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98
#497.
시작하다 (2)
갑자기 부담스럽게 시선이 모이자 강진호가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잘 없으니까.”
“확실히 그렇지.”
강은영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오빠, 사고 친 건 아니지?”
“너, 밥그릇 들고 저리 내려가서 밥 먹어.”
“엄마! 내가 뭐 못할 말 했어?”
“엄마 미싱기 샀다. 네 입으로 연습하기 전에 쉿.”
“넵.”
백현정이 깔끔하게 강은영의 난을 제압했다.
백현정과 강유환이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강진호가 뒷머리를 긁었다.
“어쩌면 조금 죄송스러운 말일 수도 있어서요.”
“궁금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보렴.”
“음…….”
강진호가 숟가락으로 국을 두어 번 뒤적거렸다. 아무래도 이런 부분은 쉽게 말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름이 아니고…… 제 통장에 있는 돈 있잖아요.”
“응? 돈?”
“예.”
백현정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강진호의 입에서 돈이라는 말이 나온 게 대체 얼마 만인가.
다른 이라면 온갖 사치를 부리고 다닐 만큼의 돈을 가지고도 목 늘어난 트레이닝복이나 입고 다니는 아들이었다. 백현정이 한 번씩 오래된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사다 놓지 않으면 고등학교 때 입던 옷을 아직도 입을 아들내미가 아닌가.
때로는 ‘내가 대체 저놈을 어떻게 키웠기에 저런 신선 같은 아들내미가 나왔나’ 싶을 정도로 돈에 무관심한 강진호였다. 그런 강진호의 입에서 돈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게 너무 어색하고 이상했다.
“그래, 말해보거라.”
하지만 백현정과는 다르게 강유환은 차분하게 강진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돈을 좀 사용해 볼까 합니다.”
강유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이 생긴 모양이구나.”
“예.”
“그래. 그런데 이게 굳이 우리에게 말을 해야 할 일이냐?”
“일단…… 생각하시는 것보다 금액이 좀 돼서요. 이걸 저 혼자 독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상관없다.”
“그래도…….”
“상관없다니까.”
강유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건 네 돈이야. 네 돈을 네가 쓴다는데 누가 뭐라고 한단 말이냐.”
“그래도 제가 그 돈을 어디다 쓸 건지 정도는 말씀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진호야.”
“예.”
“독립 좀 해라.”
“……예?”
강유환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살짝 지루하다는 투로 말했다.
“너도 나이가 있잖아. 그런데 언제까지 아버지가 네가 돈 쓰고 일하는 데 일일이 입을 떼줘야 하냐.”
강진호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보통 이런 반응이 나오지는 않을 텐데.
“아빠는 어제 너희 떼어놓고 엄마랑 놀러 가니까 참 좋더라.”
“이이는! 못하는 소리가 없어!”
“뭐 어때. 애들도 알아야지.”
얼굴을 붉히는 백현정과는 다르게 강유환은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너희 보살핀다고 내 인생 제대로 못 챙기고 산 게 벌써 이십 년이 넘었다. 이쯤 되었으면 너희도 양심이 있을 테니 알아서 좀 해야 할 것 아냐? 안 그래?”
“……그, 그렇습니다.”
진심으로 짜증을 담아서 말하는 강유환의 포스에 강진호가 쪼그라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돈 어디다 쓴다는 것까지 내가 일일이 듣고 의견을 이야기해 줘야 하는 거냐? 네가 유치원생이야?”
“아뇨.”
“알아서 하자. 알아서 좀!”
“……네.”
뭔가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것 같지는 않았는데…….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밤새 짠 것이 허탈해질 지경이었다.
“아들.”
“예, 아버지.”
“이게 다 아들 믿어서 하는 말이란 거 알지?”
“예.”
강유환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네가 그 나이가 됐으면, 네가 하는 선택 하나하나가 굳이 내가 보지 않아도 올바르게 되어야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너를 잘못 키운 거고. 그렇지?”
“예.”
“그래. 그러니까 얼른 밥 먹고 나가. 나는 오늘 너희 엄마랑 영화 보러 갈 테니까.”
“……가게 문 안 여세요?”
“야, 인마. 세상에 어느 카페 사장이 하루 종일 카페에 붙어 있냐. 아르바이트는 괜히 있냐?”
“처음에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커피는 직접 내려야 한다면서 카페에 붙어 사셨던 게 아버지…….”
“이게 이제 머리가 굵었다고 한마디를 안 지려고 하네?”
이건 폭압이었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 무자비한 독재자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어야 할 어머니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짝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여하튼 빨리 밥 먹고 나가. 너도.”
“응? 아빠, 나는 오늘 스케줄도 없는데?”
“너는 제발 좀 밖으로 좀 다녀. 네 나이 애들은 다들 놀러 다니기 바쁘고, 남자친구 만나기 바쁘던데, 너는 왜 틈만 나면 집에 들어와서 굴러 다니냐! 왜!”
“다른 애들이 발랑 까진 거고, 내가 조신한 거지!”
“아빠는 조신한 딸 안 바란다.”
“헐, 세상에.”
“여하튼 나가! 둘 다 나가!”
그렇게 강진호는 집에서 쫓겨나듯 나갈 수밖에 없었다.
부우우우웅.
집에서 나온 강진호는 힘차게 액셀을 밟았다.
‘참 독특한 분이시라니까.’
실제로 살아온 시간으로 따진다면 강진호는 강유환보다 연장자다. 아마 강유환보다 훨씬 많은 것을 겪고, 훨씬 더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강진호는 강유환에게서 아직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강진호가 강유환보다 나은 것은 나이를 조금 더 먹었다는 것뿐이다. 아직 스스로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라는 자각이 없는 강진호에게 강유환은 말 그대로 완성된 어른이었다.
‘예전에는 그런 걸 몰랐지.’
첫 번째 삶에서 그가 기억하는 강유환은 언제나 밝긴 하지만 특별한 구석이 없는 아버지였다. 그나 동생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기억은 있지만, 지금처럼 본받고 싶은 어른이라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
강진호는 자신의 영향으로 강유환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강유환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달라진 것은 그의 눈높이였다.
예전의 그는 강유환의 대단함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이 없었다. 하지만 두 번의 삶을 겪고 지금의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나아졌고, 그러다 보니 강유환의 특별함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진호는 새삼 자신이 강유환의 아들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은 평범하지 않다.
평범하지 않은 아버지를 둔 것도 힘든 일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자식을 둔 것도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강유환은강진호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면서도 그가 엇나가지 않게 적절히 조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마 강진호가 평범한 부모를 두었다면, 지금쯤 꽤나 많은 트러블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새삼 감사하네.’
이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가 가는 곳에는 최고의 환경을 가졌음에도 서로를 불신하는 가족이 있었으니까.
저 멀리 보이는 재경의 사옥을 보며 강진호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왔느냐?”
“예.”
재경에 들른 강진호는 조규민을 찾지 않고 바로 황정후를 방문했다. 용무는 조규민에게 있지만, 그래도 재경에 들르면 황정후에게 얼굴을 내보이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삶과 살아온 시간을 밝힌 이후부터 황정후가 강진호를 아랫사람으로 여기지 않게 됐지만, 그래도 몸에 밴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별일 없으시죠?”
“……별일이 없어서 문제다.”
“네?”
강진호의 말에 황정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라는 건 그런 거거든. 별일이 없으면 영향력을 잃게 되지.”
“음…….”
“적당하게 지금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보면 경쟁 기업들은 새로운 아이템을 들고 나오기 마련이고, 신경도 쓰지 않던 후발 주자들이 순식간에 치고 올라온단 말이야. 그래서 기업이라는 것은 언제나 치열해야 해. 사고도 터지고, 손해도 보고, 그러면서 다시 또 개발하고, 깎아내고…… 그게 반복이 되어야 하는데…….”
황정후가 고개를 내저었다.
“요즘은 동력이 영 없는 것 같단 말이야.”
“항상 최선을 다할 수는 없으니까요. 쉬어 가는 구간도 있어야죠.”
“아니야, 그게 아니야.”
황정후가 소파 쪽을 가리켰다. 황정후가 재떨이를 꺼내며 강진호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강진호가 담배를 받아 불을 붙이자 황정후도 담배를 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딱히 새로운 게 생각이 나지를 않아. 나도 늙은 게지.”
“아직 정정하십니다.”
“몸만 정정하면 뭐해, 머리가 늙었는데. 예전에는 내 머릿속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넘쳐 났지. 시간이 없어서 그걸 다 활용하지 못한다는 게 짜증이 날 정도였어. 그런데 지금은…… 음, 그래. 지금은 대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
황정후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나도 이제는 늙었나 보네. 아니, 지친 걸지도 모르겠군.”
강진호가 가만히 황정후를 바라보았다.
항상 엄살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그저 엄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강진호가 조금은 심각한 눈으로 황정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정후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이 정도 고민이야 다들 하고 사는 거 아닌가. 그냥 오랜만에 투정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왔기에 투정부려 봤네.”
“투정이요?”
“그래, 투정. 내가 누구에게 이런 불만을 늘어놓겠는가. 다들 나보고 슈퍼맨이 되어달라고 하는 사람들인데.”
황정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가 그에게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중압감이니까.
“됐네.”
황정후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규민이 놈은 비서실에 있을 테니, 얼른 가보게.”
“네?”
“조규민이 찾아온 것 아닌가?”
“……맞습니다.”
“뒷방 늙은이에게 인사치레까지 해줬으면 내가 고맙다고 해야지. 바쁜 사람 시간 뺏고 싶은 생각 없으니, 어여 가보게.”
“그렇게 바쁘지는…….”
“어서.”
강진호가 담배를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중에 같이 식사라도 한 번 하시죠.”
“자네가 사는 건가?”
“네.”
“끌끌끌, 그럼 가야지. 대신에 엄청 비싼 걸 먹을 테니까 각오하게.”
강진호가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렸다.
강진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황정후는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찰칵.
‘끊으라고 했는데.’
주치의가 더 살고 싶으면 당장에라도 담배를 끊으라고 했다. 하지만 황정후는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끊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으니까.
강진호가 그를 살려낸 이후로부터 오로지 재경의 정상화라는 목적을 위해 살아왔다. 이제는 그 모든 목적을 이루었다.
그리고 느꼈다.
이제는 재경에도,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황정후가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고는 천천히 내뱉었다. 뿌연 담배 연기가 허공에서 천천히 흩어졌다.
어쩌면 인생이란 저 담배 연기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덧없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황정후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