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93
292화 저쪽도 나름 급했던 건가?
‘내가 너무 순진했네.’
어쩌면 육영기와 논쟁이 벌어졌을 때 내 편을 들었던 것도 미리 입을 맞춰 두었던 책략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 보면 안휘 송하상단이 행했던 ‘좋은 놈 나쁜 놈’ 구도와 판박이다.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이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방도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혈교대법을 받은 이들에게서 특유의 느낌을 받는 일이 없었다면 의심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무당파는 장문인 경쟁을 했던 장로급이 혈교 대법을 받았는데, 소림이라고 학의 손길이 닿은 자가 없을 리가 없지. 신승 어르신 또한 소림의 무공이 기본을 잃었다고 대노(大怒)하셨었으니까.’
상황을 너무 편하게만 보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우연히 이화가 날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잠을 깼다가 엮이기 시작한 일들이 여기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이화의 꿈이 복을 부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도연대사가 펼치는 무공의 투로가 끝을 맺었다.
“어떤가? 소림 무공은?”
[허!허!허! 불제를 열자꾸나, 제자야. 목탁으로 뚝배기를 깨부수는 청아한 소리와 함께 불호를 외우는 것이다! 소!림!답!게!]뭔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소림과 달마 사부가 생각하는 소림 사이에 심각한 괴리감이 있는 느낌이 드는데, 착각인가?
이대로라면 나도 모르게 정신 오염을 당해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무당파야, 이 미친 땡중아아아아!]다행히 장삼풍 사부는 제정신인 것 같다.
[제자야, 쓰레기 투기는 다른 곳에 가서 해라!]‘아, 그렇구나. 쓰레기 투기는 무당산에서 하면 안 되는 거구나. 고건 몰랐네.’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정말 이분들이 ‘그’ 삼풍진인과 달마대사님이 맞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스승님들의 가르침이 내 안에 녹아들어 있는 만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떠오르곤 한다.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주변 사람들 입맛에 맞춰 변해 왔는지를 실감한달까.
“어렵던가?”
“아!”
잡념을 깨우는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얼굴에서 향내가 느껴지는 구수한 인상의 노승을 눈에 담으며 일단 대답을 했다.
“죄송합니다. 소림 무공이 워낙 대단해서…….”
적으로 밝혀진 자에게 조언을 줄 필요가 있나.
말끝을 흐리며 생각을 정리한 나는 바로 결론을 내렸다.
“제가 손댈 부분은 없어 보이네요.”
“허허! 그렇구먼!”
내 말에 도연대사는 기분 좋게 웃었다.
무당파조차 난도질을 당했는데, 소림 무공은 건드릴 게 없다고 하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리 소림 무공에 자부심이 있으신 양반이 혈교 대법은 왜 받으셨습니까.’
그리 생각하니 저 모습도 소림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무당파보다 위에 있다는 순위 놀이에 기뻐하는 것으로 보였다.
당장에 멱살을 흔들고 싶었지만, 애써 자제해야 했다.
아직은 터트릴 때가 아니다.
‘얼른 다른 곳도 살펴야겠다.’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며 나는 다음 행보를 서둘렀다.
***
무당파 내에 모인 구파 명숙들을 두루 만나 살펴본 뒤 으슥한 곳에서 홀로 한숨을 내쉬었다.
“점창도 넘어갔네.”
의외인 점은 화산이었다. 화산파 장로에게서는 혈교의 대법을 받은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소림과 무당파조차 혈교의 흔적이 발견됐다.
그렇다면 지금쯤 화산파 내부에 잔뜩 퍼져나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공동파도 안심할 수 없나…….”
공동파 역시 오문도장만 멀쩡한 상황일 뿐 내부는 이미 학의 손에 좀먹어가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진다.
저들의 움직임은 생각 이상으로 은밀했고, 대비는 촘촘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먼 곳의 일이야. 우선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자.’
전 현도당주에게서 얻어낸 정보를 근거로 예상하자면, 무당파에서 일이 벌어지기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이쪽부터 제대로 대비할 필요가 있다.
“사부.”
[말해라.] [듣고 있느니라.]열기가 빠진 장삼풍 사부와 달마 사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서늘했다.
추론을 논하기 딱 좋았다.
“이번에 저들이 노리는 게 무당파의 멸문일까요?”
[멸문이라…….]무당파는 소림과 함께 정파의 양대 산맥이다.
무당파가 멸문한다면 정파는 적지 않게 동요할 것이다.
당장에 떠오르는 목적이지만, 지금까지 본 학의 움직임은 이렇게 단순하게 가는 일이 없었다.
[굳이?] [무당파의 존재감이 큰 것은 사실이다만, 네가 학이라 명명한 자들이 간자를 심어두기 위한 노력을 모두 쏟아부을 정도냐면 선뜻 답할 수가 없겠구나.] [뭐야! 지금 무당파 무시해?] [말이 그렇다는 거네. 말이.]역시나 장삼풍 사부와 달마 사부의 의견도 같았다.
무당파의 멸문을 노리는 건 아니다.
공격이 있기는 하겠지만, 학이 본색을 드러낼 시기는 아니다.
정파의 존립을 결정짓는 거대한 전쟁을 앞두고 있다면 모를까, 따지고 보면 이 싸움은 한정된 지역에서 벌어지는 국지전에 가깝다.
자잘한(?) 싸움에 아껴두고 있던 좋은 패를 소모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당장 혈교 대법을 받은 구파 장로들이 뒤통수치는 일은 없겠네요.”
[당장은 그렇겠지.]“공격은 하지만, 멸문이 목적은 아니다……. 화산파?”
무당파를 화산파처럼 만든다?
공격을 당해 가족처럼 여겨오던 동기들과 어른들이 죽어 나가면 무당파 역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분노에 휩쓸려 힘을 필요로 하는 마음이 커지면, 그 자체가 학이 파고들 틈새가 될 것이다.
[내가 학이라면, 이번 기회에 무당파에서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치워 보겠구나. 그 허도라는 아해나, 부패 청산을 한다며 날뛴 벽하라는 장문인 아해를 치우겠지.]“……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벽궁도장이 장문인에 오를 테고요.”
무당파가 학의 주구로 떨어진다.
반발하는 자들은 은밀하게 제거당할 것이다.
혈교의 대법을 위한 제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리고 훗날 학의 존재가 드러났을 때, 맞서 싸우기 위해 정명한 이들이 구파의 힘을 한곳에 모으는 순간,
그날이 구파가 끝나는 날이 될 것이다.
아군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피에 미친 괴물이 되어 정명한 이들을 잡아먹을 테니까.
막아야 한다.
허도진인과 무당파 장문인에게 벽궁도장의 존재를 알려 대비토록 했지만, 학이 안배한 그물의 크기를 가늠하니 가만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자칫 함부로 움직이다가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일개 후기지수일 때와는 달리 적어도 이곳 무당파 내에서는 어지간한 명숙 못지않은 유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벽궁도장이 눈치채지 못하게 정보를 획득할 방도가 필요하다.
‘하나 있긴 한데…….’
사부님들께 부담이 되는 일이기에 가능한 한 쓰지 않으려 했던 수단.
그러나 지금은 사양하고만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저기…… 사부님…….”
[왜? 인과 좀 써야 할 것 같냐?]“……예.”
이미 많은 것을 받았는데 이런 청을 드려야 하는 것이 송구할 따름이다.
“죄송합니다.”
[별게 다 죄송하다. 제자에게 그 정도도 못 해 줄까.] [이럴 때 쓰라고 모아둔 인과니라. 잘 써 준다면 우리야 좋은 일이지.]아낌없이 퍼주겠다고 말씀하신다.
특히 달마 사부 같은 경우는 요 근래 특근이다 야근이다 일이 무척 많으셨다고 들었는데, 그걸 털어먹는다고 생각하니 더욱 부담이 커졌다.
[딱히 우리에게 죄송할 거 없어.]“예?”
[천사대선도 그렇고, 지금 너한테 도움 주고 싶어 안달 난 신선들이 한가득이다. 그 정도 인과쯤 감당해 주겠다는 양반들은 차고 넘쳐.]어째 이거 남의 주머니 털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아무튼, 벽궁이란 놈을 중심으로 탈탈 털어 보마. 보아하니 손에 피 묻히는 걸 꺼리지 않는 놈 같은데, 근황 쪽을 뒤져 보면 뭐가 나와도 나오겠지.]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갑기만 하던 장삼풍 사부의 목소리에서 생기가 넘쳤다.
[아, 그리고.]“말씀하세요, 사부.”
[그 벽궁이란 ‘삐이이이(자체 심의 삭제)’는 ‘가능한 빨리’ 이쪽으로 보냈으면 좋겠다.]어째 무척이나 감정이 실린 데다, 특정 부분이 강조된 어조다.
이번에 마각을 드러내지 않으면 암살이라도 고려해야 할 것 같다.
“……기회 봐서 보내겠습니다.”
[기대하마.]생기발랄한(?) 장삼풍 사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거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나는 ‘느긋하게’ 기다리마. 허!허!허!]이쪽도 진지하게 기회를 살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저녁 식사 시간.
[나 왔다.]정말 작정하고 움직이셨는지 생각보다 빠르게 사부님들이 오셨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밥을 먹던 손이 딱 멎었다.
백무호가 피식 웃었다.
“왜? 벌레라도 씹었냐?”
“부러우면 몇 마리 잡아다 입에 넣어 주랴?”
“됐다, 인마.”
곧바로 백무호를 제압한 나는 다시 젓가락을 들며 이어질 사부님의 말씀을 기다렸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여기 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확실히 소수로 다수를 제압하려 할 때 유효한 방법이 독이긴 하다.
독을 쓴다고 가정한다면 둘 중의 하나다.
우물 같은 식수원에 독을 풀거나, 식사에 넣거나.
다만 무당파의 경우 흐르는 샘물을 떠다 마시니 식사 쪽에 손을 쓸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당장 이 식사에 독을 넣진 않았을 것이다.
근시일 내에 일을 벌이려고 생각한다면 만성 독보다는 즉효성 독을 쓸 것이기 때문이다.
[놈이 구한 건 즉효성 독이다. 주변에 피 토하는 놈이 없다면 독이 들어있진 않을 테니 안심해도 된다.]역시나 예상대로다.
하지만 떨어진 입맛이 돌아오진 않았다.
나는 들었던 젓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다른 일행들도 뭔 일인가 싶어 내 눈치를 살폈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사부님이 주실 정보 쪽이다.
[입막음한답시고 독을 구한 뒤 상대를 죽여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했다만, 덕분에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벽궁도장으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일 것이다.
철저한 대비를 위해 사람을 죽여 입을 막았는데, 오히려 살인을 한 덕분에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벌일 놈의 이름도 알아냈다. 남수라는 놈인데 알고 있느냐?]얼마 전 벌벌 떨며 미안하다 사과하던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윤시후와 함께 나를 괴롭히던 모습도 떠올랐다.
[이건 운이 좋았다. 벽궁이란 놈이 얼마 전 속가제자 둘을 죽였더구나. 하나는 혈교 대법에 당한 탓인지…… 으음, 이 부분은 됐고. 아무튼, 다른 하나는 제대로 명계에 들어왔다. 곧 죽을 녀석이라 생각했는지 말실수를 했더구나.]‘저쪽도 나름 급했던 건가?’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척이나 성급했다.
아무리 속가제자라고 해도 무당파 내부에서 목숨을 거두다니.
‘내가 해코지를 할 거라 생각한 속가제자 몇몇이 도망쳤다고 하려는 건가? 차후 시체가 발견된다면 무당산 주변에 숨어 있다가 적습에 희생당했다는 식으로 처리하고?’
어느 정도 계산속이 보이긴 하지만, 임기응변에 의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너무도 허술하다.
그렇기에 틈이 보였다.
누가 일을 저지르려는지도 파악했으니 대응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아니, 이 정도 정보가 모였다면 역으로 털어버릴 계책을 세우는 것이 맞다.
계획을 세우는 머릿속이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