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02
#1901.
혼란하다 (1)
“지원 요청은?”
“없습니다.”
위긴스가 가스라니 자라난 수염을 거칠게 쓸어낸다.
“자존심의 문제인가, 아니면 아직은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전자일 확률이 높겠죠.”
“그리 멍청한 이는 아니었을 텐데?”
이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자존심의 문제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실리의 문제입니다. 지원 요청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거지만, 같은 요청이라고 해도 언제 어떤 타이밍에 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지는 법 아닙니까.”
“그도 그렇긴 하지만.”
위긴스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적어도 나라면 조금의 위험도 더 감수하고 싶지는 않을 텐데.’
흑왕계가 얼마나 강력한가는 그들도 알고, 홍왕계도 안다. 적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력을 강화해 두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기본적인 상식이다.
“어떤 이유가 붙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알량한 자존심이 죽어갈 이들의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을 텐데?”
“중국인들이 체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체면의 문제만은 아닐 겁니다. 지시를 내리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쪽에서 그쪽의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게 제일 클 겁니다.”
“음?”
위긴스가 무슨 말이냐는 듯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간단하죠. 지금 저들은 외곽에서부터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은 짧은 시간 만에 지부를 몰살시키고 뒤로 빠지기를 반복할 겁니다.”
“음, 알겠군.”
위긴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옆에 있는 지부에서 지원이 도착하기 전에 지부가 박살 난다.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부가 지원을 가는 속도를 높이거나 각 지부의 전력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총회가 합류한다고 지부의 지원 속도가 빨라질 리는 없으니, 결국 이 사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지원을 간 총회의 인원을 갈기갈기 찢어서 각 지부에 배치해야 한다는 건데…….
“받을 수가 없는 제안이로군.”
“그렇죠.”
위긴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을 간다는 것만 생각하고, 전력이 어떻게 활용될 것인지까지는 깊이 고민하지 못했다.
“그럼 지금은 지원의 의미가 없다는 뜻인가?”
“애초에 이건…….”
이현수가 앞에 펼쳐진 중국의 지도를 보며 눈을 좁혔다.
“지원이라는 건 적의 실체가 존재할 때 의미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 홍왕계가 맞이하고 있는 건, 어떤 의미로는 역사상 단 한 번도 벌어진 적이 없는, 극단적인 게릴라전입니다.”
“……그렇지.”
“게릴라전이라는 건 전력이 강한 적을 상대하는 소수가 지형의 이점을 바탕으로 할 때 의미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흑왕계는 소수지만 오히려 부분부분에서는 홍왕계의 전력을 압도합니다.”
“…….”
“상대하려 들수록 더욱 수렁에 빠질 겁니다.”
위긴스가 침중한 눈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건 정말 대응책이 없다.
이 넓은 중국에서 불과 열 명에 불과한 이들을 잡는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13억의 인구 중 열 사람이라는 건 드넓은 해안에서 열 개의 모래 알갱이를 찾아내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일이니까.
그 모래 알갱이들이 더없이 특별한 모래 알갱이들이 있다고 해도, 겉보기에 다른 모래 알갱이들과 별 차이가 없다면 찾아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갉아 먹힌다는 건가?”
“아마도…….”
이현수가 빤히 지도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저라면 그렇게 할 겁니다.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을 이미 찾아낸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외곽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면 아무리 응집력이 대단한 홍왕계라고 해도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죠.”
“그렇겠군.”
“그럼 그 균열을 파고들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말은 쉽다.
그래, 말은 너무도 쉬웠다.
하지만 이건 소수의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흑왕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이다.
만약 총회가 이런 식으로 홍왕계를 상대했다면?
‘갉아 먹는 만큼 이쪽도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십이비도들처럼 지원 오는 이들을 피해 손쉽게 몸을 빼내지도 못할 것이다. 지부를 무너뜨리는 데 전력을 낭비하고, 그 때부터 다시 지옥 같은 추적에 시달려야 한다.
피해를 감수하고 진행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애초부터 견적이 나오지 않는 일이다.
그럼 비슷한 일이 가능한 이사들과 강진호를 동원하면?
‘본대가 당하지.’
차이커창이라면 굳이 외곽을 방어할 필요도 없이 주 전력으로 총회의 본단을 쳐버릴 것이다.
그럼 이사들이 멀리 있는 본대는 홍왕계의 전력을 감당할 수 없다. 애초에 주 전력을 외곽으로 돌린다는 건 그런 의미니까.
하지만 흑왕계에는 보호해야 할 본단도 없고, 지켜야 할 이도 없다.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전략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거의 사기에 가깝지.’
확실한 것은 하나.
전략을 수립하는 이는 누구나 현실이라는 장벽에 제약을 받는다. 상대의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공격을 할 수 있으면, 그 전략은 반드시 이득을 볼 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전략을 현실에서 보기가 어려운 이유는 상대의 등 뒤로 들키지 않게 유효한 수준의 병력을 이송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면, 실제로 그게 가능하다 해도 적진으로 들어간 병력을 살려 나오는 게 너무도 어렵기 때문이다.
적을 완벽히 무너뜨릴 전략 같은 건 누구라도 세울 수 있다. 문제는 그걸 현실에서 이뤄낼 수 있는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흑왕계는 그 현실의 제약에서 가장 자유로운 세력 중 하나였다. 그들은 말도 안 되는 기동력과 말도 안 되는 전력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으며, 딱히 약점이라 부를 만한 부분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새삼 자신들이 누구를 상대해야 하는지를 실감한 이현수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홍왕계를 동정하고 있을 일이 아니야.’
이건 홍왕계뿐 아니라 그들의 앞에도 들이닥친 현실이다. 당장 흑왕이 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공략한다고 해도 대처법이 마땅치 않다.
‘한국은 중국에 비하면 좁으니까 저리 휘둘리지는 않겠지만.’
딱히 지부라 할 것도 없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럼…….”
위긴스가 턱을 쓸어내렸다.
“흑왕은 이런 식으로 홍왕계를 무너뜨릴 거다?”
“예, 아마도.”
“흐음.”
위긴스가 영 얹짢은 눈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생각이 다르십니까?”
“다르다기보다는…….”
위긴스의 눈이 점점 더 가라앉는다.
“오히려 나는 근본적인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근본적인 부분?”
“이게 정말 흑왕계와 홍왕계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일까?”
그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이현수가 고개를 들어 위긴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전쟁?’
이미 수없는 사람이 죽어 나갔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악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게 전쟁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 눈빛을 이해한다는 듯 위긴스가 입을 열었다.
“의도가 다르다는 거지.”
“의도라면…….”
“흑왕계의 목표가 정말 홍왕계를 무너뜨리고 승리하는 걸까?”
“…….”
이현수가 입을 다물었다.
“그럴 의도였다면 지금까지 은연자중하며 기다릴 이유도 없었을 거야. 분명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 이 말이지.”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흑왕계가 손쉽게 승기를 잡아버려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노리는 게 따로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군. 하지만 하나가 걸려.”
“어떤…….”
“로드께서 말씀하셨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확실히 강진호가 그런 말을 했다.
“이들이 노리는 게 완전한 승리라면, 네 말대로 천천히 홍왕계를 무너뜨려 가겠지. 리스크 없이 이득만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 괜히 속도를 높이는 짓은 머리가 조금이라도 있는 이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테니까.”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노리는 게 홍왕계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면?”
“…….”
“뭔가 일어날 걸세,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이현수가 굳은 얼굴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중국이 그려지 저 지도가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 * *
상하이.
수도인 베이징을 뛰어넘는 중국 최대 인구의 도시이자, 중국 경제의 중심지.
드높이 솟아오른 빌딩들은 지난 세월 동안 중국이 얼마나 눈부시게 발전해 왔는지를 증명하는 상징과도 같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50층은 가뿐히 넘을 듯 솟아오른 빌딩 중 하나에 한 사내가 천천히 들어선다.
유리로 만들어진 문을 통과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1층을 지키고 있던 데스크의 직원들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운동화에 옅은색 청바지, 그리고 검은 라운드티와 가볍게 걸친 플란넬 셔츠, 머리에 쓴 야구 모자까지…….
딱히 특별할 것 없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어이! 누가 들어오라고 했어!”
하지만 그런 청년을 맞이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그리 곱지 않았다.
“여긴 일반인 출입 금지야! 당장 나가!”
험악한 목소리.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까지 챙겨 쓴 덩치 큰 가드들이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웬만한 이라면 겁을 집어먹고 바로 발을 뺄 만도 하건만, 청년은 딱히 겁이 나지 않는지 태연한 동작으로 등에 멘 백팩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못 들었어?”
“들었지.”
지이이이익.
사내가 백팩의 지퍼를 열고는 그 안에서 뭔가 길죽한 쇳덩어리 같은 것을 꺼냈다.
가드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꺼낸 물건은 딱히 위험해보이지 않았다.
“끌어내기 전에 당장 나가!”
“걱정하지 마. 곧 나갈 테니까.”
사내가 빙긋 웃었다.
그 순간.
척! 척! 척! 척!
사내가 꺼낸 긴 쇠봉 안에서 또 다른 부분이 튀어나온다 싶더니, 이내 길이가 2미터는 될 듯한 긴 장봉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뭐…….”
사내가 백팩 안으로 손을 넣어 안에서 무언가를 다시 꺼냈다. 그가 꺼낸 것이 날카로운 창두(槍頭)라는 것을 알아챈 이들이 흠칫 놀라 얼굴을 굳혔다.
끼리리릭!
사내가 쇠봉의 끝에 창두를 결합한다. 그러자 금세 2미터 길이의 긴 장창이 만들어졌다.
퉁!
창을 내려놓듯 바닥에 가볍게 찍은 사내가 빙긋 웃었다.
“너희를 다 죽이면 나가지 말라고 해도 나갈 테니, 걱정할 것 없어.”
가드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알아. 홍왕계 새끼들이 돈 벌어먹는 곳이지.”
가드들이 입을 다물었다.
홍왕계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건, 저자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의미다.
“서, 설마…….”
“흐음, 보자.”
사내가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았다.
“이 건물 안에 있는 놈들은 모두 홍왕계라 이거지?”
무시해야 할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이들은 어째서인지 입을 열고 말았다.
“여, 여긴 민간인도 있어! 관계 없는 이도 있다고!”
“아, 그래?”
사내.
신창(神槍)이 빙긋 웃었다.
“상관 없지.”
퉁!
바닥을 한 번 친 창두가 가드들을 겨누었다.
“나는 딱히 그런 걸 가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
본능적으로 뭔가 벌어진다는 걸 직감한 가드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막아!”
누군가가 경보를 눌렀는지 건물 전체에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이렌이 신호라도 되었다는 듯 가드들이 신창에게 달려들었다.
신창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뒤틀려 올라갔다.
“나를 막으려면 홍왕 정도는 불러와.”
악귀 같은 미소를 지은 그가 가드들에게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