완성하고 있었다.
살짝 눈매가 날카로운 게 조금 아쉽지만, 그건 흠이라고 할 수 없었다. 덕분에 이지적인 느낌이 살아나니까.
‘나쁘지 않아.’
이현수가 심호흡을 하며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이 정도면 일단 외모적인 준비는 완벽하다. 평소에는 조금 캐주얼한 차림을 선호하는 이현수지만, 지금은 선호 따위를 논할 상황이 아니었다.
꿀꺽.
크게 마른침을 삼킨 이현수가 고개를 들어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전면이 모두 유리로 이루어져 있는 커다란 건물이 그를 내려다본다.
“…….”
얼마 전, 그가 이 건물 앞에 섰을 때는 뿌듯함으로 몸을 떨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로 몸을 떠는 중이었다.
‘못해 먹겠네, 진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배어난 식은땀을 닦은 이현수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건물을 향해 다가갔다.
“충성! 실장님, 오셨습니까!”
부동자세로 인사하는 경비를 보며 이현수가 뚱한 눈을 했다.
“여기가 군대냐? 충성은 얼어 죽을.”
“경비는 원래 그렇게 인사하는 거랍니다.”
“……그래.”
쓸데없이 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이현수가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 똑바로 해라. 잡상인 들이지 말고.”
“걱정 마십시오. 이 동네 잡상인은 제가 꽉 잡았습니다.”
“……너는 경비가 천직인 것 같다?”
“헤헤, 사실 이 일이 원래 하던 일과 비슷해서 매우 만족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현수가 고개를 내젓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고생하십시오.”
“그래.”
평소라면 MK에 들른 김에 사무실부터 찾아갔을 테지만, 오늘 이현수의 눈에는 사무실 따위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 배는 더 중요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후우.”
엘리베이터 안에 설치된 거울을 보며 이현수가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보통 예의는 마음가짐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건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다.
예를 차려야 할 때, 의관을 정제하고 몸을 깨끗이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예의는 오로지 몸가짐에서 나오는 법이다.
목적한 층에 도달하자 이현수가 심호흡을 하고는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깨끗한 복도를 한참 걸어 들어간 이현수가 닫힌 문을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아니, 아니지. 미친! 내 주제에 잡기는 뭘 잡아! 호랑이한테 안 맞아 죽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 아니, 이것도 말이 안 되고.’
어쨌든 들어가야 한다.
이현수가 손을 들어 가만히 문을 두드렸다.
아니, 두드리려고 했다.
“뭐?”
하지만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귀를 찔러 들어왔다.
“뭐? 재계약을 안 해? 왜?!”
“아, 아니…… 그쪽에서 재계약을 안 하겠다는 걸 제가 뭘 어쩝니까.”
“그게 매니저란 놈이 할 말이야! 재계약 따 오는 것도 네 일이잖아!”
“……언제는 실장이라면서요?”
“실장이면 더 따 와야지! 그리고 걔들은 갑자기 왜 재계약 안 한데? 누구랑 계약하는데?”
“하민정이랑 한다는 말이 있던데…….”
“하아미이이인저어어어엉?”
손이 떨린다.
“아니, 뭔 대한민국 광고주들은 다 걸 그룹에 미쳤나! 뭔 TV가 죄다 음악 채널이여? 드라마에 걸 그룹 나오고! CF에 걸 그룹 나오고! 왜? 아주 화장실 문짝에도 걸 그룹 사진 붙여놓고 살지그래!”
“누나, 지, 진정 좀 하세요. CF 다섯 개 넘게 새로 따고, 겨우 하나 놓친 건데……. 어차피 지금 촬영 스케줄도 엄청 빡빡하잖아요. 그거 하나 날아간 것 가지…… 아아악! 던지지 말고! 아니, 던지지 말고 말로 해요! 말로! 여기 사무실에서는 물건 안 던지기로 나랑 약속했……. 아아아아아악!”
그냥 돌아갈까?
이현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야! 새로 따는 건 새로 따는 거고! 있던 거 뺐기면 기분 더 엿 같은 거 몰라서 그래?”
“그건 원래 풋풋한 어린애들이 하는…… 아니! 그건 쇠잖아요! 내려놓고! 제발!”
“하민정이라고 했어?”
“네.”
“그년 내가 다음에 걸리면 대가리 깨버릴 거야!”
이현수는 잠시 혼이 빠진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참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은 끝에 뭔가 조금 잠잠해진다.
심호흡을 한 이현수가 몇 번의 고민을 한 끝에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똑똑.
대답이 없다. 하지만 이현수는 재촉하지 않고 잠시 더 기다린 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러자 반응이 돌아온다.
“들어오세요.”
“예!”
이현수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평소 그가 출입하던 사무실과는 다른, 조금 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일단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인테리어는 곧 눈에서 사라졌다. 중앙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주변의 모습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연하.
책상에 앉은 최연하가 치켜뜬 눈으로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슬픈 얼굴을 한 한은솔이 살짝 물기 젖은 얼굴로 이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처연한 모습에서 알 수 없는 동병상련을 느낀 이현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한은솔이 터덜터덜 걸어 이현수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한은솔이 이현수를 힐끔 바라본다. 그의 눈에 미묘한 동정이 어려 있다는 것을 파악한 이현수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이현수 실장님.”
“아닙니다, 이사님! 진작 한 번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이제야 찾아뵙게 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현수가 문을 닫고는 구십 도로 허리를 숙였다.
이현수를 아는 이가 지금의 광경을 보았다면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이현수는 무릎이 가벼운 남자기는 하지만, 예의가 깍듯한 편은 아니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할지언정 저자세는 취하지 않는 사람이 이현수다.
총회 내에서 이현수에게 폴더 인사를 받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강진호에게도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하는 사람이 이현수였다.
그런 이현수가 지금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고 있다.
“인사가 너무 과한 것 아니에요? 부담스럽게. 그러지 말고, 이리 와 좀 앉으세요.”
“아…… 예, 이사님!”
하지만 이현수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대응이었다.
‘잘못 걸리면 아작난다.’
뭐? 총회의 이사들? 국무총리?
‘알 게 뭐야, 그런 양반들.’
총회의 이사들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이들이지만, 이현수는 딱히 그들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아니다.
최연하.
이현수가 세상에서 가장 껄끄러워하는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책상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와, 등골에 땀 흐르는 것 봐라.’
이현수는 그동안 험난한 삶을 살아왔다.
살아오는 와중 그가 상대한 이들 중에서는 구제불능의 살인자도 있고, 권력에 혼을 빼앗겨 버린 악마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이도 최연하처럼 이현수를 긴장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최연하가 강진호의 여자 친구이기 때문에?
천만에.
말이 통한다면 무서운 사람은 없다. 대화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현수에게 있어서 최연하는 반드시 대화를 통해서만 상대할 수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말이 안 통하는 무뢰배는 주먹으로 후드려 패고, 말이 통하는 사람은 말로 후드려 패온 이현수에게 있어서 말이 안 통하고 주먹을 쓸 수 없는 상대는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미지수의 괴물이나 다름없다.
그랬다.
말하자면 이현수에게 있어서 최연하는 세상 단 하나뿐인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앉죠.”
“네, 이사님!”
소파에 앉으며 최연하가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그렇게 깍듯하게 대하지 않으셔도 돼요. 회사로 따지면 훨씬 선배님이신데.”
“회사에서 중요한 건 경력이 아니라 직급입니다. 직급이 높다는 것은 능력이 높다는 것이고, 회사에서는 능력이 높은 사람이 당연히 더 높은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이사님, 괘념치 마십시오.”
“연배도 저보다 더…….”
“회사는 나이로 대접받는 곳에 아닙니다!”
“흐응, 그래요?”
최연하가 재미있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었다. 이현수는 부동자세로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 편하게 생각해 주십시오.”
“하지만 이 실장님이 그렇게 힘을 넣고 있으면 제가 편하게 대하기 어렵잖아요.”
“…….”
“진호 씨한테 들은 대로라면 좀 더 재미있는 분인 줄 알았는데…….”
‘뭐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회주님!’
대체 뭐라고 말을 했기에 이현수와 재미라는 말이 함께 나온단 말인가. 40이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에게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현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가 아니고…….”
뭔가 말을 하려던 최연하가 피식 웃고 말았다.
“아니에요. 긴장하시는 분, 괜히 괴롭히는 것 같네.”
“아닙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어차피 이사 자리도 그냥 감투잖아요. 자꾸 그러시면 제가 불편해요.”
“…….”
이현수가 슬쩍 최연하의 눈치를 살폈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입매를 보니 긴장된 마음이 스르륵 풀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너무 과하게 긴장했나?’
그 순간이었다.
“그년, 내가 다음에 걸리면 대가리 깨버릴 거야!”
조금 전에 들은 최연하의 울부짖음이 이현수의 뇌리에서 재생되었다. 이현수가 조금 편히 풀리려던 팔에 바짝 힘을 주었다.
‘정신 차려라, 이현수.’
이 여자는 요괴다.
아무리 잘해주는 척해도 그 근본은 어디 가지 않는다. 이 여자는 가족 외에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던 강진호를 잡고 뒤흔드는 여자다. 감히 이현수 따위가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늘은 이해해 주십시오. 앞으로 최대한 편히 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흠, 그럼 어쩔 수 없죠.”
최연하의 얼굴에 살짝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현수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저 아쉬움은 자신과 편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다. 거미줄에 먹잇감이 걸려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래, 무슨 일이시죠?”
“예, 이사님! 다름이 아니라 MK 그룹 차원에서 이사님께 요청을 드리러 왔습니다.”
“요청이요?”
“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MK에서 프랜차이즈 사업을 새로 시작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MK의 간판은 이사님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회사 차원에서 이사님께 모델을 맡아…….”
“잠시만요.”
“네?”
최연하가 밖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은솔아! 한은솔 실장!”
“예, 누나!”
“들어와라! 일이다!”
“넵!”
“…….”
한은솔이 헐레벌떡 들어와 수첩을 펴고 앉았다.
그러고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무적인 눈으로 이현수를 보며 말했다.
“최연하 배우 매니저인 한은솔입니다. 일적인 이야기는 일단 저와 하시죠.”
“……아니, 이사님.”
“아아!”
한은솔이 단박에 이현수의 말을 잘랐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 법이죠. 지금은 계약에 관한 이야기이니, 최연하 배우라고 불러주십시오. 자, 그래서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다구요?”
“…….”
이현수가 넋이 나간 얼굴로 한은솔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 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