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09
108화 미래를 위한 포석(2)
검을 잡을 때 가장 곤란한 것은 검의 거리감이다.
적수공권일 때는 머리가, 몸의 감각이, 본능과 이성이 빠르게 계산을 끝낸다.
어디를 어떻게 얼마만큼의 힘을 쏟아 뻗고, 잡고, 쳐내야 할지 순식간에 파악하고 움직인다.
하지만 검으로는 그 거리감을 잡아내지 못한다. 아직 몸 안에 길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공 수련은 반복의 연속이다. 그 연속되는 반복을 통해 몸 안에 길을 만드는 것이다.
명일서의 어깨를 이용한 기교 역시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자다가도 펼칠 수 있을 만큼 몸에 익었기에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이다.
‘방향이 좀 잘못되긴 했지만.’
사람을 속이는 기(技)와 술(術) 중에서는 실전에 유용하고 편리한 수법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편한 길만 찾아가면 어느새 도(道)는 멀어진다.
물론 술의 영역도 궁극에 이르면 도의 영역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하늘이 내렸다고 할 만한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난 천재나 가능한 일이다.
명일서의 자질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저런 수법이 몸에 익었을 정도로 실전에서 굴러먹고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평가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하늘이 내렸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보여 줘야지.’
편리한 길만 걸은 사람들은 벽에 부딪히는 순간 성장을 멈춘다. 벽을 부수거나 뛰어넘을 원동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일서의 잔재주 또한 성취를 보이지 않는 답보 상태에서 몸부림친 결과물이다.
그러니 다른 길을 보여 주면 된다.
저렇게 무리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길(道)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면 된다.
[방금 가르쳐 준 검을 쓸 때, 몸 안쪽에서 근육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잘 들었지?]“예.”
‘예, 그러시겠죠.’
그놈의 입문 수준!
절정 고수라 불리는 사람들도 사부님 기준에서는 입문에, 수준 미달이 아닐까 싶다.
[형과 식을 가르쳐 줬으니 직접적인 훈수는 안 한다.]“예예~.”
“……뭐라는 거냐!”
뭔가 보여 주겠다는 듯 똑똑히 보라 해 놓고, 혼잣말하는 나를 보며 명일서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단번에 치고 들어왔다.
저돌적인 돌격!
그 직선적인 공격에 가미된 한 끗의 속임수.
나는 그 달려드는 명일서를 향해 검을 뻗었다.
휘잉!
그리고 내 검이 멈췄을 때.
“……!?!”
“한 번.”
내 검은 명일서의 목에 닿아 있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 제대로 멈추지 못했기에 얕게 베인 상처로 피가 흘렀지만, 명일서는 충격에 상처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만하다.
“바, 방금……?”
“다시.”
“컥!”
나는 굳어져 있는 명일서의 가슴을 걷어찼다.
어이가 가출해 있던 명일서가 바닥을 한 번 구른 다음에야 정신줄을 수습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믿기 어렵다는 불신을 가득 담은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불신을 털어내기 위해서인 듯 포효하며 달려드는 명일서에게 다시 불신감을 쌓아 올릴 검로를 보여 주었다.
‘팔 전체의 근육을 팽팽하게 당기고, 팔꿈치 관절을 묶는 근육을 조인 다음…….’
겉은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내 팔 내부의 근육들은 팽팽하게 조여졌다.
그리고 검을 뻗는 순간.
‘푼다!’
한계까지 조여진 근육이 풀어지며 요동치는 흔들림이 검 끝의 궤적에 영향을 주었다.
분명 오른쪽으로 베어 가는 듯했지만, 팔의 요동침에 몸이 반응하여 자세를 고치는 순간 검의 궤적이 완전히 바뀌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명일서가 추구하고자 하는, 그리고자 하는 궤적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명일서처럼 무리하지 않아도 방법이 나온다. 상대의 칼날 앞으로 몸을 들이밀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하다.
“두 번.”
명일서의 목에 다시 한번 생채기가 났다.
흐르는 피가 옷깃을 적신다.
두 번이나 확인한 명일서의 눈은 더욱 거세게 흔들렸다.
자세도, 들고 있는 무기도 다르지만 내가 그리는 궤적과 움직임이 자신이 추구하는 투로 그 자체라는 것은 알아봤을 것이다.
“계속 가 볼까요?”
이번에는 연속적으로 칼을 휘두를 때의 궤적을 보여 줄 차례다.
흔들리는 명일서를 향해 나는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세 번.”
사악!
저돌적인 공격 사이로 한 끗의 허초를 담는다.
명일서와 다르게 안정적인 자세에서.
“네 번, 다섯 번…….”
삭! 휘익! 사삭!
검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명일서의 몸에 생채기가 났다.
말이 생채기지 검을 조절하지 않았으면 하나하나가 목숨을 날려 버렸을 흔적들이다.
“허…… 허어…… 흐읍!”
그렇게 속으로 느리게 숫자 열을 셀쯤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명일서의 몸에 난 생채기는 서른하나였다.
“서른한 번.”
그리고 그것은 내가 검을 휘두른 숫자이기도 했다.
“이렇게 서른하나의 초식이네요.”
“……내 도법은 서른여덟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일서는 힘없이 항변했다.
현실을 부정하며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마지막 저항이다.
“쓸데없는 건 도려냈거든요.”
“하아……?!”
“지금 본 것들을 잘 기억해 두세요. 당장 제가 보여 준 것처럼 안정적인 자세에서 펼치는 것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움직임이 제거된 부분만 살펴도 얻어지는 게 있을 겁니다.”
장삼풍 사부의 손을 거치면 삼류 무공도 단숨에 일류, 절정 고수들이 감탄하는 신공절학이 된다.
명일서 저 양반이 받은 충격이야 어쨌든, 이 일은 그에게 엄청난 기연이나 다름없다.
충격받은 모습을 보아하니 당장은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내 말을 듣고 진지하게 수련하기 시작한다면 달라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지금 내 무공을 보자마자 이런 걸 해낸 건가? 그저 곁눈질로 본 것만으로 이만큼 보완해냈다고?”
순수한 내 능력은 아니다. 진지하게 연구한다면 어느 정도는 나도 보완점을 찾았겠지만, 장삼풍 사부가 건드린 정도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은 허세가 필요하다.
마음으로 굴복시키기 위해서다.
“문제라도?”
나 스스로도 재수 없게 느껴지는 말이지만, 의식적으로 덤덤한 태도를 유지했다.
여기에 쐐기를 박는다.
“아, 한 가지 더.”
“뭐지?”
“저는 아직 검보다 맨손이 더 편합니다. 무림에 알려진 제 소문에 대해 들으셨다면 아시겠지만요.”
할아버지 친구분이 알려주셨던 조언대로라면, 약을 칠 때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가 딱이라고 하셨다.
그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돌겠군.”
항명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존재.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 명일서에게서는 더 이상 나에 대한 의심이나 불신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정적인 감정이 있던 자리로 조금씩이지만 경외에 가까운 감정이 들어서고 있는 게 보였다.
내 얼굴 낯가죽이 참 많이 간지러워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확실하게 승복을 받아낸 것 같긴 하다.
비단 그것은 명일서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절대복종이 조건이라 하셨지요.”
명일서 못지않게 놀란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주소란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공으로 가는, 승리가 보장된 확실한 패를 움켜쥔 도박사의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녀의 얼굴에는 강한 결의가 엿보였다.
“하겠습니다.”
“무엇을 시키더라도?”
“예! 무엇을 시키신다 하더라도!”
죽으라면 죽는시늉이 아니라 진짜 칼에 자신의 목을 들이밀 것 같은 모습이다.
이만하면 원하는 대로 풀린 것 같다.
‘표국 일이라는 게 무공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겠지만.’
그래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무공이다. 그리고 그 부분은 확실히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 부분은 다른 곳에서 채우면 되겠지.
***
“으음…….”
중신상회 종인걸은 장부를 살피며 얕은 신음을 흘렸다.
세인들은 종인걸을 호인이라 칭하지 않는다. 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대인이라고 칭할 뿐이다.
중신상회를 세우며 타인의 세를 잡아먹고, 도움을 주었던 이들의 뒤통수를 쳐서 힘을 키운 전례 때문이다.
물론, 어른들의 사정에 따라 넓은 인맥과 영향력을 가진 종인걸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 역시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다.
즉, 종인걸의 인맥이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의미이다.
“서서히 목이 죄어지는 느낌이군.”
호북 승선포정사사 이조참정 서윤건은 생일잔치 이후 조금씩 종인걸의 주변을 파내기 시작했다.
귀한 옥을 ‘선물’로 받으며 종인걸에게 호북에서 이조의 일을 볼 때 조금 빡빡하게 굴 것 같다고 했던 서윤건의 말은 헛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서윤건의 움직임으로 종인걸의 울타리가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중신상회가 단기간에 힘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종인걸에게 천부적인 상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관리로 있던 시절 맺은 인맥들이 역할을 해줬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상계에서 이 정도로 급격하게 재물을 모았다는 것은 온갖 더러운 짓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뇌물은 기본이고, 심한 경우는 암살로 거추장스러운 대상을 치워 버린 일도 있었다.
문제는 호북의 인사를 관장하는 이조의 주인이 종인걸 주변을 파내는 움직임을 보이자 많은 이들이 몸을 사린다는 점이다.
가벼운 편의를 봐주는 사람들은 이미 일찌감치 손을 뗐다. 어느 정도 얽혀 있는 자들도 거리를 뒀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은 운명 공동체 수준으로 엮인 자들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득을 우선시한 인맥의 한계였다.
“흑살대에 의뢰라도 넣어 볼까?”
얼마나 답답한지 육대천의 하나이자 천하제일살문으로 알려진 흑살대까지 언급할 정도였다.
현역 고위 관리인 서윤건의 암살은 선을 넘는 행동이다. 흑살대에서 받아 줄 리도 없거니와 자칫 목줄이 잡혀 평생 부려지는 신세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 정도로 종인걸은 몰려 있었다.
“회주님.”
깊은 장고에 빠져 있던 종인걸은 수하의 목소리에 눈을 찌푸렸다.
“뭐냐?”
“명운표국에서 움직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쓸모없는 놈들 말이냐?”
연청운과 백진성이 박아 놓은 서윤건의 선입견을 흐리기 위해 종인걸은 명운표국에 이런저런 지원을 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명운표국이 백가표국과 인연이 있다는 점에서 차후 이용할 것이 있을까 싶어 감시를 붙여놨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시들한 판이었다.
“예! 며칠 전 주소란이 남장을 하고 표두인 명일서와 표국을 나섰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무의미한 정보군. 됐다. 그냥 거기 심어둔 녀석들도 모두 불러들…….”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기 위해 철수를 지시하던 종인걸은 순간 한 가지 위화감에 말끝을 흐렸다.
“……잠깐. 남장? 주소란이란 계집년이 남장을 했다고?”
“예.”
“이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종인걸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느 쪽으로 향했다고 하느냐?”
“북쪽입니다.”
“백가표국이군.”
종인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서윤건이라면 몰라도 네놈들은 이야기가 좀 다르지.”
판단을 내린 종인걸이 곧장 지시를 내렸다.
“형문산으로 가 구악도인을 불러라.”
“구악……도인 말입니까?”
지시를 받은 수하는 꺼림칙함 반, 두려움 반으로 구악도인을 입에 담았다.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불길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종인걸은 되레 웃음이 짙어졌다.
“오랜만에 그 괴물이 하는 주살(呪殺) 놀음이나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