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79
#1878.
직시하다 (3)
스스스슥.
스스스슥.
펜이 비어 있는 종이 위를 빠르게 채우기 시작했다. 알아보기 어려운 한자와 한글이 뒤섞이며 뜻 모를 내용들을 쉴 새 없이 늘어놓는다.
스스슥.
현란하기 짝이 없는 펜질.
마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듯, 혹은 허공에서 검무를 추듯 이어지던 펜질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스스스슥! 스스스스슥!
점점 더 거칠어지던 펜이 조금씩 떨린다 싶더니, 이내 말 그대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촤아아악!
펜이 종이를 순식간에 찢어발겼다.
“빌어먹을! 내가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으아아아아아아!”
종이를 채워 나가던 이가 펜을 집어 던지더니, 말 그대로 괴성을 내지르며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아악! 아아아아아악!”
“지, 진정하십시오, 사부님!”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발작하는 이, 방진훈의 눈이 광기를 담아 번들거렸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고! 내가 씨발, 학교 다닐 때도 이 지랄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 나이 처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하, 학교 다닐 때 안 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뭐, 이 새끼야?”
만류하던 천태훈이 자신에게 꽂히는, 방진훈의 잡아먹을 듯한 시선을 보고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방진훈도 나름 평소에는 농담이 통하는 사람이지만, 지금만큼은 농담의 농 자라도 꺼냈다가는 턱주가리가 날아갈 판이다.
“내가, 빌어먹을, 내가…….”
방진훈이 책상 주변에 널려 있는 비급들을 보며 넋을 놓았다. 덜덜 떨리는 손이 그의 얼굴을 감싼다.
“내가 왜 이 짓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이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는 모습은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지만, 천태훈은 그런 방진훈을 진심으로 동정했다.
“뭐 어쩌겠습니까, 방법이 이것뿐이라는데.”
“남 일이라고, 이 새끼가?”
방진훈이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릴 듯 움찔움찔하자, 천태훈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회, 회주님이 저 패면 안 된다고 하신 것 잊지 마십시오!”
“…….”
방진훈이 주먹을 들어 올린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어휴, 내가 이런 새끼를 제자라고.”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은 방진훈이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의자에 앉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산더미 같은 비급에 질려 버린 그가 다시금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어디서 고문을 받는 게 낫지. 빌어먹을, 옛날 안기부 시절에도 이렇게는 안 했어, 이렇게는!”
“거, 무슨 겪어보신 것처럼 말씀하십니까.”
“들어는 봤다, 이 새끼야!”
“악!”
날아든 비급에 얻어맞은 천태훈이 바닥을 굴렀다.
“회, 회주님이 때리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때렸으면 네가 지금 살아 있을 것 같아? 이게 때린 거냐, 때린 거야? 내가 때리는 게 뭔지 보여줄까?”
“…….”
더 말을 해봐야 매를 벌 뿐이라고 생각한 천태훈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끄응, 이러다 내가 먼저 죽지.”
방진훈이 힘없는 시선으로 비급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다 익혀!”
“익히라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해하라는 거지.”
“이해하면 익힌 거지, 새끼야!”
“그게 좀 다르긴 하죠.”
이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도무지 답을 찾아낼 수 없던 방진훈에게 강진호는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니까…….”
방진훈이 이를 갈며 말했다.
“종사라고 불린 놈들은 대부분 무학의 벽을 뛰어넘은 놈들이다.”
“그러셨죠.”
“그건 무학을 창안하려면 벽을 넘을 정도의 이해도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지만, 거꾸로 말하면 무학을 창안할 정도의 이해도를 가질 수 있으면 벽 따위는 이미 넘은 것과 같다.”
“……그러셨죠?”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방진훈이 입에서 불을 뿜었다.
“뭔 사람을 등신 취급 해도 유분수지! 그걸 앞뒤를 바꾼다고 해결이 돼, 해결이? 이게 뭔 개소리야!”
“그래도 회주님이 말씀하신 건데, 개소리는 좀…….”
“그럼 말 소리냐, 이 새끼야!”
천태훈이 다시 한번 날아든 비급을 재빨리 낚아챘다.
“하, 함부로 던지시면 안 됩니다. 이게 어떤 것들인데.”
“끄으으응.”
그리하여 지금 이곳에는 전국에서 수집한 비급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심지어 강진호가 손을 써 홍왕계를 통해 중국에서 입수한 비급들마저 한 트럭이 넘게 쌓여 있었다.
무학을 익히는 자는 기본적으로 집중력이 높아지고, 연산력이 뛰어나진다. 방진훈 정도 되는 고수라면 웬만한 명문대생은 찜 쪄 먹을 정도의 두뇌를 가지게 되는 게 보통이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모조리 한자, 그것도 고어가 섞인 한자로 쓰여진 비급의 산을 보면 사법고시 수석 합격자도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리고 돌아설 판이다.
그런데 평생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방진훈에게 이걸 다 익히라고 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포기하자.”
방진훈이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뭘 어떻게 해볼 수 있어야 노력이라도 해보지. 이건 안 돼. 이건 안 되는 일이야.”
“그러지 마시고…….”
“니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 말라니까?”
“제 일이 아니긴 왜 아닙니까. 저도 사부님 덕분에 꼼짝없이 여기 갇혀서 이러고 있는데.”
“끄으응.”
방진훈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축 늘어졌다.
‘못해먹겠네.’
어떻게든 노력을 하려 했다.
장민은 장민대로, 바토르는 바토르대로, 그리고 위긴스도 분명 위긴스 나름의 방법으로 벽을 뛰어넘을 것이다.
스스로 그들과 비교될 수 있는 강자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방진훈 역시 총회의 이사. 아니, 이사라는 직위를 떠나서도 남 일인 것처럼 손 놓은 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래서 나름은 노력을 해봤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근본적인 의문을 떨쳐 내기가 힘들었다.
‘이런다고 진짜 뭐가 달라지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어? 사, 사부님.”
“응?”
“저기! 회주님 오십니다!”
방진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집무실 너머 창문으로 강진호가 일련의 무리들을 이끌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 양반은 또 언제 복귀했대?”
강진호의 뒤에서 걸어오는 위긴스까지 확인한 방진훈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저 자신만만한 걸음걸이를 보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분명 위긴스도 해답을 찾아 파워 업을 한 거겠지.
유일하게 남아 있던 일반인 동료를 잃어버린 방진훈이 머리를 감쌌다.
“이러면 나만 똥 되는 건데!”
“……말씀 좀 곱게.”
“시끄러워, 이 새끼야!”
두 사람이 그렇게 다정(?)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강진호를 위시로 한 무리들이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허허…….”
위긴스가 집무실 안 광경을 보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걸 다?”
장민과 바토르는 이미 본 광경이라 딱히 큰 반응이 없지만, 이 모습을 처음 보는 위긴스의 눈에는 이 광경이 꽤나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이 정도 양이면 도서관 하나 정도는 채울 수 있어 보이는데. 그냥 다 읽는 것도 시간이 엄청 소모되겠군요. 과연…… 공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위긴스가 재미있다는 듯 방진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방진훈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뭐가 그렇게 재밌습니까?”
“재미있고말고. 이건 마법을 익히는 자들의 연구실에서는 꽤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거든. 그런데 거기에 서 있는 이가 다름 아닌 자네 아닌가. 당연히 재미있지.”
방진훈이 이를 갈았다.
저 히죽히죽 웃어 대는 재수 없는 면상에 정권 한 방 날릴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지만, 한눈에 봐도 이 양반의 상태가 예전과 달랐다.
아마 지금 방진훈이 위긴스와 싸운다면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하게 될 게 분명했다.
“흐음.”
위긴스가 턱을 긁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건 동양의 방식이라기보다는 서양의 방식에 가깝군요. 이해를 통해 경지를 끌어올린다. 동양의 방식은 이해보다는 체득의 가까운 방식이라 이해했는데.”
“그렇지.”
강진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방진훈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 날뛰기 시작했다.
“거보십시오! 맞는 방식이 아니라잖습니까!”
“…….”
“차라리 저를 패십쇼! 맞고 구르는 게 낫지, 이건 죽어도 못하겠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딱히 중원에서 없던 방식도 아냐.”
“……예?”
“흔한 이야기지. 중원 최후의 보루였던 소림으로 쳐들어간 이들이 방장을 비롯한 모두를 쓰러뜨리고 불태우려고 하던 찰나, 장경각에서 비급을 관리하던 노승이 휘적휘적 걸어 나와 쳐들어온 이들을 박살 내버린다는 이야기.”
“……전형적인 클리셰네요.”
“나도 자주 듣기는 했다만, 그건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강진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 실제로 있던 이야기야.”
“엥?”
“그게 말입니까?”
즉각적으로 돌아온 반응에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와전되고 각색되기는 했지만, 틀 자체는 그리 다르지 않아.”
“세상에.”
“그리고 그건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에 말로 퍼진 것을 뿐, 실제로 장경각 같은 비급 서고를 관리하던 이들이 평생 무학을 몸으로 익혀온 이들보다 더 강해지는 케이스는 꽤 흔했어.”
“그게 말이…….”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무학이라는 것은 익히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아무리 대단한 무인이라고 해도 평생 익히는 무학의 수는 스무 가지를 넘지 않아.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전에서 쓸 수 있을 만큼 체득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굳이 실전을 치를 필요가 없는 이들은 더 많은 무학을 머리로 익힌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자신만의 체계를 완성해 가는 법이지.”
방진훈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건 그놈들이 원래 그런 타입이니 그런 것 아닙니까! 저는 몸을 쓰는 타입이라고요!”
강진호가 희게 웃었다.
“그럼 이제부터 바꿔봐야지.”
“회주님!”
“다른 방법이 없어.”
강진호의 담담한 목소리에 방진훈이 입을 다물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아무리 빨라도 오 년은 걸린다.”
“…….”
“그리고 그 오 년 뒤에는 총회의 이름이 남아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
방진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나만 묻고 싶은데…….”
“말해.”
“이게 정말 되는 겁니까? 벌써 여기에 있는 비급 중 삼분의 일은 본 것 같은데, 도무지 이런 방법으로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해해야지.”
“하지만…….”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면 가능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방 이사라면.”
확신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말없이 강진호를 마주 보던 방진훈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도 못 가게 만드시네.”
“미안하군.”
“미안할 게 뭐 있습니까. 회주님도 나 좋으라고 하는 건데. 그런데 제가 이런 식으로 뭔가를 해본 적이 없어서 도무지 감을 못 잡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강진호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어려운가.’
이건 강진호도 도울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상황을 어찌 풀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려는 찰나.
“흐음.”
위긴스가 재미있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로드.”
“왜?”
“제가 도와보겠습니다.”
“음?”
위긴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이런 연구와 체계화는 이쪽의 전문 분야입니다. 물론 다뤄야 하는 것이 다르니 완전히 이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도움은 될 겁니다.”
“음.”
강진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으면 도와줘.”
“알겠습니다.”
위긴스가 맑디맑은 웃음을 지으며 방진훈을 바라보았다.
“잘 부탁하지, 방 이사. 대신 내 방식은 조금 힘들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해주게나.”
“…….”
방진훈이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냥 안 하면 안 됩니까?”
“되겠어?”
“……썩을.”
방진훈이 다시 색다른 지옥에 빠져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