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95
#594.
교전하다 (4)
모두의 시선이 이성택에게로 모였다.
이성택은 그 시선을 받으며 다급하게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누가 회주의 연락을 받았냐는 말이오! 회주는 지금 어디에 계시오!”
다들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그도 그럴 만하다.
지금 들어온 이가 갑자기 저리 호들갑을 떠는데 누가 좋은 눈으로 보겠는가.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이까?”
“회주는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소이다. 언제 그 양반이 출정한다고 술을 푼 적이 있었단 말이오?”
“거참…….”
송영무 장로가 대놓고 싫은 기색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이 이사. 내가 연락을 받았소. 보여 드리오이까?”
“……송 장로님이 받으셨다구요?”
“그렇소. 그래서 내가 사람을 모았소. 옛소! 보시오.”
송영무가 품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이성택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이성택은 선뜻 손을 뻗어 그 휴대폰을 받아 들지 못했다.
그건 송 장로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의미나 다름없는 일이다.
“쯧쯧쯧.”
송영무는 이성택이 건네받지 않자 혀를 차며 휴대폰을 회수했다.
“이보시오, 이성택 이사.”
“예.”
“저만 똑똑한 거 아니오. 저만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오.”
“…….”
“우리도 늙었소. 그리고 회주도 나이가 들었소. 젊은 혈기만 가득하던 그때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이성택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새 활줄은 당겨놓아도 늘어나는 수준에서 끝나지만, 낡은 활은 팽팽하게 계속 당겨놓으면 결국 끊어지기 마련이오. 이보시오, 이 이사. 의욕이 있는 것은 좋지만, 현실을 잊으면 안 되오. 우리도 이제 나이가 있단 말이오. 계속 긴장하다 보면 사고가 나기 마련이오. 회주가 현명하신 거지.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 않소. 예전과 같이 하려다 이런 사단이 벌어졌으면, 이제는 우리도 달라져야지.”
이성택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듣기에는 바른말이었다.
그래, 송영무의 말이 맞다. 자신들은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방향은 아니었다. 이게 어딜 봐서 더 나아지는 거란 말인가. 퇴보하는 것이지.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이성택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억지를 부리다가는 그의 입장만 더 난처해진다.
“너무 그러지 맙시다. 이 이사도 좋은 뜻에서 한 말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요. 다들 좋은 뜻이지.”
“좋은 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끼리도 좋아야지요.”
“허허. 그 말이 맞지요, 그 말이 맞아요. 내가 괜히 성질을 부렸네. 이래서 늙으면 주책이라는 거라니까. 허허허허.”
분위기가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한 순배 다시 술이 돌고 나서 송영무가 이성택을 보며 말했다.
“이 이사, 내가 말이 과했네. 사과합세.”
“아닙니다, 장로님. 제가 실수한 거지요. 죄송합니다. 요즘 자꾸 마음이 급해서.”
“다들 그렇지.”
송영문의 눈에 회한이 묻어났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회주가 자리를 빼앗기고 나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얼마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는지를 알겠더구만.”
“……그렇습니다.”
송영무가 얼굴을 굳혔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실수를 저질렀소. 회주가 방진훈의 세력과 자웅을 겨룰 때 좀 더 적극적으로 회주를 옹호하고, 그의 주변에 세력을 쌓아 올려야 했소. 하지만 그저 일상적인 다툼이겠거니 하고 반쯤 방관한 것이 작금의 사태를 불러왔소.”
이성택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게 잘못이었던가.
아니다.
냉정하게 봐서 이중걸은 방진훈에게 패배하지 않았다. 세력 싸움으로 갔다면 패배할 리도 없었다. 이중걸이 패한 이유는 오로지 강진호 때문이다.
그 강진호의 출현을 예측하고 방비하지 못한 것이 회주의, 그리고 자신들의 패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송영무는 강진호라는 이름을 쏙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토록이나 두려운가.’
그렇다면 왜 싸운단 말인가. 방구석에 처박혀서 바둑이나 둘 것이지.
“하지만 이번은 아니오. 이번만은 아니오. 나는 최선을 다해서 회주를 지원할 것이오. 목숨마저 버릴 각오로 말이오. 그러고 나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오.”
이성택은 조금 언짢은 시선으로 송영무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동안은 대체 어떻게 참았을까?
하기야 그동안은 조 이사가…….
‘조 이사?’
이성택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 이사가 보이지 않았다.
‘왜 조 이사도 없는 거지?’
회주야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이런 자리에 조 이사가 없다는 것은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저, 송 장로님?”
“음?”
송영무가 고개를 돌려 이성택을 바라보았다.
“회주님은 안 오십니까?”
“회주님께서는 이런 자리에 자신이 끼면 분위기가 무거워진다고 오늘은 참석하지 않는다 하셨소이다.”
“그럼 조 이사님은요?”
“조 이사? 그러고 보니 조 이사가 늦는군.”
송영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는 조 이사는 시간관념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웬만해서는 약속에 늦는 적이 없는 사람인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늦고 있었다.
“최근 회주님이 시킨 일을 한다고 워낙에 바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송영무가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회주님도 참 이상하시지.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조 이사에게만 일을 시킨단 말인가. 우리가 못미더운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하하하! 송 장로님, 사실 우리가 회주를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 격에 그런 자잘한 일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회주께서 배려를 해주시는 게지요.”
“그렇겠지. 그래, 그렇겠지.”
껄껄 웃는 웃음소리, 그리고 커다란 목소리.
이성택의 눈빛이 점점 가라앉았다.
‘희망이 있는 건가?’
실감이 난다.
이곳은 가라앉는 배였다.
파도를 헤치고 전진하는 배에서는 이런 왁자지껄한 소리가 나지 않는다. 제각각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가 할 일을 하고, 나아갈 방향을 의논하기에 바쁘다.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든 일이 부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징조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런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산전수전을 겪다 보면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극적으로 해결되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하기 마련이고, 그게 뇌리에 강렬하게 박히게 된다.
그러면 나중에 비슷한 일을 맞이할 때, 과거의 그때처럼 어떻게든 해결이 될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이 생겨 버리는 것이다.
이성적인 자라면 그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우연은 두 번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만…….
‘이성이 흐려져 있지.’
적어도 여기에 모여 있는 자들에게서 이성의 자락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노물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나이가 들어서 노물인 게 아니다. 나아갈 용기가 없이 과거를 돌아보는 순간, 사람은 더 이상 젊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성택의 무릎이 들썩거렸다.
이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이중걸이 제아무리 대단한 계획을 만들어냈다고 하더라도 이런 이들과 함께라면 성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들 각오를 굳히시오.”
그런 이성택의 심정을 아는 건지, 송영무가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중요한 일을 하게 될 거요. 이 일을 얼마나 훌륭히 처리해 내느냐에 따라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느냐, 아니면 뒷방 늙은이로 썩어가느냐가 정해지게 되오.”
‘뒷방 늙은이로 썩어가는 미래 따위는 없어.’
관 속에서 썩어가겠지.
대체 이 나이브함은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거사가 실패했는데도 강진호가 그들을 축출해 내는 정도로 끝날 거라 믿는 건가? 대체 무슨 근거로?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이들의 인식도, 지금 흘러가는 방향도…… 뭔가가 분명히 잘못되어 있었다.
이성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다. 더 이상은 아니었다. 이들과 함께했다가는 그의 미래는 목이 잘려 야산에 묻히는 것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으음?”
송영무가 고개를 들어 이성택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오?”
“급한 일이 생겨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급한 일이라…….”
송영무가 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왜? 강진호라도 만나야 하오? 퇴근하기 전에 가서 이런 일이 있다고 꼰지르시기라도 하려고?”
“장로님!”
“앉으시오.”
“정말 급한…….”
“앉아!”
송영무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방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도리를 모르는군. 이곳이 어떤 자리인 줄 알고 일어나겠다는 건가. 여기는…….”
뭔가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려던 송영무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바깥이 뭔가 소란스럽다.
“뭔가?”
“……나가볼까요?”
“잠시.”
송영무가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바깥의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 여긴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용무가 있어 왔다지 않습니다.”
“여긴 안 됩니다! 여긴 예약한 분들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일행이니까.”
“아니,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분이신데…….”
“같은 곳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만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 상관께서 지금 화가 나신 것 같거든요.”
“아…….”
송영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송영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감히 그들의 모임을 방해하는 저 건방진 불청객을 단죄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불청객은 과감하게도 그들이 있는 곳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하지만 들어오지 못했다.
황당하게도 말이다.
벌컥 열린 문 뒤로 거대한 몸이 보인다.
도무지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육체.
사람 하나야 아무 무리 없이 지나갈 수 있는 문이 그의 앞에서는 마치 개구멍처럼 보일 정도였다.
“확실히 이곳은 문이 작군.”
우드드드득.
안으로 사람 머리보다 더 큰 손이 불쑥 들어오더니, 문 좌우의 벽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튼튼한 벽이 마치 어린아이가 만든 장난감집처럼 힘없이 뜯겨 나갔다.
뚜둑, 우드득, 우득.
현실감이 사라진다.
갑자기 나타난 거인.
그리고 거인의 손짓에 따라 뜯겨 나가는 벽.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건 꿈이 아니었다.
뜯겨 나가 두 배로 커진 문 안으로 거인이 들어온다. 그만큼이나 뜯어내 넓혔음에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다들 모여 있군.”
안으로 들어온 거인은 미소를 지으며 장로와 이사들을 둘러보았다.
“만나서 반갑다. 나는 바토르라고 한다. 내 이름을 들어본 이가 있는지 모르겠군.”
“……라고 하십니다.”
바토르를 따라 장다징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들이 맞겠지.”
“예, 바토르 님. 이현수 씨가 말한 대로라면 이들입니다.”
“그렇군. 과연 본 적 있는 얼굴이 있는 것 같은데.”
이성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저자는…….
“다, 당신이 왜 여기에?”
“음…….”
바토르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 입안으로 드러난 새하얀 이를 본 장로들은 알 수 없는 공포감에 몸을 떨었다.
“나는 바토르다. 여기에 온 목적은, 음…….”
바토르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청소라고 해야겠군. 다들 잘 부탁하지.”
초원의 용사 바토르가 대한민국의 무인계에 그 이름을 새겨 넣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