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78
#2077.
이어지다 (2)
딱히 그 질문이 강진호의 무언가를 건드렸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새삼스러운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굳이 각오까지 필요한 일인가.’
다른 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면 그저 웃어버렸을 것이다.
그는 적천마존.
수많은 이의 피를 그 손에 적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혈향을 새긴 존재. 그 깊고 깊은 죄 위에 하나의 목숨을 더 추가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강진호가 이 말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에게 이 질문을 한 이가 다름 아닌 장민이기 때문이다. 장민은 그를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현수나 최연하, 심지어는 그의 가족들보다 더.
그런 이가 이런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반응을 본 장민이 깊은 숨을 토해냈다.
“마존이시여…….”
입술을 깨문 장민이 마치 애원하듯, 또한 충고하듯 말했다.
“각오를 굳히셔야 합니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 방향 모를 간절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새삼스러운 소린지 모르겠군.”
강진호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겠지.”
“…….”
당황스러운 질문이다.
이길 자신이 있느냐도 아니고, 죽일 자신이 있느냐니.
강진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내가 그만두자고 한다고 그만둘 놈도 아니잖아? 저놈의 손에 죽어줄 의리 따위는 없어.”
충분한 대답이 되고도 남을 말이지만, 장민은 그 말에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
장민이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은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죽여야 할 순간이 오면 어쩔 수 없이 죽인다. 그런 각오로는 패하실 겁니다.”
“…….”
강진호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장민, 걱정이 되는 건 알겠는데…… 나는 장민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 않습니다, 마존이시여.”
“……음?”
“이 세상에서 마존에 대해 가장 모르는 이가 하나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바로 마존 자신이십니다.”
“…….”
강진호의 눈이 찌푸려졌다.
해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을 본 장민이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대답을 시작했다. 그가 왜 지금 이런 말을 늘어놓고 있는지.
“마존께서 지금까지 싸워온 이들은 모두가 마존의 적이었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일이지요. 마존께 있어서 적이란 그 목숨을 빼앗음에 있어서 망설임이 필요하지 않은 이를 의미하니까요.”
강진호가 입을 다물었다.
“적에게는 무자비할 것, 일체의 인정을 베풀지 않을 것. 그게 마존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장민이 흔들리는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 명확한 적이 아닌 이들, 그 경계에 있는 이들에게 마존께서는 언제나 관용을 베푸셨지요. 저 홍왕이 그렇고, 마스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존께서는 한 번이라도 마존께 고개를 숙인 이의 목숨은 취한 적이 없으십니다.”
그 말에 움찔한 것은 강진호가 아니라 이현수였다.
장민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당황해하던 이현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현수가 안일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애초에 강진호는 살인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가 일본의 무인 일천의 목숨을 그 손으로 모조리 끊어놓은 것을 이현수의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장로님의 말도 분명히 맞다.’
적에게는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적이 아닌 이에게는?
예를 들자면 마스터.
그가 마스터에게 내린 형벌은 어쩌면 죽음보다 더 잔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현수는 이해했다.
‘그 일을 저지른 이가 마스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였다면?’
강진호가 친분을 느끼지 않는 누군가였다면, 그가 살아서 이 승부에 나오는 일이 정말 가능했을까?
그제야 이현수는 장민이 저토록 강진호를 걱정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위긴스가 왜 마지막 순간에 강진호에게 당부를 했는지도 이해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이현수도 알고 있지 않았던가.
강진호는 의외로 마음 약한 면이 있는 사람이다. 물론 이현수나 장민도 강진호가 흑왕에게 패배할 마음으로 승부에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강진호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필사의 일격으로 흑왕을 죽이고 승리를 얻어낼 수 있는 그 순간이 왔을 때, 강진호는 정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흑왕의 목을 벨 수 있을까?
어쩌면 망설일지도 모른다.
정말 아주 찰나의 순간 동안만이라도.
그리고…….
아마 지금부터 벌어질 강진호와 흑왕의 승부는 분명 그 찰나의 망설임만으로도 결과가 뒤바뀌는, 치열하기 짝이 없는 전투가 될 게 분명하지 않은가.
“회주님.”
불안이 치솟은 이현수가 저도 모르게 강진호를 불렀다.
하지만 강진호의 반응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찰칵.
강진호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인다. 그러고는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피식 웃어버린 강진호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어간다.
“그럴 일은 없어.”
“……마존이시여.”
“잊은 모양이군, 장민.”
강진호의 고개가 흑왕 쪽으로 살짝 돌아간다. 중앙으로 걸어 나오는 그를 두 눈에 담은 강진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미 저놈을 한 번 죽였어.”
“…….”
“한 번 한 일을 두 번 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강진호가 손을 뻗어 장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할 것 없어. 나도 뭐가 더 중요한지 이해 못할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니니까. 그리고…….”
강진호가 옅게 웃었다.
어쩌면 지금 그의 미소는 다른 이들에게는 조금 섬뜩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모르고 있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와 청마의 관계는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말랑말랑한 게 아니다.
그때, 지금껏 잠자코 모두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방진훈이 입을 열었다.
“회주님.”
“음?”
“총회에는 아직 당신이 필요합니다.”
“…….”
방진훈이 눈가를 실룩였다.
“다른 양반들은 회주님이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은퇴라도 할 것처럼 구는데, 솔직히 저는 그게 말도 안 되는 개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총회는 누가 운영합니까?”
“그야…….”
“전 못합니다.”
“…….”
방진훈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남의 인생을 그렇게 쉽게 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럴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평소에도 감당 못했는데, 이런 세상에서 제가 무슨 수로 총회를 이끕니까?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총회의 회주가 무인계의 왕이 될 텐데.”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방진훈이 진저리를 쳤다.
“그러니까 적당히 던져 버릴 생각 하지 마시고, 확실하게 이기고 오십시오. 거기까지는 무조건 회주님의 책임입니다. 발을 잡고 늘어지든, 이로 물어뜯든, 어떻게든 반드시 이기고 오십시오.”
강진호가 낮게 웃었다.
이렇게 힘이 안 나는 응원이 또 있겠냐마는, 방진훈에게 있어서는 이게 최선이겠지.
“조금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데.”
강진호가 조금 거칠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내가 언제 진 적이 있던가?”
“그야…….”
“다를 건 없어.”
강진호가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으로 던졌다.
“이번에도 말이야.”
설득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굳이 주장할 필요도 없다.
강진호는 자신의 삶으로 이미 자신을 증명했으니까. 적어도 전투라는 측면에 있어서만큼은 그를 의심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이 없다.
“애초에 저놈과 나 사이에 뭔 정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설사 그런 게 있다고 한들 내가 저놈을 죽이는 걸 망설일 이유는 없어. 나는 저놈이 만들려고 하는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거든.”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이 싸움을 시작한 이유다. 돌고 돌아 결국은 다시 거기에서 시작이다.
“그런 세상에 내 사람들을 살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
장민이 입술을 깨문다.
그러고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마존이시여.”
“그래.”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앞에 선 이들을 하나하나 바라본 강진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때.
“회, 회주님!”
이현수의 입에서 다급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강진호가 고개만 돌려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꼭…….”
이현수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꼭 이기고 돌아오십시오.”
이현수를 빤히 바라보던 강진호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은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
이현수가 주먹을 움켜쥐고는 그런 강진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율배반적인 심정이다.
그는 강진호를 세상 누구보다 신뢰한다. 강진호의 패배 같은 건 머릿속에 그려지지도 않는다. 반드시 그가 이기고 돌아오리라 믿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지금껏 없던 수준의 불안함이었다.
‘부디…….’
함께 싸울 수는 없다.
하지만 한 발 뒤에 서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제발.’
이현수가 더없이 간절한 눈으로 강진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강진호는 자신의 등에 꽂히는 그 시선들을 생생하게 느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상한 기분이군.’
등 뒤에서 감정이 밀려와 소용돌이치는 것만 같다.
아니, 아니다.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건 저들이 아니라 바로 강진호다. 흑왕을 향해 나아가는 강진호의 가슴속에서 온갖 감정이 제멋대로 뒤섞여 휘몰아친다.
증오, 기쁨, 서글픔, 반가움, 아쉬움, 연민.
겨우 그 정도가 아니겠지.
스스로의 안에 이토록 다양한 감정이 살아남아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어때?’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흑왕을 바라보며 강진호가 입가를 뒤틀었다.
‘너도 나와 같은 기분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아니, 어쩌면 청마는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감정의 요동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죽었다 생각한 이를 다시 만난 것에 불과하지만, 청마는 무려 백 년의 시간 동안 그를 기다려 왔으니까.
그 모든 것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두 사람이 천천히 서로를 향해 걸어 나간다.
3미터.
그 기운으로 사람을 죽이기에 충분한 거리. 하지만 두 사람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1미터.
평범한 이들에게도 가까운 거리.
하지만 그곳에 이르고도 강진호와 흑왕은 서로를 향해 한 발을 더 내디뎠다.
탁.
이윽고 그들의 발이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은 서로 손이 닿을 거리에 마주 서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헤어졌다 만난 다시없을 친구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던 강진호와 흑왕의 입가에 동시에 미소가 피어난다.
놀랍도록 서로 닮아 있는 미소가.
세 번의 삶과 지독히도 긴 시간을 넘어.
바로 지금.
두 사람의 인연이 다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