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65
164화 녹림의 대답
녹림칠십이채의 대통합을 위한 모임은 호남의 천자산에 자리 잡은 천신채에서 이뤄졌다.
대체로 대륙에서 북쪽에 치우친 곳일수록 구파의 영향력이 강하고, 남쪽으로 치우친 곳일수록 사파의 영향력이 강하다.
천신채가 녹림칠십이채들 중 가장 세력이 큰 것도 한몫했지만, 구파의 영향력이 낮은 곳인 탓도 컸다.
당연한 소리지만 천자산에 녹림칠십이채의 산적들이 모이는 데만도 한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달까? 모여든 녹림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하나둘 힘이 집결됨에 따라 알 수 없는 열기에 가슴이 웅장해졌다.
“아~주 개판이구만.”
문제는 딱 거기까지만 좋았다는 거다.
민낯을 까고 보니, 온갖 병신 쓰레기들이 다 모인 꼴이다.
사람 다섯이 모이면 그중 하나는 쓰레기라고 했는데, 여긴 다섯이 다 쓰레기다.
하물며 그 수가 일천은 순식간에 넘기고, 일만을 향해가니 그 혼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호북 단강산에 자리 잡고 있는 흑호채의 채주 적심투호(赤沈鬪虎) 만산호는 돌아가는 꼴을 보며 혀를 찼다.
“어려운 길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거 상상 이상으로 개판인데?”
말이 녹림칠십이채지 사실 산채들끼리의 관계는 사돈네 팔촌의 이웃사촌 수준이다.
공통적인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 무맥(武脈)이라도 같다면 모를까, 녹림 자체가 잡탕의 끝판왕 같은 곳이다 보니 그딴 것도 없다.
산채끼리 영역이 겹치면 수익이 줄어들며 서로 칼질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거리도 상당히 떨어져 있다.
그나마 지역이라도 같으면 어느 정도 교류라도 생길 수 있겠지만, 타 지역이면 어림도 없다.
차라리 업무로 매일 얼굴 마주하는 표국이 더 친분이 깊다.
하물며 사돈네 팔촌의 이웃사촌이 갑자기 찾아와서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어! 오늘부터 우린 형제야!’라고 지껄이는데, 좋다고 곳간 열어주면 그 새끼는 뭔 짓을 당해도 싼 병신이다.
그렇기에 이번 녹림칠십이채의 모임이 특별한 것이다.
“구파 새끼들도 병신이지. 사실상, 이 개판이 성립된 것이 좆도 없는 이유로 허허거리며 칼춤 춘 그놈들 덕이니까.”
만산호는 구파를 욕하며 씹었다.
사돈네 팔촌의 이웃사촌 새끼들이 ‘우리는 형제!’하고 외치는데, 다들 병신 같지만 멋있게 ‘혀, 형제!’라고 받아준 이유가 근래 수상쩍은 구파의 움직임 때문에 뭉쳐야 할 필요성을 느낀 탓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과 감성의 영역은 역시 다른 법이다.
다들 성격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규범도 다르다. 심지어 온갖 사투리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동네도 있다.
필요성을 느끼고 모이긴 했지만, 통일성 따윈 개나 주고 지들 멋대로 놀았다.
머리 좋은 작자들은 어떻게든 자기 뜻에 동조하는 무리를 이루려 했고, 뒤처지면 엿 되겠다 싶은 채주들도 어떻게든 세를 불렸다.
야합을 싫어하는 일부 채주들이 있긴 했지만 혼자 배짱부려봐야 손해만 보겠다 싶어서인지 아예 그런 성향의 사람들끼리 모인 세력까지 뚝딱 생겨났다.
파벌이 만들어진 것이다.
산채 무공 특색이 가깝다는 이유로 모인 파벌이라든가, 지역이 가깝다는 이유로 모인 파벌이라든가, 고향이 가깝다는 이유로 모인 파벌이라든가.
아무튼, 사분오열의 끝판왕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파벌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 시발점은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다 나온 하나의 화제 때문이었다.
수가 적을 때는 뭔가 문제가 생겨도 자기들끼리 쑥덕쑥덕하는 걸로 넘어가겠지만, 수가 많아지면 그에 맞는 법도와 규율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법도와 규율이 없듯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흐름을 만들기 위한 파벌 간의 분쟁이 벌어졌다.
하물며 녹림 자체가 애초에 ‘법도 조까라’를 외치는 반골 정신에 투철한 작자들이 모인 곳이다.
“아니, 오히려 똑똑한 건가? 그 위선자 새끼들이 이 개판을 만들려고 수작 부린 거면 존나게 똑똑한 새끼들 맞는 거 같은데.”
심지어는 묘한 음모론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수하 한 명이 만산호를 찾아왔다.
“채주님.”
“뭐야? 왜? 어디서 또 쌈박질이라도 해?”
“언놈이 화살 쏘고 튀긴 했는데, 싸움이 난 건 아닙니다.”
“보통 화살 쏘는 것 자체가 너 뒈져보라는 의미 아닌가?”
일반적인 산적 관점이다.
“촉도 없는 화살 끝에 이런 게 묶여있는 걸 보니 싸우자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수하가 잘 접힌 서신 한 장을 내밀었다.
서신 끝에는 ‘흑호채주님께.’라고 쓰여 있었다.
“대진표국에서 보냈다는 것 같습니다. 뭔 내용인지 검열하겠다고 달려들던 놈들이 보고 웃던데요?”
“뭐, 표국 새끼들이 이곳에 서신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웃기긴 하네.”
검열이라는 말을 웃음으로 넘긴 만산호가 서신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왜 검열하겠다는 놈들이 파안대소했다는지 알 수 있었다.
통상적인 안부 인사로 시작된 서신은 지면상의 문제인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표국끼리도 단합 좀 해 보려는데 천자산에 모인 녹림의 상황이 궁금하니 정보 좀 제공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뭐지, 이 미친놈들은? 이 새끼들도 만만치 않은 병신들인데?”
헛소리도 이 정도면 상을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 전에 짜증 나서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게 되겠지만.
하지만.
“……응?”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읽다 보니 답답한 머릿속 한구석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느낌이 든다.
“이상한데? 왜 말이 되는 것 같지?”
만산호는 다시 한번 서신을 정독했다.
“녹림칠십이채의 대통합이 실패로 돌아가면 어차피 흑호채는 단강산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느냐?”
대통합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녹림은 새로운 간판을 내건 무림의 거대 세력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다. 실패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 맞다.
그 뒤로 영업을 재개하게 되면 표국들이랑 다시 손발 맞춰 봐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녹림 대통합이 성공하면 어차피 산에서 도적질할 거 아니지 않느냐? 이것도 맞는 말이네. 이 규모로 산 하나 점거하고 버티면 굶어 죽기 딱 좋으니까. 결국,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야 한단 소린데…… 어느 쪽이든 표국이랑 척질 이유가 없네?”
이 개판이 어떤 결론으로 끝나든 표국과 척질 이유는 없을 것 같다. 합리적인 시각에서 보면 틀린 말은 없다.
그래서 더 요상했다.
“단야흔과 이야기 좀 해 봐야겠어.”
만산호는 이 혼란스러운 곳에서 나름 심중을 털어놓을 수 있는 호북 검자산의 강무채주를 찾아 일어섰다.
강무채주는 만산호가 내민 서신을 읽더니 배를 잡고 웃었다.
“푸하하하하! 이 서신을 보낸 곳이 대진표국이라고 했나? 이제 보니 자네 꽤 재미있는 친구를 이웃으로 두고 있었구만. 푸하하하하하!”
“재미있는 거야 둘째 치고, 자네 생각은 어떤가?”
“흐음! 어쨌거나 표국도 우리랑 척지기 싫다는 소리란 말이지…….”
강무채주 단야흔은 턱을 쓸어 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진한 미소가 강무채주의 입가에 걸렸다.
“정 이쪽 상황이 궁금하다면 한번 초대해 보는 것은 어떤가?”
“초대?”
뭔가 잘못 들었다고 여겼는지 만산호가 귀를 팠다.
“누굴? 어디로? 여기로?”
“왠지 나쁘지 않은 계획이란 생각이 든단 말이지. 표국이 우리와 척질 생각이 없다면, 대통합이 이뤄졌을 때 우리 녹림이 표국 녀석들 하려는 일에 한 다리 걸쳐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말이야.”
만산호가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한 채 눈만 껌뻑였다.
“뭐?”
“길을 만들면 사람이 다니게 되어 있지. 길을 독점하게 되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어. 길을 만드는 일에는 수고가 들지만, 표국과 우리가 제대로 손을 잡는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세. 기존 표국과 우리의 암묵적 공생 관계를 좀 더 공식적으로 친밀하게 해 보자는 거지. 대체할 수 없는 좋은 길을 독점하게 되면 나중에는 상인들이 먼저 손을 벌리고 찾아올걸?”
“그러니까, 자네 말은… 녹림이 표국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보자는 건가?”
“바로 그거지. 잘만 꾸리면 합법적인(?) 유통업이 될 테니 관이 개입할 여지도 없을 걸세.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서는 좋은 일이라고.”
그리고 만산호는 깨달았다.
만만치 않은 미친놈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
표국들도 힘든 시기다.
시국이 어수선하다 보니 표국을 오래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지지부진하던 표국 모임은 일단 해산하기로 했다.
그러고 겨울의 냉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완연한 봄기운이 무럭무럭 피어날 무렵 대진표국의 국주가 홀로 찾아와 한 장의 서신을 내밀었다.
호쾌하게 쓰인 서신의 내용은 글자에서 느껴지는 힘찬 기운만큼이나 간단했다.
“궁금하면 직접 와 보든가?”
나는 심각한 얼굴로 이 서신을 내밀고 있는 백진성 아저씨와 대진표국의 국주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게 뭡니까?”
“음…… 나도 좀 긴가민가해서 말이야. 네 눈에는 이게 뭐로 보이니?”
“도발 아닌가요? 용기 있으면 와 봐라. 모가지를 비틀어 주겠다. 뭐 그런 거?”
“역시 그렇게 읽히지?”
역시라니? 다른 것도 있는 건가?
“그거 녹림에서 보낸 거야.”
“걔네, 또라이래요?”
갑자기 대진표국 국주님이 와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분명 표국 모임이 파투 나기 전에 녹림 대통합을 논의하는 곳에 서신을 보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에 대한 답장인 모양이다.
갑자기 궁금한 점이 하나 떠올랐다.
“대진표국에 약간 똘끼 있는 표사 하나 있었죠?”
“큼! 그…… 있지…….”
“그 사람 이거 보고 뭐라던가요?”
“평생의 지기를 만난 기분이라더군.”
“……단속 잘하셔야겠습니다.”
어쩌면 조만간 표사에서 녹림으로 직업을 변경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묶어 놓고 왔네.”
어쨌거나.
“그러니까, 녹림이 초대장을 보냈다고 보면 되는 건가요?”
“맞아. 무려 정식으로 초대했다는 증표까지 동봉되어 왔더라.”
“갑자기 감나무 밑에서 홍시 떨어지길 기다린다는 고사가 떠오르네요. 아, 물론 먹히는 쪽은 저희일 것 같고요.”
“안 그래도 이번 일엔 고르고 고른 정예로 갈 생각이다. 위험한 곳에서도 제 한 몸 정도는 충분히 빼낼 수 있는 ‘고수들’ 위주로.”
왜 저 말이 불길하게 들리는 걸까?
사족처럼 붙은 뒷말이 심히 마음에 걸린다.
“근래 풍문으로 들리는 장강에서 등평도수를 펼쳤다는 고수가 너 맞지?”
“그건 사람이 아니라 용왕이라던데요?”
“너 용 맞잖아. 소천룡.”
“아니, 그건 별호일 뿐이고…….”
“화산파에선 허공답보도 펼쳤다며?”
백진성 아저씨의 말에 대진표국 국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게 누구 주둥이에서 나온 정보인지는 잘 알겠다.
조만간 백무호 놈의 주리를 틀 일정을 잡아 봐야 할 것 같다.
“기어이 절 보내고 싶으신 겁니까?”
“네 녀석이 뭔 걱정이냐. 신승 어르신이 가만있으시겠냐? 널 금이야 옥이야 아끼시는 분인데.”
확실히 막강한 패(牌)이기는 하다.
아마 현 무림에서 신승 어르신과 맞상대를 할 수 있는 자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극강격의 묘리를 분석하면서 뭔가를 얻으신 느낌도 있다.
‘든든한데…… 든든하긴 한데 말입니다…….’
문제는 거록채에 대해 언급하며 살기를 비치시던 신승 어르신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는 것이다.
‘왜 술 처먹고 화약고에서 쥐불놀이하는 장면이 떠오를까요?’
막강한 만큼 제어가 불가능하다는 문제점이 크다.
“생각할 시간 좀 주십시오.”
“그래,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니 채비 단단히 하고.”
이 뭔 답은 정해졌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인지!
“아, 기왕이면 장문경 그 양반도 좀 꼬셔 보든가.”
왜 내 말을 안 듣는 사람이 많아지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이게 인과응보라는 건가?’
그러고 보면 나도 근래 저런 화법을 꽤 써먹은 기억이 있었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하는 모양이다.
***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름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역시 내버려두긴 힘들단 말이지.’
설아 누나의 아버지라는 것도 그렇지만, 그동안 백진성 아저씨에겐 유, 무형적으로 받은 것이 상당했다.
제어할 수 있느냐는 둘째 치더라도 확실히 신승 어르신이 이번 일정에 참여하신다면 안전은 크게 올라간다.
덕풍 윤가에서 본 무림 최정상에 있는 고수들의 무위는 분명 충격적인 것이었다.
‘종 노인도 슬쩍 일행에 끼워 넣는다고 하면?’
좌로 소림의 정점이신 신승 어르신에, 우로 마교 최강자 중 한 명이라는 금강철마존 종 노인.
두 분이 합류한다는 전제로 생각해보니 이번 녹림행이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분이 든다.
그런 가운데.
[너 거기 가야 할 거다.]“……예?”
갑자기 장삼풍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마 그 양반이 전해 달라더라. 네가 거기에서 얻어야 할 것이 있다고. 이건 인과가 빨리는 내용이라 길게 이야기하지 않으마.]나에게 도움이 되는 뭔가가 녹림에 있다는 의미다.
사부님이 저리 말하는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렇게 된 이상 장문경 선배도 꼬셔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