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31
#1830.
숨막히다 (5)
드높은 고층.
마천루로 유명한 상하이에서도 유독 높은 빌딩의 고층에서 한 사내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군.’
사람의 시선이란 오묘한 법.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는 더없이 높은 빌딩들이, 이곳에서 바라보면 작고 초라해 보인다.
그래서 그는 높이 오른 이만이 볼 수 있는 이 경치를 사랑했다. 그의 발아래 숨 쉬고 있는 수많은 이들이 이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자 하지만, 그 자격은 쉽게 주어지지 않으니까.
그저 잠시잠깐 생에 다시없을 광경을 한 번쯤 눈에 담는 것이 전부. 그처럼 이 광경을 일상으로 느끼진 못하는 법이다.
“개미 같아.”
단순히 고층에 오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높이 올라선 이는 아래를 내려다볼 자격이 생긴다. 오른다는 것은 그 두 다리에 쏠리는 하중을 이겨내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그렇기에 높이 오른 이들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그 누구보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자격 없이 존중을 받는 이들을 세상에서 가장 혐오했다.
“그분께서 명하시길…….”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흑왕의 수하인 리우양의 얼굴이 그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경거망동하는 이는 용서치 않을 거라 하셨습니다.”
사내가 쿡, 낮게 웃었다.
“내가 말귀를 못 알아먹는 사람도 아니고.”
“…….”
“굳이 이렇게 찾아올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말이야, 강아지.”
강아지라는 말에 리우양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굳이 이렇게 찾아와 입을 떼지도 않았을 겁니다.”
“…….”
“당신이기에 찾아온 겁니다. 다름 아닌 당신이기에.”
사내가 낮게 웃었다.
“이거, 영 신뢰받지 못하는 모양이군. 흑왕에 대한 내 충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텐데?”
“그건 의심하지 않습니다.”
리우양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문제는 그 방식의 문제지요. 당신의 과격성은 확실히 문제입니다. 당신의 방식으로 흑왕을 따르는 게 도움될 때도 있지만, 이번만큼은 아닙니다.”
사내가 살짝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
그의 시선이 리우양에게 고정된다. 짐승처럼 번들대는 그 눈빛을 본 순간, 리우양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압박을 느껴야 했다.
“흑왕께서 우리에게 내린 지시는 하나다. 스스로를 채찍질해 강해질 것. 그리고 결코 목적에 방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을 것.”
까드득.
사내의 손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움켜쥐어졌다.
“그런데 네 말은 그자를 건드리는 게 우리의 목적에 방해가 된다는 건가?”
“이해를 못하시는군.”
리우양이 이를 갈 듯 말했다.
“방해가 되고 방해가 되지 않고는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흑왕께서 지시를 내렸다는 것, 그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만히 리우양과 시선을 마주친 채 침묵하던 사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해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러니 절대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이건 제가 아닌 흑왕의 경고입니다.”
“자꾸 강조할 것 없어. 나라고 목숨이 열 개쯤 있는 건 아니니까.”
“…….”
“그분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분노를 사고 싶어하지는 않겠지. 나라면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그 말이 진심이길 바랍니다.”
“왜? 너는 내가 죽기를 원하지 않나?”
리우양이 피식 웃었다.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해도 사냥을 잘하는 개라면 삶기에는 아까운 법이지요.”
“좋은 반격이었어, 강아지.”
사내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너무 그렇게 도발하지 말도록 해. 네가 그분의 총애를 얻고 있는 건 알지만, 때때로 그 자리에 네가 없다고 과연 그분께서 화를 내실까 궁금해지기도 하니까.”
“…….”
“알아들었나, 강아지?”
“명심하죠.”
리우양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웬만하면 다시 보지 말자고.”
“저도 그걸 바랍니다.”
리우양이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가자, 사내가 흥미를 잃었다는 듯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그의 시선에 환상적인 도시의 야경이 다시 들어온다.
‘영 뒤틀린단 말이지.’
리우양의 능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이루는 힘은 폭력만이 아니니까. 권력자의 비위를 완벽하게 맞춰 그를 등에 업는 것 역시 힘이다. 지금 저 리우양처럼 말이다.
그가 거슬려 하는 것은 리우양 따위가 목에 힘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그가 자신들의 위에 있는 것처럼 굴 때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멍청한 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흑왕을 알지 못하는 건 그들이 아니라 바로 리우양이다. 흑왕은 쓸모가 있는 자에게는 더없이 관대하지만, 그 쓸모가 다한 이에게는 북풍한설보다 더 냉정하다.
지금이야 그가 쓸모가 있겠지. 하지만 그 쓸모는 곧 다할 것이다.
사내는 곧 리우양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더 흥미가 가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몸을 돌린 그가 커다란 책상에 앉았다. 그러고는 마우스를 움직여 올라온 보고서를 켰다.
“강진호라…….”
사내의 입가가 비틀렸다.
보고서 속의 강진호에 대한 사항들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던 사내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건드리면 벌을 내리신다고 하셨나이까?”
웃음이 절로 났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창왕에게 이런 명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저 다른 삼왕조차도 지금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자중하라는 명을 받은 게 전부다.
몇 마디 안 되는 말에 불과하지만, 그 말이 창왕이 얼마나 그를 신경 쓰고 있는지 너무도 명확하게 드러낸다.
“주제에 맞지 않아.”
사내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알고 있다. 창왕의 강진호에 대한 관심은 그 무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서 나온다는 것을.
하지만 사내는 그 점을 더욱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창왕에게 인정받기 위해 백 년의 세월 동안 지옥을 겪어온 그들은 무엇이 된다는 말인가.
창왕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자는 무력으로 그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법. 저 어중이떠중이 같은 놈에게 주어질 만한 관심이 아니다!
그들은 창왕의 수족이 되기 위해 자신을 버렸다. 스스로 왕으로 불리기에 충분한 이들임에도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렇기에 인정할 수 없다.
절대로.
“강진호…… 적천마존.”
이름은 몇 번이고 들었지.
사내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과거, 천하를 지배했던 마교의 절대자. 무림사를 통틀어 다시없을 마귀. 그리고…….
“고금제일인이라 이건가.”
사내가 낄낄대며 웃었다.
무림이라는 세상을 경험한 이에게 그 이름은 너무도 높고 높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있어서 그 이름은 갈증의 상징과도 같았다.
‘뭐가 고금제일이냐.’
명성을 날린다는 건 때때로 괴이하기까지 하다.
누군가는 더없이 강한 힘을 지녔음에도 평화롭기 짝이 없는 세상에 태어나 자신의 힘을 알릴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반면, 누군가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힘만으로도 난세에 군림하여 역사에 그 이름을 새겨 넣는다.
자신을 증명하고 또 증명해 천하제일이라는 칭호를 얻고, 더는 오를 곳에 없는 위치에 선 이가 들어야 하는 말.
― 적천마존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그 말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는가.
그자를 내 앞으로 끌고 오면 목을 잘라 자신을 증명하겠다 외쳐도 이미 죽은 사람과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다. 죽어 신화가 되어버린 이는 살아 있는 사람의 힘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법.
하지만 마침내 시대를 넘어 그가 적천마존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게 되었다.
‘지금은 모양이 조금 빠지지만…….’
물론 고금제일의 자리는 감히 그가 노릴 것이 아니다. 그건 흑왕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적천마존보다 더 강하다는 걸 증명하고, 그가 이룬 업적이 그저 운 좋은 시대에 다시 태어났기에 이룰 수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건 그와는 다른 문제였다.
“농담이 너무 과하시군.”
이런 군침 도는 먹이를 앞에 두고 무슨 수로 참으란 말인가. 그가 아무리 훈련이 잘된 사냥개라고는 하지만, 이건 그의 인내심을 넘어서는 일이다.
‘몇이나 움직일까?’
분명 그 말고도 적천마존을 노리는 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흑왕의 경고는 그런 이들의 엉덩이를 끌어내리기에 충분하겠지.
하지만 그는 다르다.
“하나쯤은 있어야지.”
앞뒤 재지 않고 들이받는 미친놈이.
“자리에 걸맞지 않은 놈이 대접을 받는 건 영 참을 수가 없다니까.”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왕을 보좌하는 칼날.
그중 가장 광포하다 불리는 자, 백연홍(白燕虹―바이옌홍)이 그 날카로운 이를 강진호를 향해 들이밀고 있었다.
* * *
“상하이에 다녀왔습니다.”
“빨리 돌아왔군.”
가운을 입은 채 한 손에 와인을 들고 있는 청마를 보며 리우양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충분히 경고를 했지만, 먹힐지 먹히지 않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송구하지만, 제 생각에는 직접 한 번 그들을 모아 경고를 하는 것이…….”
“들어먹는 눈치가 아니었던 모양이군.”
“……예.”
“골치 아프다니까.”
말과는 다르게 청마의 얼굴은 꽤 유쾌해 보였다.
“세상이란 참 귀찮게 이루어져 있어. 잘난 놈들은 통제가 어렵고, 통제하기 쉬운 놈들은 무능력하고.”
“백연홍은 그중에서도 특별합니다.”
“특별히 말귀를 못 알아 처먹지.”
청마가 피식 웃었다.
놈이 일을 벌이기 전에 나서서 무릎 꿇리는 일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다.
“연락해 오라 할까요?”
“내버려 둬.”
“……예?”
“내버려 두라고.”
청마가 와인을 가만히 음미하고는 입을 열었다.
“한 세상의 왕으로 군림하던 놈들이다. 힘으로 누를수록 반발한다. 그럼 나중에는 더 큰 사고를 치겠지.”
“흑왕께서 직접 나서신다면 그들은 감히 반발하지 못할 겁니다.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 저를 통해 전해지는 명령은 흑왕의 위험을 한 푼도 담아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야. 그리고…….”
청마가 묘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나름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무슨 의미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쪽도 그리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라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머리는 좋은데 이성보다 본능과 감정이 앞서는 타입이라고 해야 하나?”
“…….”
“아무리 말로 설명하고, 이쪽의 전력을 들이밀어도 실감하지 못할 거야. 몸으로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일에는 큰 관심이 없는 양반이라 말이야.”
“그에게 이쪽의 힘을 실감하게 만든다…….”
“좋지.”
“하지만 그러다가 그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럼 거기까지인 사람이지.”
청마가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착각하지 마, 리우양. 물론 그는 나의 친우고, 더없이 그리운 사람이다. 어쩌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존중하는 사람일지도 모르지.”
“…….”
“하지만 존중에는 자격이 필요한 법이야. 그는 적천이지만, 또한 적천이 아니지. 그러니 이번 기회에 내게 다시 한번 자신을 증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청마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본 리우양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은 도무지 이 사람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세상에 이 사람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지켜보겠습니다.”
“대신…….”
청마가 뭔가를 리우양에게 지시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좋아.”
“예, 그럼.”
방을 빠져나가는 리우양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청마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백연홍이라…….”
강진호도 알아야 한다.
청마가 무엇을 만들어내고, 무엇을 이룩했는지.
그 눈과 몸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