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64
163화 태풍의 눈(2)
맛있는 음식에 입이 즐겁고, 술이 들어가면서 흥이 돋는다.
해가 저물면서 어둑어둑해지는데 큰 모닥불이 일렁이니 조금만 더 분위기가 느슨해지면 노래와 춤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가운데 비무 이야기가 나왔다.
아무리 심약한 사람이라도 일단 술이 들어가면 혈기가 왕성해진다.
그런 사내들이 가득한 곳에서 수컷들의 서열 정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이상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가 없다.
“크아! 이거지!!”
“붙어라! 붙어라!”
사방에서 와장창 잔 깨지는 소리가 울린다. 이미 술에 잡아먹혀 개가 된 작자들의 소행이다.
백무호를 슬쩍 돌아보니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저게 다 돈이기 때문이다.
빠드득!
거칠게 이 가는 소리가 백무호의 심기를 대신했다.
‘아무튼, 이제 볼 수 있겠네.’
일거리가 늘어난 백무호의 입장에는 동정을 금할 수 없지만, 내 흥미는 이미 표사들이 모여 있는 소란의 중심지로 향했다.
피할 수 없는 분위기에 명일서 표두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야 할 분위기니 하겠소만, 진검으로 할 생각이오?”
“에이, 흥 떨어지게. 그런 말 하지 맙시다.”
처음부터 노린 것이 분명한 듯, 상대는 거침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잘 관리된 깨끗한 칼이 불빛을 받아 붉게 번들거렸다.
“다칠 수도 있을 텐데?”
“남자에게 흉터는 훈장 같은 거 아니오!”
“오오오!”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와하하하하하!!
호기로운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한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겁먹었냐는 조롱이 날아들 분위기다.
“혓바닥이 기십니다? 겁이라도 드셨수?”
명일서의 앞에 나선 표사가 이죽거렸다.
“와하하하!! 말했어! 저 녀석 저질렀어!!”
“명운표국의 힘을 보여 줘라! 보여 줄 수 있다면 말이지만! 하하하하!”
부추김과 조롱이 벌떼처럼 일어나 주변을 채운다.
그런 가운데 냉철한 눈으로 주의 깊게 주시하는 자들이 있다.
[바람잡이가 있구나.]“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명운표국의 실질적인 힘을 보고 싶은 이가 있는 모양이다.
아마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바로 깔아뭉갤 것이다.
여차하면 대놓고 다른 표국의 전력을 흡수하겠다는 주소란의 호기에 망신을 당한 표국의 대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직접 가담하진 않았지만 흘러가는 정황을 파악한 눈치 빠른 자들 역시 이를 묵인했다.
아마 그들도 명운표국의 역량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렇다면야.”
단단해진 기량만큼이나 마음에도 중심이 곧게 섰는지 명일서 표두가 주변의 악의를 담담하게 받아내며 칼을 뽑았다.
“간다!”
호기롭게 외치며 달려드는 상대를 향해 명일서 표두의 칼이 움직였다.
그 사이에서 나온 결과는 한순간 주변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일합?”
“이 무슨……!”
“허어…….”
모두가 기대한 호쾌함 따윈 없었다. 칼 부딪치는 소리 한 번 나지 않았다.
호기롭게 달려든 상대의 목에 명일서 표두의 칼날이 닿아 있다.
목에 닿은 칼날 위로 핏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훈장이 작아 미안하군.”
“어…… 왼쪽이었는…… 아니, 왜 오른쪽에 칼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상대 표사가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지켜보는 자들도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깊은 침묵이 사위를 지배하는 가운데,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내가 보여 줬던 거네.’
본래 명일서 표두가 펼치던 무공은 작은 이득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미끼로 내던져야 했다.
나는 명일서 표두에게 그런 무리수를 펼치지 않아도 충분히 같은 기교를 보일 수 있음을 보여 줬다.
그 첫수가 저것이었다.
[어설픈 건 여전하지만, 전에 비해 중심이 제법 안정되었군.]사부님이 보시기엔 눈에 차지 않으신 모양이다. 내가 봐도 허술한 면이 꽤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미끼로 던지는 무리수를 두지 않더라도 기교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선 괄목할 만한 성장임이 분명하다.
“다음은 내가 해 보지.”
너무 압도적으로 결과가 나왔기 때문인지 축제처럼 흥겨운 분위기는 없다.
웅성거리는 소란만이 가득한 상황에서 한 중년인이 나섰다.
“성류표국의 정 표두다!”
“와아!”
이번 상대는 꽤나 이름이 있는 표두인 모양이다.
칼을 뽑으며 명일서 표두의 정면에 선 정 표두라는 이가 흥미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꽤 달라졌군. 이 정도면 거의 무공을 새로 익힌 수준이야.”
나와 인연을 맺기 이전 무렵의 명일서 표두를 알고 있는 사람 같다.
확실히 그때와 비교하면 천양지차이긴 할 거다.
“큰 기연을 얻었지.”
“부럽군. 그 나이가 되어서도 바뀔 수 있다니. 그럼 어디 그 기연의 결과를 확인해 보세.”
정 표두와 명일서 표두가 크게 한 걸음을 내디디며 칼을 휘둘렀다.
캉! 카캉! 캉!!
빠르게 칼이 부딪치며 요란한 검격음이 울려 퍼졌다.
제대로 된 비무가 펼쳐지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우연이었겠지.”
“방심한 영향도 컸을 거야.”
허나 보는 눈이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합이 길어질수록 표정이 굳어졌다.
백무호 역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네가 가르쳐준 무공이냐?”
“어, 맞아. 네가 볼 땐 어떠냐?”
“……성가신데. 기량으로 초반에 찍어 누르지 않으면 변수가 커지겠어.”
백무호의 평가는 극찬에 가까웠다.
카앙!
“……큿!”
백무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명일서 표두가 기세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대부분의 표사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실제 저 무공은 정면에서 상대할 때 진가를 보인다.
“모든 움직임이 좌우로 끝없이 선택을 강요해. 저 양반 어깨를 잘 쓰네.”
공격의 시작은 어깨다. 실전에서도 어깨와 눈의 방향을 통해 상대의 공격을 읽어내는 것이 기본이다.
명일서 표두는 그 묘리를 실전을 통해 습득해서 사용해왔다.
무공의 뼈대를 갖추고 기본을 단단히 했음에도 그 기질만은 변하지 않았다.
첫 번째 상대했던 표사가 일합에 당한 이유다.
왼쪽으로 칼을 휘두르는 것으로 파악했는데, 실제는 오른쪽으로 칼이 베어 온 것이다.
“화산파의 기교에서 건더기를 뺀 느낌이네. 허허실실. 허초인가, 실초인가. 양자택일이라 선택의 폭이 좁더라도, 그게 연속적으로 이어지면 이야기가 다르지. 게다가 나름 속도가 있어서 겉으로 드러난 단점을 잘 메웠고. 휘말리기 시작하면 상대하기가 까다롭겠어.”
장삼풍 사부의 손길이 닿은 무공이다.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는 무공이라 한들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강화되는 것이 당연하다.
“저런 무공을 만들었다고?”
“어쩌다 보니.”
“칼질은 또 언제 배웠대.”
딱히 답변할 말이 없어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명일서 표두가 펼치는 무공의 개선점을 찾았다.
‘이제 정순한 내공심법 하나만 갖춰 놓으면 제대로 중심이 잡히겠네.’
그럼 어지간한 명문 못지않은 무공이 뚝딱 완성된다.
물론 내공이란 게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닌 만큼 성취를 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제대로 된 기반이 마련된 것만으로도 반은 달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기본이 많이 단단해지긴 했지만, 무공 특성상 기교에만 치중해 방향성이 엇나갈 수도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한 지적도 필요할 테고. 이래저래 손볼 게 꽤 있겠네.’
오랫동안 사부님들과 어울리면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야에 익숙해진 덕분인지 이런저런 개선점이 보였다.
와아아아아아!!
크나큰 함성과 함께 승부가 났다.
상대를 압도해 나가던 명일서 표두의 칼이 정 표두의 목에 닿았다.
정 표두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 대단하군……. 대체 어떤 대가를 치렀기에 이런 절기를 전수받았단 말인가?”
“뭐, 내 입장에선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네.”
“허! 부럽군.”
정 표두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돌연 명일서 표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듯한 시선이다.
‘이제 와서 뭘.’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 허락을 받아낸 명일서 표두가 태연히 말했다.
“부러우면 오게나. 명운표국은 도움을 베푸는 데 인색한 곳이 아닐세.”
“…….”
크게 당황한 듯 정 표두의 목울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원한다면 이런 무공을 배울 수 있다.
대놓고 질러버린 선언에 일대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처음과 다른 의미로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성깔 살아 있네.’
명일서 표두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명운표국을 시험하겠다고 나선 표국들을 대놓고 엿 먹였다.
명일서 표두의 기량에 따라 이번 표국 회합에서 태풍의 눈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명운표국은 더 이상 무시당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
아침이 되자 몇몇 표국이 도망치듯 떠났다.
간밤에 보인 명일서 표국의 기량과 발언에 사람을 빼앗길 수도 있겠다 판단한 것이다.
현명한 판단은 아니다.
족쇄와 같은 계약에 목줄이라도 잡혀 있는 거라면 모를까, 결국 마음이 떠난 사람은 잡을 수 없는 법이다.
마음이 급해서 저지른 오판인 것 같은데, 지금 도망치듯 떠난 표국들은 후일 크게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일단 급하게 명운표국과 떨어트려 놔야 한다고 판단한 것부터가 휘하 사람들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명운표국이 생각보다 더 빨리 크겠는데?’
나로서는 좋은 일이다.
짙은 긴장감 속에 시작한 국주들의 모임은 첫날의 화기애애함이 사라진 채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흘러갔다.
녹림의 움직임으로 인해 얼마나 녹림의 세력권이 요동치고 있는지, 앞으로 녹림이 어떤 행보를 걷게 될 것인지, 그로 인해 어떤 여파가 발생할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다.
결론을 말하자면 지지부진했다.
정보가 너무 없었다.
녹림칠십이채가 대화합을 통해 하나의 세력으로 거듭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금 논해지는 모든 것은 이 하나의 가능성만을 가지고 진행되는 이야기였다.
정말 녹림이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될 가능성은 있는지, 있다면 어떤 곳에서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는지, 파벌이 나뉘어 있다면 몇 갈래인지.
구체적인 정보가 없으니 추론만 오갈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표국 간의 화합이 잘되고 있냐면, 그것도 아니다.
다들 입은 열고 있지만,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한 사람이 나서면서 의미 없는 추론이 마무리되었다.
“이래서야 탁상공론일 뿐이오!”
“하하! 그럼 대진표국의 국주님께선 뭔가 특별한 방도라도 있으신 모양입니다?”
‘대진표국?’
여차하면 표국의 일거리를 만들기 위해 자기가 산적이 돼서 통행세를 걷겠다는 미친놈이 있던 곳이다.
“하아…… 이건 말하지 않으려 했소만… 이리 지지부진한 것보다 나을 것 같기도 하고. 해서…… 하는 말인데…….”
뭔가 서두가 길다.
“지금 중요한 것은 녹림 내부의 정보요. 정보가 없으니 지지부진한 것 아니겠소? 해서 말인데…… 녹림칠십이채의 모임이 있는 곳에 각자 서신이라도 넣어봄이 어떻겠소? 내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알려달라고 말이오. 여기 있는 국주들 정도라면 나름 안면을 익힌 채주 몇 명 정도는 있지 않소?”
“하아…….”
“별 미친…….”
“하하! 농이라면 재미있었습니다.”
돌아온 반응들은 극적이었다.
다들 어이가 없는지 웃음만 흘렸다.
하지만 대진표국의 국주는 진지했다.
“나도 표국에 있는 또라이에게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여러분들과 같은 반응이었소. 한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름 일리가 있더이다.”
“아니, 그건 또 무슨…….”
“잘 생각해 보시오. 녹림의 대화합이 실패로 돌아가면 우리도 기존대로 돌아갈 뿐이오. 변하는 것이 없지. 허나, 만약 녹림의 대화합이 성공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산채에 머물 수 없으니 산 아래로 내려와 무림 문파가 될 수밖에 없소.”
“그거야…… 그렇지요.”
“표국의 적은 표물을 노리는 도적들인데, 산 아래로 내려온 녹림이 대규모로 도적질을 하면 즉각 토벌 대상이 되오. 우리로서는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지요. 허나, 도적질을 하지 않는 녹림이라면 우리가 굳이 싸울 일도 없잖소? 솔직히 내 생각엔 대화합에 성공해 무림 문파까지 차려 놓고 산적 노릇 하겠다고 날뛸 것 같진 않고, 그 힘으로 다른 이권을 뜯어먹겠다고 달려들지 않겠소? 그런 부분을 명확하게 알려두면 우리에게 호응하는 채주들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오.”
“…….”
또라이 같은 소리인데 뭔가 말이 된다?
뭐지?
이러다 녹림이 표국 차리겠다는 소리가 나와도 헛소리 취급 못 할 것 같은데?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