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9
28화 어떤 미친놈들이 여기에서 칼부림을 할까?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결정이나 음모는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 이뤄진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어둠이란 건 여러 가지를 덮어주기 마련이니까.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역시 그와 맥을 같이 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 누군가 찾아들었다.
“뭐라던가?”
“평소와 같다고 합니다. 아, 그리고.”
“말하게.”
“어두운 밤에도 알아보기 쉽게 붉은 두건을 썼으니 구분은 확실히 해 달라더군요.”
“별걸 다 따지는 녀석이군.”
열린 문 너머로 들어온 작은 빛에 보고를 듣는 인물의 웃음이 짙은 음영과 함께 드러났다.
“아무튼, 평소와 같다면 준극봉으로 가겠군.”
“정파 놈들은 가운데에 서는 걸 좋아하니까요.”
“그래, 그런 기질이 있긴 하지.”
편향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보고를 듣는 인물은 그를 인지했음에도 굳이 그를 지적하지 않았다.
편향적인 말일지언정 지금은 그런 게 필요했으니까.
적어도 자신들에게는.
“알기 쉬운 점은 좋군.”
구파일방 중 일방을 맡고 있는 개방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속세에 그 터전을 두고 있지만, 구대문파는 산속에 그 터전이 있다. 그것도 하나같이 영험한 영지라 알려진 명승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탓인지 구대문파의 후기지수들이 모이면 각 문파의 명승에 올라 떠오르는 태양을 본다든가, 한밤중 조촐한 주연을 여는 식으로 호연지기를 다지곤 했다.
행동의 방식이 전통으로 굳어진 셈이다.
그들에게는 호재였다.
전통적인 것은 언제나 같기에 읽기도 쉬우니까.
“한 번 불탄 적도 있는 주제에.”
숭산 내부, 소림의 영역이라 긴장을 푼 것이다.
“이번에 알게 해주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흐흐흐.”
조금 전 편향적인 말에는 은연중 지양하는 바를 감추려는 노력을 보였다면, 이번에는 상대의 의견에 순수한 동감을 표현하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본질과 멀어지고 있다. 길들여진 개가 되는 건 우리의 길이 아니다. 저 어린 것들의 행동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급진적인 사상이 흘러나온다.
아주 안 좋은 쪽으로.
허나 여기 있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본능이 옳다는 길을 따른다.
그들의 본능은 분명했다.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
계산이 없는 세상.
허례허식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야성의 시대.
“불꽃은 우리가 당긴다.”
폭주하는 자들이 살기를 품었다.
***
밀물처럼 밀려들어 온 것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삼켜지는 느낌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 자신의 존재조차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정신을 차려 보니.
“이건 좀 무서울 정돈데.”
무림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기연이다.
숨겨진 보물. 옛 고인들의 유산.
마당발인 할아버지를 둔 덕분에 무림에 관한 이야기들은 제법 여러 가지를 들으며 자랄 수 있었다.
그중에는 영약에 관한 이야기도 많았다.
엄청난 영약을 먹었더니 단전이 땡땡해질 정도로 속이 꽉 차 버렸다는 이야기라든가.
헌데 지금 내가 느끼는 건 달랐다.
텅 비었다는 느낌이다.
몸 안에 빈 공간이 생긴 느낌이랄까.
뭔가 엄청나게 확장된 것 같다.
이게 단순히 느낌으로만 남는 범주가 아니니 문제다.
뭐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까?
그릇이 커졌다?
장삼풍 사부와 달마 사부는 내게 기초를 만들라고, 천상에서 가다듬으셨다는 기초 단련법을 베푸셨다.
도제비공이니, 역근경이니, 천축유가술이니 하는 무공을 통해 연단 했다.
그렇게 노력을 기울인 보람이 있어 어느 정도 내 안에 만들어진 그 기초라는 것에 대해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또 가늠이 안 된다.
너무 커져서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무언가를 보는 듯하다.
이 기운을 받아들이기 전이 큼지막한 장원 하나를 건설하는 정도의 기초 공사를 벌여 놓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거대한 성을 구축하기 위한 기초 공사의 터전을 만든 느낌이다.
더 크고, 더 웅대해졌다.
아직 기초 공사일 뿐이라 그 위에는 아무것도 올라가지 않았지만, 거대한 잠재력이 그 안에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은 당사자인 내가 누구보다 잘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지금껏 노력해 온 것에 몇 배가 넘는 성과물이 뚝 떨어진 느낌이라 괴리감이 생길 정도다.
이래서 무림인들이 기연, 기연 노래를 부르나 보다.
한 방에 벌어들인 게 대체 얼마야?
어! 잠깐. 그런데 뭐지?
내공이라는 건 외부의 기운을 내부에 담아 채우는 거잖아?
그런데 왜 나는 이 기운을 받아들이며 무언가 채워졌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공터를 만들었다고 느끼고 있는 걸까?
뭔가 내가 아는 일반적인 내공이라는 개념과는 좀 다른데?
그냥 느낌적인 느낌 아닌 느낌 같은 건가?
[중토신공은 어떠냐?]“아!”
몸 안의 상태를 관조하던 중 갑자기 달마 사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정신줄을 놓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쭉 지켜봐 주시고 계셨나 보다.
장삼풍 사부가 어딘가로 끌려(?)갔다고 하시는 걸 보면 천상이란 곳도 시간이라는 게 마냥 여유 있는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참 감사한 일이다.
그 감사함을 담아 달마 사부의 말대로 중토신공을 끌어올려 봤다.
“……됐네요. 일단공.”
청명심법으로 흔들리지 않는 맑은 정신을 유지한 채 극도로 집중한 상태가 되어서야 겨우 닿을 수 있었던 중토신공 일단공.
그게 지금은 너무 쉽게 되어 버린다.
그 당시 경험했던 충만했던 힘이 몸 안에 차올랐다.
이게 이렇게 쉽게 돼도 되는 건가?
대체 얼마나 변한 거야, 나?
“흠?”
가만? 텅 비었다고 느꼈던 게 방금인데, 차오른다?
이 힘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건데?
머리가 좀 커져서 그런지 보이는 게 다르고 느껴지는 게 다르다.
사부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했겠냐만, 따로 잔소리하지 않으신다는 건 내가 맞는 길로 가고 있단 소리겠지만 모른다는 건 역시 찜찜한 일이다.
언제 짬을 내서 진지하게 물어봐야겠다.
아니, 굳이 멀리 갈 필요 있나?
지금 물어보면…….
“흐악!”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놈이 초를 치네.
괴상한 비명 소리를 내며 눈을 뜬 백무호가 발작하듯 일어나는 걸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녀석이 나를 발견하곤 가까이 다가와 내 몸을 이리저리 만져봤다.
“왜?”
“꿈을 꿨어.”
“꿈?”
“응. 너랑 내가 금발 성성이랑 입 맞추는 꿈.”
“…….”
세상은 넓고 취향은 많다지만 이건 좀.
이 녀석보다 좀 더 아는 게 있다 보니 더 그러네.
“그냥 내버려뒀더니 아예 하나로 합체까지 하던데?”
“…….”
“아니, 그런 쪽 이야기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하나. 입속으로 쑥 빨……. 어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뒷걸음질 치면 나 상처받지.”
“안 치게 생겼냐?”
이 녀석이 헛것 좀 보고 개꿈 좀 꿨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으로 치면 그렇게 충격받을 일은 아니긴 한데.
‘쟤 암컷이다.’
갑자기 기억력이 열일 해줬다. 달마 사부가 다시 한번 머릿속에 진실을 터트려 준 것처럼.
달마 사부에게 물어보면 진실을 알 수 있으려나?
아니, 그냥 그만 생각하자.
이 이상 나가는 건 위험하다.
괜한 물음을 던졌다가 ‘그럼 혀는 왜 움직였냐?’ 같은 대답이 돌아오면 재기 불능이다.
“넌 뭐 바뀐 거 없냐?”
“나? 나야 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녀석의 표정이 갑자기 돌변했다.
“시발?”
대뜸 욕부터 튀어나온 걸 보면, 이 녀석도 얻은 것이 꽤 있는 모양이다.
잠깐 스스로를 관조할 시간을 주자 알아서 몸 상태를 살펴보더니.
“이 정도면 한 번 더 경험하고 싶은데.”
“인간이나 돼라, 미친놈아.”
뭔가 정신 나간 발언까지 한다.
한 번 더 경험해 보고 싶다는 말에 이상한 장면을 상상해 버렸잖아.
진짜 그만하자.
머릿속 상상이라 다행이지, 누가 이런 거 ‘보고 들었다가 괴랄한 거 상상하게 만들면’ 그게 무슨 민폐야.
“무슨 상상을 한 건지 맞혀 볼까?”
그런데 자꾸 이놈이 그 상상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얕게 ‘흐흐’ 웃으며 하는 말과 입가의 웃음이 비열한 악당 그 자체다.
아무래도 여기 오래 있으면 자꾸 언급해서 상상하게 될 것 같으니 빨리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모르겠으니, 우선 소림으로 돌아가자. 자칫하면 이상한 오해 할라.”
“무슨 오해를 말하는 건지 천 글자 내외로 정리해서 이야기해…… 쿠엑!”
“왜 한 번 말할 때 안 들어 처먹니.”
내 주먹에 찰진 감각이 찰진 소리와 함께 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래, 진즉에 이럴걸.
정신 나간 놈이 이상한 말을 지껄이게 계속 내버려두면 나만 손해다.
아니, 장기적으로 보면 아예 기억을 소거시켜 버릴까?
주변에 있는 기억 소거 장치-짱돌의 도움을 얻으면 잘될 것도 같은데.
***
“뭔 주먹이 이렇게 매워.”
백무호는 독하게 자신을 후려 팬 연청운이 훌쩍 나가는 걸 보며 얻어맞은 자리를 문질렀다.
아무래도 멍들 것 같다.
하지만 아픈 것과 반대로 실실 웃음이 나왔다.
무슨 기연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내공이 엄청나게 늘었다.
내공이 늘어나서인 건지 몸 자체의 감각이나 성능이 아예 갈아치워진 수준으로 달라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백무호의 손이 허리춤에 있는 검에 닿았다.
달라진 몸 상태 때문인지 익숙한 검의 감촉마저 새롭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몸을 움직여 검을 휘둘렀다.
사악!
깔끔하게 베이는 검의 흔적.
검이 가르고 지나간 벽의 궤적이 현재의 위치를 말해준다.
“비슷한가?”
물론 저기 있는 흔적과 비교하면 양심 없는 소리다.
하지만 적어도 저 검흔이 담고 있는 것을 비슷하게 담아냈다.
여기에서 살을 붙이고 키워낸다면 언젠가는 닿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를 담아 한 말이다.
그나저나, 아버지도 놀란 재능을 가진 내가 평생을 바쳐야 간신히 닿을지도 모르는 경지의 검흔이라니.
이 검흔을 남긴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늘 끝에 닿은 자라도 되는 건가?”
그리 생각하니 새삼 무럭무럭 궁금증이 자란다.
연청운, 요즘 들어 묘하게 비밀이 많아진 친구를 족쳐 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그 비밀을 건드리면 결과가 좋지 않을 것 같아 묻진 않았다.
뭐, 언젠가는 말해주겠지.
아님 말고.
끝까지 이야기해주지 않는 거라면 이유가 있을 녀석이니까.
지금은 그냥 따라만 다녀도 재밌다.
그거면 됐다.
***
뒤늦게 나온 백무호가 이상할 정도로 실실 웃는다.
안에서 혼자 있을 때 내 뒷담이라도 깠나?
“……응?”
잠깐 백무호에 대해 생각하는 중 귓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칼부림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숭산에서? 농담이지?”
“그러게.”
어떤 미친놈들이 여기에서 칼부림을 할까?
백무호 이 녀석도 반신반의하는 기색이다.
그러다.
“……진짜네?”
조금 거리가 가까워지니 이 녀석도 들은 것 같다.
산울림 속에 조금씩 소리가 묻어나고 있다.
[허!허!허!]달마 사부, 진정하시고요.
어째 숭산에서 칼부림이라고 하니 달마 사부의 다른 쪽 인격이 자극받으시는 것 같다. 웃음소리에서 느껴지는 그 진한 감정의 향기가 부담스럽다.
아무래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일단 발걸음을 움직여 보는데.
소리를 따라 움직이는 도중 갑자기 뭔가가 튀어나왔다.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 칼날의 번뜩임.
매서운 기습이 덮쳐왔다.
쩌엉!
우직!
반사적으로 손속에 사정을 두지 못했을 만큼.
가차 없이 휘두른 손이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 칼날을 부수고, 사람을 뭉갰다.
피떡이 되어 날아간 누군가가 쓰레기처럼 던져졌다.
“깜짝이야…… 망할!”
여러 가지로 놀랐다. 갑자기 기습을 당한 것도 그렇지만 지금 다시 경험한 중토신공 일 단공의 위력까지.
다시 확인해 봐도 전율스러운 위력이다.
“이거 힘 조절이 잘 안 되네.”
“힘 조절이 안 되신다? 그런 거로 내 머리통을 두들겼단 말이지?”
무심코 한 내 말을 듣고 백무호의 눈빛이 살벌해진다.
음?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