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10
109화 미래를 위한 포석(3)
다음 날, 나는 백진성 아저씨께 명운표국을 돕기로 결정했다고 보고했다.
백진성 아저씨가 복잡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뭘 했기에 저 녀석이 하루 만에 넘어가?”
백진성 아저씨도 내가 도울 것이라 판단하긴 하셨다. 다만, 꽤나 지난할 것으로 예상하신 모양이다.
뭐, 나야 목적이 명확했기에 결정이 빨랐지만, 대놓고 설명하긴 곤란한 내용이긴 했다.
주소란이야 내가 내건 조건을 밝히긴 곤란할 테고.
묵묵부답인 나와 주소란을 꺼림칙한 눈으로 바라보던 백진성 아저씨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아니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이게 어디서 순둥순둥한 척이야. 내가 널 아는데!”
“아니, 제가 뭘 어쨌다고…….”
이상한 거로 생사람을 잡으신다.
……라고 항의하긴 껄끄러운 것이 사실이다.
아무래도 설아 누나의 부친이라는 입장상, 또래의 소녀에게 절대복종을 요구했다는 점이 밝혀지면 오해받기 딱 좋다.
“이화야, 네가 좀 말해 봐라. 둘이 이상한 거 안 했니?”
“…….”
“너도 참 일관성 있구나.”
관성적으로 행한 일인지, 아니면 그것이 내게 좋을 거라 생각한 것인지 이화는 백진성 아저씨의 말을 사뿐히 씹었다.
“뭐, 아무튼.”
쓸데없는 서두를 잘라내고, 백진성 아저씨가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많이 힘들 거다. 명운표국을 재건하는 일은 쉽지 않아. 명운표국은 표국으로서 가장 근본적인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설령 이전 명운표국과 거래하던 상인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명운표국에 일을 맡길까?”
“……아니겠죠.”
표국의 중심이던 국주가 사망했고, 중추를 맡던 주력들이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증명된 것이 없는 소녀와 믿음직스럽지 못한 이류 무인 하나.
없던 선입견도 생길 판이다.
“그저 표국을 세울 목적이라면 새로운 이름을 걸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수월할 거다. 최소한 선입견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너는 그럴 생각이 없지?”
“……예.”
현실의 냉엄함을 논하는 백진성 아저씨의 말에 주소란이 바짓가랑이를 꾸욱 움켜쥐었다.
“어제도 말했듯, 아이의 앞길을 열어 주는 것은 어른의 몫이다. 그래, 네가 그 길을 택했으니 나는 나대로 길을 열어 주마. 어디 그 길에서 고생해 봐라. 저 녀석이 옆에 있다면 적어도 남는 것은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난 인솔자로 내정되었던 모양이다.
뭐, 백진성 아저씨가 나를 언급했을 때부터 각오한 부분이다.
“잘할 수 있겠지?”
“일단, 무공만큼은 다른 말이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해 놓을 겁니다.”
“조지겠단 거네? 고생길이 훤하구나. 뭐, 그게 맞겠지.”
대충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짐작이 가는지 백진성 아저씨가 피식 웃었다.
“무호 녀석도 데리고 가거라. 표국의 후계자로 기르며 가르친 게 있으니 상호 얻는 것이 많을 거다.”
“그 녀석이야 당연히 챙겨 갈 생각이었고요.”
“그래? 그럼 더 이상 내가 할 말은 없겠다.”
백진성 아저씨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나와 주소란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
백무호가 합류한 이상,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무공이다. 적어도 혼자 수련할 수 있고, 이후 신입들을 교육시킬 수 있을 정도로 기반을 다져야 한다.
얼마간은 명운표국에 머물러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또 집을 나가겠다는 소리에 어머니는 한숨을 쉬시고, 동생은 자꾸 혼잣말로 단단한 수추(手紐)를 찾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내 천상에서의 만수무강이 걸린 일이라.’
백진성 아저씨의 평가대로, 명운표국의 행보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는 내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어느 의미로 내가 걷게 되는 길이 더 험하고 지난할 것이다. 당연히 나는 이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무호와 이화는 당연히 동행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설아 누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주소란의 처지에 대해 들어서인지 조용히 응원해 주었다.
범각이 동행하길 꺼리며 사소한 저항이 있었지만, 무난하게 진압했다.
다만, 여기에 생각지도 못한 동행이 하나 합류했다.
“……절대복종이요?”
장소월 소저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어째 익숙한 눈빛이다.
“쓰레기.”
“그건 네 머릿속 이야기겠지.”
백무호가 은근슬쩍 끼어들어 판을 어지럽히려 했기에 즉시 수습했다.
“무공에 관해선 어설픈 타협은 위험하니까요.”
“그건…… 그렇긴 하지만…….”
“기왕 손댄 거, 어설프게 끝낼 생각은 없습니다.”
제대로 무공을 수련한 사람이라면, 수련 중 어설픈 정이 개입되는 것이 얼마나 큰 화를 부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납득했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감사합니다.”
주소란과 명일서는 무척 감격한 얼굴이다.
보람이 느껴지는 반응이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
백무호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무공을 봐준다고 했지?”
“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여러 가지를 가늠하는 표정이다.
무공 하나만 집중하면 되는 나와는 달리, 백무호는 표국 운영 전반을 신경 써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난이도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나야 사부님들이라는 반칙성 수단이 있는 만큼 이번 일로 가장 고생해야 할 사람은 백무호일지도 모른다.
그런 백무호가 이를 확인한다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가르칠 것은 단기간에 효과를 보긴 어려워. 말했다시피 정말 제대로 가르칠 생각이니까.”
명운표국은 이후 무림의 잘못된 무공 흐름을 바로잡는 교두보가 되어야 한다. 어설프게 할 생각 따윈 없다.
백무호도 대충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처음 계획했던 계책은 나중으로 넘겨야겠네.”
“뭘 어쩔 생각이었는데?”
“홍무문에 도전하려고 했지.”
“그건 너무 나간 거 아니냐?”
명운표국의 주력을 쓸어 버린 것은 홍무문이다.
양쪽 모두 중신상회에 놀아난 것이기에 진정한 원흉은 중신상회라 할 것이지만, 내막을 모르는 세간에서 볼 때 명운표국을 무너트린 것은 홍무문이다.
즉, 명운표국의 힘으로 홍무문을 꺾어 명예를 회복한다면, 다시금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거긴 아직 문주가 건재한 거로 아는데?”
홍무문 역시 지난 일로 피해가 컸다. 명운표국은 쓸어 버렸지만, 백가표국에게 역으로 털리며 주력 일부가 날아갔다. 문주의 동생이자 손꼽히던 고수였던 홍문덕도 당시 백진성 아저씨에게 죽었다.
하지만 당시 싸웠던 홍무문 문도들의 실력은 상당했다. 하물며 홍무문 최고수인 문주가 건재하다.
사부님들의 가르침이라 해도 단번에 이를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사부님들의 가르침이기에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내가 볼 땐 가장 빠른 길이었거든. 이야깃거리도 되고. 약자가 강자를 쓰러트리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이야기잖아. 게다가 내용물도 아버지의 복수를 이루는 소녀의 분투기고. 아마 명운표국의 평판이나 신뢰쯤은 가볍게 복구하고도 남을걸.”
확실히 그렇기는 하다.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문제지만.
이 녀석은 내가 말 몇 마디 하고, 무공 몇 자락 보여 주면 쿵떡쿵떡 고수가 튀어나오는 줄 알았나 보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경우가 있긴 했었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쁘진 않은데, 전제가 불가능해.”
백무호가 가볍게 혀를 찼다.
“하는 수 없지. 몇 가지 당장 써먹을 수단을 제외하곤, 정석대로 가야겠다.”
그래, 그거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느리더라도 제대로 된 길을 가는 것이 옳다.
다만, 찜찜한 단어 하나는 언급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뭘 꾸미는데?”
백무호가 나를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네 판단대로 명운표국의 자체적인 역량은 키워야겠지. 너 없이도 돌아갈 정도로. 하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제대로 성장하기 전에 견제도 들어올 거고. 거기에 네가 개입해서 시간을 단축하는 거지. 슬슬 사천에서 소천룡에 대한 소문이 넘어오고 있는 중이거든.”
“뒷배 노릇을 하라는 거야?”
“명운표국에 필요한 것은 두 가지. 역량을 갖추는 것과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는 거야. 그리고 그 신뢰라는 것은 빌려올 수도 있어. 네 명성 정도면 충분한 담보물이 될 테고. 툭 까놓고 말하자면, 내 뒷배 개쩌니까 건들지 마라, 정도랄까?”
“저거나 그거나.”
결국, 같은 이야기다. 거기에 왜 이렇게 기름칠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뭣보다, 이 자식 말에는 맹점이 있다.
“사람들이 그 소문을 믿겠냐?”
반신반의라도 해 주면 다행이다. 솔직히 나라도 안 믿을 것 같다.
실제로 멀리서 우리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명일서가 이를 증명했었다.
하지만 백무호는 아무 문제 없다는 듯 히죽 웃었다.
“안 믿어? 그럼 믿게 만들면 되지.”
“응?”
“보여 주고 증명하면 되는 거잖아. 네 실력이 가짜인 것도 아니고.”
보여 주고 증명하라.
말은 좋지만, 엄청 귀찮은 일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비무행이라도 하라고?”
“어, 그거.”
“적당히 다듬어놓은 명운표국 사람들도 줄줄이 달고 다니면서?”
“좋은 현장학습이 되겠지. 겸사겸사 표국 사람들도 너 비무 전에 사전 대련 같은 걸로 하나씩 내놓아서 실전 경험 겸 실력 검증도 받고.”
지가 할 거 아니라고 아주아주 귀찮을 것 같은 방법을 꺼내고 앉았다.
‘문제는 꽤 효과가 있을 것 같다는 건데…….’
그렇기에 이 제안을 잘라내지 못하겠다.
결국, 뒤로 미루는 선택밖에 없었다.
“일단 어느 정도 명운표국 사람들 성취를 끌어 올린 뒤에 다시 이야기해 보자.”
“그게 순서이긴 하지.”
백무호는 담백하게 긍정했다. 다만, 조금 돌아서 갈 뿐, 어차피 내 운명은 호북 인근을 돌며 무림인들을 조지고 다니게 될 거라고 확신하는 눈치다.
‘안 되겠어, 이 자식. 빨리 어떻게든 더 좋은 방법을 찾지 않으면…….’
[좋은 방법이구나.]그런데 머릿속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는 이 결정은 반기는 기색이다.
무척 오랜만에 오신 사부님이시다.
‘달마 사부?’
[그리운 말이구나. 비무행이라…….] [무림의 낭만이지.]옛 향수에 빠져드는 것은 나이 든 사람의 특권이라지만.
오랜 혹사에 시달리다 간신히 빠져나온 것 같은 달마 사부와 장삼풍 사부의 대화를 들으며 피하긴 글렀다는 걸 예감했다.
하지만 각오를 다졌음에도 아직까지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사천에서 시작된 나에 대한 ‘소문’이 얼마만큼의 파급력을 가지고 퍼져나가고 있는지를.
***
무당산 칠십이봉의 하나.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은 영산의 봉우리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는 존재가 있다.
무당제일검.
이름만 들어도 특별함이 넘쳐나는 그 별호의 주인이 머무는 거처가 있는 곳이다.
그런 그곳에 누군가가 방문했다.
“사천에서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어르신께서 벽을 넘었다는 소문이었습니다만…… 사실인 것 같군요.”
겉모습만 보면 강직한 인상의 서생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 몸을 두르고 있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을 조각내 버릴 것 같은 예기뿐이다.
“소문의 어디까지가 진실입니까?”
풍문을 듣고 찾아온 ‘여러 사람 중 한 사람’이 흥미 가득한 눈으로 허도진인을 향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