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39
#538.
정리하다 (3)
부우우우웅.
차는 천천히 나아갔다.
이 도로를 달릴 때, 강진호는 보통 두 가지 스타일 중 하나를 고수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밟거나, 교통경찰이 무서워서 갑갑한 마음을 참으며 살살 밟거나.
하지만 지금은 둘 다 아니었다.
차가 그리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지 않았지만, 강진호는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그저 빨리 가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멍청하긴 하군.’
보통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 인생의 배움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어찌 보면 지금의 강진호도 비슷한 상황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알고 보면 그 내막은 전혀 달랐다.
강진호는 확실하게 강유환보다 연상이란 말이다.
이 기괴한 운명의 비틀림은 자신보다 어린 아버지를 모시게 되는 기현상을 낳고 말았다. 뭐,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아버지는 아버지니까.
문제는 강진호가 지금 아버지에게서 인생의 조언을 얻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이를 헛으로 먹었어.’
강진호가 나잇값을 못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강유환이 나이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걸까?
후자가 되면 모두에게 좋은 결과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강진호는 전자가 진실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의 인생은 뭐라고 해야 할까…….
싸우고 또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웠다.
연이어지는 끝없는 싸움과 분쟁과 전투 속에 늘어난 것이라고는 상대를 의심하는 법과 효율적으로 전투에서 이기는 법,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이긴 상대를 완전히 복속시키는 법, 회유가 되지 않는 상대를 완벽히 몰락시키는…….
‘답도 없네.’
강진호는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 나이가 어린 이들보다 더 지혜로울 거라는 선입견은 기나긴 그들의 삶에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었을 거라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강진호처럼 오로지 한길만 파고든 이들은 더 오랜 시간을 살았다고 해서 딱히 더 많은 것을 경험해 보지는 못한 것이다.
강진호는 요즘 그 사실을 절절히 실감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나이에 대해서요.”
“……저도 아직은 쌩쌩합니다만?”
“그런 뜻은 아닙니다.”
살짝 불편해하는 것 같은 나이트 위긴스의 반응에 강진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쪽의 나이가 많다고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나이로 따지자면 제가 더 많을 테니까요.”
“음, 그렇겠죠.”
그 말을 듣고 다시 실감하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아들뻘에 불과한 사람에게 몸을 낮춘다는 것은 그로서도 껄끄러운 일이었으니까.
“슈발리에들이 제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군요.”
“흠…….”
강진호가 액셀을 밟으며 말했다.
“이유를 한 번 더 확인하죠.”
“이유요?”
“예, 이유. 확실한 것이 좋으니까요.”
“무슨 이유를 말하시는 건지?”
“그전에…….”
강진호가 앞을 응시한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이쪽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은 변화가 없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나이트 위긴스는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어째서죠?”
“물론…….”
“더 강해지고 싶다. 좋은 이유죠. 무학에 목숨을 걸고 있는 무인들이라면 당연히 그런 것에 목숨을 걸겠죠. 하지만 그게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강진호는 답지 않게 냉정하게 말했다.
“사람이라는 것은 평생에 걸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마련입니다.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은 당신이 평생을 걸쳐서 올라간 자리겠죠. 그런데 그 자리를 자신의 발로 걷어차고 훨씬 더 못한 곳을 찾아온다는 것은 제 상식으로는 납득이 안 갑니다.”
“…….”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면, 당신을 온전히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해 보시죠. 제가 납득할 만한 완벽한 이유를 말입니다.”
나이트 위긴스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게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이건 강진호가 그에게 내리는 마지막 시험과도 같았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나이트 위긴스가 진중하게 말했다.
“일단 말씀하신 부분을 긍정하는 것부터 해야겠군요. 맞습니다. 저는 평생에 걸쳐 지금의 직위에 올랐습니다. 나이트. 이해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나이트란 자리는 그리 녹록한 자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더군요.”
“로드, 아니, 지금은 이렇게 불러야겠군요. 강진호 씨, 당신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나이트란 자리는 훨씬 더 명예롭고 위중한 자리입니다. 큰 힘에 큰 책임이 따른다는 그 빤한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요?”
나이트 위긴스가 조금은 씁쓸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저 역시 최선을 다해 이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보람이 있고, 명예가 있었죠. 제가 세상의 평화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느끼게 됐죠. 이건 세상에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원탁이 정한 법칙에 세상을 끼워 맞추는 과정이라는 걸 말입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정확히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선의 차이지.’
아래에서 높은 탑을 보면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사람의 기본적인 속성이었다. 밑에서 바라볼 때, 드높은 탑은 멋져 보이고 정복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니까.
하지만 막상 그 탑 위에 올라가면 알게 된다.
아래에서 생각한 것보다 위에서 보는 광경이 그리 특별할 것이 없음을 말이다. 오히려 위에서 좀 더 자세히 내려다보는 순간,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어긋남을 실감하게 된다.
그도 예전에 느낀 것이다.
“그럼에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맡고 있는 것을 모두 내려놓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릴 테니까요.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이들의 모습이 미담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실제로 그리할 수 있는 사람이 흔치 않기 때문이잖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고민과 고민을 거듭하던 찰나에 보게 된 거죠. 지금까지 제가 고민해 온 것들의 해답을.”
“그게 힘이다?”
“아뇨, 아닙니다.”
나이트 위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힘이 아닙니다, 강진호 씨. 제가 본 것은 힘이 아니에요. 제가 본 것은 조직이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사람?”
“네. 그 어떤 조직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의도를 백 퍼센트 반영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당연한 거였죠. 모든 것은 조직의 법칙과 규정 아래에서 통제됩니다. 심지어 가장 위에 서 있는 이들도 법칙이라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게 당연하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그렇지 않더군요.”
“…….”
“조직이 있기에 존재하는 초인이 아니라, 초인이 있기에 존재하는 조직이라는…… 제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태가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과연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디까지 더 나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나도 당신처럼 될 수 있을까?”
나이트 위긴스는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겁니다. 어린 시절 처음 본 슈퍼맨의 모습. 나이가 들면서 그건 그저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버린 거죠. 그래서 현실에 순응했습니다. 저는 결코 슈퍼맨이 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있던 거죠, 이 세상에는. 형태는 다르고, 그 행동은 다를지라도 슈퍼맨들이 말입니다.”
“이상한 이야기군요. 그쪽은 이미 동양 쪽의 정보를 알고 있었잖습니까.”
“더 강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실감하지 못한 자유로움을 본 것이죠.”
강진호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뭔가 명확한 이유를 듣고 싶었건만, 이쪽은 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문제는…… 그렇다고 내치기에는 나이트 위긴스의 얼굴이 너무 순수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속내를 파악하는 능력 같은 것은 없지만, 저 얼굴로 저런 말을 태연하게 늘어놓는 것이 연기라면 이 사람은 총회가 아니라 할리우드로 가야 한다.
‘나쁘지 않은데…….’
미노년이라는 특이성이 있는 배역으로는 할리우드 원톱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었다.
강진호는 떠오르는 잡념을 날려 버리고는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서 결론을 내자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지위를 포기하고 이쪽에서 새로운 것을 시작해 보고 싶다?”
“그렇습니다. 그쪽에서도 저를 필요로 한다면 말입니다, 로드.”
은근슬쩍 다시 바뀐 호칭에 강진호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필요야 하지.
아니, 지금 가장 필요한 이가 나이트 위긴스 같은 서양 무학의 이해자였다. 어쩌면 그 무학은 단순히 총회뿐 아니라 강진호의 전력도 상승시켜 줄지 모른다.
“합류를 환영하지.”
“감사합니다, 로드.”
“아마…… 모두가 환영하겠지.”
하지만 강진호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원탁이라구요?”
이현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서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 동작이 마치 ‘내가 이 꼴을 보고 있느니, 그냥 저기로 뛰어내리는 게 편하지’라는 뜻처럼 느껴져 이현수의 팔을 꽉 잡아버리고 만 방진훈이었다.
“그렇다는군.”
“……네, 원탁이군요. 그리고 그 원탁의 마스터라 이거죠.”
“음…….”
태연하게 대답하는 강진호를 보며 이현수는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냥 날 죽여라, 죽여.’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란 것이 있는 법이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상사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빡세게 시키면서 나 몰라라 하는 상사가 아니었다. 자신이 부하 직원에게 무슨 일을 시키고 있는지 모르는 상사였다.
‘군대에서 천 원 줄 테니 가서 콜라랑 햄버거랑 커피 사 오고, 오백 원 남겨오라고 하는 놈이 차라리 양심적이지.’
강진호의 가장 큰 문제는 자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세상 사람은 다 강진호 같은 슈퍼맨이 아니란 말이다.
“강진호 씨, 그러니까…….”
이현수가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강진호와 세상 걱정 없다는 듯이 웃고 있는 나이트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아니!
강진호야 그렇다 치고, 저 인간은 무려 원탁의 나이트 아닌가!
그도 소문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그 원탁이다. 그리고 그 나이트다.
그런데 그만한 위치에 있던 인간이 어째서 자신이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에 대한 자각이 없단 말인가!
“저기…….”
이현수가 푸들푸들 떨리는 얼굴로 말했다.
“나이트 위긴스라고 하셨죠?”
유창한 영어에 나이트 위긴스가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미스터 리라고 하셨죠. 확실히 이쪽이 로드보다는 발음이 낫군요. 로드는 한 번씩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이야기를 해서 혼났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 예…… 칭찬에 감사…… 아니, 이게 아니고.”
이현수가 떨리는 얼굴로 물었다.
“호,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 상황에 대해 원탁은 알고 있는 거죠? 상황 정리를 하고 오신 게…….”
“음…….”
나이트 위긴스가 산뜻하게 말했다.
“원탁은 모릅니다. 이제 알려야죠.”
“……나가 죽어, 썩을 놈아.”
마지막 말은 그래도 한국말로 나와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