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99
298화 유언, 고칠 생각 없으십니까?
구파 전체가 참석하지 못한 불완전한 회동도 막바지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에 맞춰 참석한 모든 무림 명숙들이 함께하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보통 이런 모임이 있을 때는 서로서로 안면을 익히기 위한 기회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고, 보통은 다음 실무를 맡게 될 중간 관리들에게 주로 기회를 주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모든 무당파 제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대체 이게…….’
그리고 묵묵히 이를 지켜보고 있는 벽궁도장은 당혹스러움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평정(平靜)을 가장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만 해도 벽궁도장은 가슴이 벅차올랐었다.
드디어 무당파 장문인의 자리가 손에 들어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희희낙락했다.
사실 설렘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하지만 지금은 가출하려는 정신줄을 필사적으로 움켜잡아야만 했다.
‘신제현 그놈이 죽었다?’
정기적으로 신제현에게 식량을 전하러 가는 무당파 제자를 몰래 지켜보며 벽궁도장은 내심 명복을 빌어주었다.
제물이 되어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의를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다.
벽궁도장은 자그맣게 도호를 외우는 것으로 스스로의 양심을 지켰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문파가 소란스러워질 것이지만, 그전에 더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니 큰 문제가 없으리라.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예상과 달리 신제현에게 식량을 전하러 간 무당파 제자가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본산으로 달려왔다.
무척이나 당황한 듯 두서없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지만,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신제현이 머물던 암자는 박살이 났고, 주변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그 가운데는 목이 부러진 신제현의 시체가 있었으며, 암자에는 무당파 속가제자의 도복을 입은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고 했다.
암자가 부서진 것은 그럴 수 있다.
혈교의 대법을 받고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날뛴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제현이 시체가 되었다는 말을 듣자 벽궁도장은 눈앞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신제현을 살해했다는 이야기다.
‘대체 누가? 왜? 무슨 연유로?’
완벽했던(?) 계획에 구멍이 뚫렸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구멍이!
곧 있을 무당파의 겁난, 그 책임을 덮어씌울 범인이 사라진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신제현의 폐맥대법이 풀린 것이 드러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여기에 말라비틀어진 속가제자의 시체가 발각되었다면 자칫 혈교의 대법을 사용한 것까지 밝혀졌을 공산이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조용하다는 것은 손을 쓴 자가 입을 다물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도 힘겹게나마 벽궁도장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혈교의 대법을 받은 신제현을 쓰러트렸다면 고수라 칭하기 부족함이 없다.
그렇다면 아마도 장문인과 허도진인 그리고 번거로운 장로들을 독살하기 위한 음식을 먹고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새롭게 범인을 만들어야 했지만, 그거야 어떻게든 될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초조해진 벽궁도장의 심중을 흔드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저, 저, 저, 저놈들이 왜 여기에?’
식사 준비를 해야 할 주방의 책임자가 갑자기 연회장에 들어온 것이다.
주방에 준비해두었던 계획도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다.
‘글렀구나…….’
무당파 수뇌부들을 독살하지 못하는 이상 외부의 공격이 있다고 해도 수월하게 대응할 수 있다.
‘다음 기회를 노려봐야겠어. 조용히 몸을 낮추면 다음 기회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마음을 진정시킨 벽궁도장이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허나 눈을 굴리는 도중, 벽궁도장은 뚜렷하게 자신을 살피는 시선을 파악했다.
허도진인과 장문인이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주시하고 있었다.
‘큭! 알고 있어. 알고 있는 거야!’
눈이 마주치면 사람은 뭔가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반가운 사람이면 손을 흔들며 웃고,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면 고개를 휙 돌린다.
허도진인과 장문인의 반응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눈이 마주친 적 없다는 듯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다른 때라면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겠으나, 지금의 벽궁도장은 달랐다.
‘저들이야! 알아차리고 손을 썼어!!’
벽궁도장은 계획을 망가트린 자가 저들이라고 확신했다.
이어 벽궁도장의 시선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사전에 계획을 공유해온 다른 이들, 협력자들을 바라보니 그들도 어찌 된 일이냐며 눈으로 물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벽궁도장이라고 딱히 답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자 그들이 이내 고개를 휙 돌렸다.
명백히 의도가 있는 반응이다.
죽으려면 혼자 죽으라는 외면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상황에서 벽궁도장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미 다 파악이 끝난 상황이라면…… 왜?’
사안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즉시 목을 참(斬)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증거가 없어서?
아니면 구파의 명숙들이 있는 자리에서 일을 벌이면 무당파의 체면이 떨어지는 일이기에?
‘어느 쪽이든 다른 선택지가 없다.’
선택은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어느 쪽이 정답이든 벽궁도장이 행할 방도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무조건 발뺌한다.
뭐라 하든 아니라고 잡아뗀다.
생존이 걸린 문제다.
벽궁도장은 절박해졌다.
“저, 저, 저, 저놈……!”
그런 가운데 벽궁도장은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연청운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고수를 거느린 채 한 손에 누군가에 수급을 들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천하를 평정하고 돌아온 패왕의 모습과도 같았다.
***
산을 오르는 도중에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신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지만, 그 사이사이에 날카로운 내용들이 숨어있었다.
“벽궁도장은 무당파 내 입지가 작지 않네만. 괜찮겠나?”
은근히 찔러보고 가늠한다.
제갈윤재와 판박이다.
새삼 그 화법이 어디에서 도래되었는지 알 것 같다.
“몰아쳐야죠.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허튼소리 지껄일 여유를 주지 않도록 아예 뒤집어엎을 생각입니다.”
“흐음…… 대충 상황이 그려지는군. 다만… 버릇없다고 뒷말 좀 나오겠네만?”
“예의는 자격이 되는 사람에게나 차리는 겁니다. 하물며 이런 상황에선 그런 거 신경 쓰느라 삭초제근 못 하는 쪽이 병신이죠.”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잘 나갈 때야 무례를 감수해 주지만, 언젠가 아쉬운 소리를 할 때가 오면 과거의 업보가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그 겸손함도 상황을 봐 가며 해야 하는 거다.
“과연.”
제갈신무가 흡족한 표정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판을 차려주겠네. 어디 날뛰어 보게나.”
제갈윤재와 차이가 있다면 아마 이점일 것이다.
은근히 찔러보지만, 그에 대한 대가도 마련해 놓는다.
기분 나쁜 부분이 있지만, 그를 상쇄할 만한 대가를 내어놓는다.
계산이 확실한 사람이다.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준다.
“감사합니다.”
제갈윤재도 이런 부분까지 잘 배웠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힐끔 제갈윤재가 있는 방향을 살피니 묘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 추근대는 건가?’
제갈윤재 옆에는 지적인 미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 미인 옆에 무려 팽철이 실실 웃으며 함께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봐도 작업을 거는 걸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하북팽가 인간이 제갈세가 여식에게 추근대는 광경이라니. 개가 고양이에게 구애하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다.
진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런 가운데 어느새 무당파 산문을 앞에 두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무인들의 모습에 긴장한 무당파 제자들을 향해 제갈 가주가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네만, 검을 걸어두고 갈 상황은 아닌 듯하이.”
“어…… 으음…….”
그리고 당황해하는 무당파 제자들을 뒤로한 채 무당파로 들어섰다.
[진짜, 애새끼들 수준에, 문파 돌아가는 꼬라지 하고는……. 어휴!]장삼풍 사부의 장탄식이 이어졌지만, 보는 눈이 많아 못 들은 척했다.
그렇게 제갈세가 무인들과 함께 허도진인과 장문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구파 회동이 종료되기 전에 친분을 두텁게 하기 위한 모임이 있을 것이라 미리 언질을 받았었다.
회장으로 다가갈수록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들 가운데 허도진인과 장문인이 앞으로 나섰다.
두 분께 포권을 쥐며 인사를 올리려는 찰나, 제갈 가주가 나보다 한발 더 나아가 예를 갖췄다.
“천기신검 제갈신무가 무당파 장문인을 뵈오.”
“오랜만에 보니 반갑소만… 반가움만으로 대할 자리는 아닐 것 같구려.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소이까?”
“흑살대와 흑룡회가 산 아래 있더이다.”
“뭐라? 제육천이? 둘이나?”
장문인 벽하도장께서 크게 놀라 외쳤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제갈 가주는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크게 놀라는 것은 이해하오만, 여기 무림의 신성이 흑룡회 공격대를 홀로 쓸어버린 일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외다.”
“흑룡회를?”
“홀로?”
크게 놀란 좌중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공격대라는 구분을 두긴 했으나, 흑룡회의 명성을 아는 사람들은 쉬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들이다.
“한데 제갈세가와 격돌했던 흑살대 일자살수의 말이 흥미롭더이다.”
운을 띄운다.
한 번에 모든 정보를 풀어내지 않고 좌중의 시선을 끌어모아 한껏 북돋는 언변이 절정고수급이다.
장문인 역시 제갈 가주가 판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기꺼이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판을 키우셨다.
“무슨 말을 했소이까?”
“벽궁도장이 자신들에 맞춰 내응할 것이라 하더이다.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 정보를 캐내려 유도했더니 말실수를 하더이다.”
‘유도는 무슨…….’
말실수는 고사하고 대놓고 까발린 정보다.
하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다.
“과연 신기제갈.”
“역시 천기신검이외다.”
좌중들은 크게 감탄하며 제갈 가주를 칭송했다.
“그것이 사실이오?”
“함께 있던 연 소협도 같이 들었소이다. 그렇지 않은가?”
판을 깔아주겠다더니 허언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판을 마련해준 제갈 가주는 본인의 역할을 끝내고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제는 내 차례다.
지금 같은 자리에서 필요한 것은 논리적인 설득력이 아니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자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차라리 살짝 미친놈처럼 보이는 것이 제격이다.
그럼, 여기에서 어떤 행동이 가장 충격적일까?
답은 내 손에 있다.
휙! 데구르륵!
나는 좌중이 모여 있는 중앙으로 들고 있던 수급을 던졌다.
무림에서 좀 굴러본 사람이라면 잘린 목 정도는 흔하게 봤을 것이다.
직접 사람 목을 벤 경험이 있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고작 수급 하나에 허둥댈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 수급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
“으으음…….”
“이, 이건…….”
“백마창 하후선엽이 맞구려.”
흑살대와 흑룡회를 물리쳤다는 제갈 가주의 말이 사실이다.
실제로 명성이 높은 흑룡회 고수의 수급을 보여주어 증명했다.
고로 제갈 가주의 말은 모두 진실이다.
기적의 삼단논법이다.
선후 관계를 따지며 꼬투리를 잡을 요소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럴 틈새를 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는 벽궁도장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왜 그러셨습니까?”
너는 배신자다.
확정 지으며 몰아붙인다.
괜한 말이 나와 논쟁으로 흘러갈 여지를 주지 않아야 한다.
“……모함… 모함이네!”
아직도 당황스러운지 영양가 없는 반론을 꺼내 들었다.
딱 내가 원한 대답이었다.
이젠 논리적인 대답을 내놓을 여지만 없애면 마무리다.
“유언으로 남길 말로는 형편없군요.”
“너어…….”
“차라리 듣고 납득이라도 될 개소리를 하십시오.”
“무례하다!!”
벽궁도장이 노기를 드러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걸로 끝났다.
배신자라 못 박아버린 상황에서 감정적인 대응이 튀어나온 순간 이후로는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 될 뿐이다.
어지간히도 당황했던 모양이다.
준비한 계획을 보면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좋은 머리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궁지에 몰려있는 것 같다.
아니면, 이 계획조차 다른 누군가가 짜준 것일 수도 있고.
“다시 한번 묻지요.”
이제야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린 듯 퍼뜩 정신을 차린 것 같지만 이미 늦었다.
“유언, 고칠 생각 없으십니까?”
무슨 변명을 한들 다음 말은 유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