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00
299화 새로운 질서
벽궁도장을 몰아붙이면서 기형도를 든 흑살대 살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파 위선자들끼리 서로 물고 뜯는 꼴을 보고 싶다던 말이 무형의 칼날이 되어 가슴을 찔렀다.
딱 그 말대로 될 상황이다.
그 비웃음 소리가 귓가에서 다시 한번 감도는 것 같다.
‘하지만 그냥 넘길 수도 없는 일이지.’
결코, 어설픈 봉합이나 자비로 넘길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더 문제가 커지기 전에 단호하게 잘라내야 한다.
“더 할 말이 없으시다면 출수하겠습니다.”
벽궁도장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막 나가니 기분이 더러운 모양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일그러진 분노 너머로 보이는 감정.
벽궁도장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런 참담한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참이오?”
분노한 감정을 가면처럼 뒤집어쓴 채 주변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그 언사에 몇몇 인물이 반응을 보였지만, 그보다 먼저 나서는 이가 있었다.
“벽궁도장.”
“장문인…….”
벽궁도장의 얼굴에 두려움이 짙어졌다.
마치 장문인이 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자네, 파문이네.”
“이럴 순 없소이다!!”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이는 즉흥적으로 내리는 결단이 아니야. 자네가 벌인 일들을 내가 모르리라 생각했나?”
“이이익!!!”
벽궁도장에게 가해지는 처사가 심하다고 느끼던 몇몇이 장문인의 말에 멈칫했다.
자신들이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 같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 나는 입술을 살짝 달싹였다.
“뒤를 부탁드립니다.”
[알았다.]사부님들께 확답을 들은 만큼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순간 벽궁도장의 일격이 뻗어왔다.
태청산수(太淸散手).
허허로워 보이는 손짓이지만, 그 안에 도문 특유의 태청강기가 담기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태청산수의 공부가 깊으면 어른 두세 명이 손을 이어야 감쌀 수 있는 거목도 산산조각 난다.
위력적인 일수.
시작부터 태청산수를 날리는 이유는 뻔하다.
어설프게 맞서면 그대로 곤죽을 내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게 싫다면 길을 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벽궁도장의 생각일 뿐이다.
정면으로 맞서는 내 손에 장삼풍 사부의 천라무결의 수법이 어렸다.
상대의 내력을 파훼하는 기운이 벽궁도장의 태청산수에 맞섰다.
팡! 파파팡!
“큭! 노, 노옴!!”
한 걸음의 물러섬도 없이 모든 공격을 다 받아내자 벽궁도장에게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내 귀에는 뜻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어 당황해하는 비명일 뿐이다.
“유언치고는 짧네요.”
다급함이 드러나기에 살짝 속을 긁어주자 바로 반응이 나왔다.
구궁신행장(九宮神行掌).
보법으로 구궁의 변화를 밟으며 상대의 사각을 파고들어 장법을 펼치는 무공이다.
어떻게든 몸을 뺄 생각이 가득하다.
덕분에 수를 읽기는 쉽다.
수 싸움을 앞선 상태에서 무당파 무공이 밀리는 일은 없다.
벽궁도장이 펼치는 무공의 흐름 속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
뒤섞이는 손이 아교처럼 달라붙는다.
“이익!!”
팔이 묶이니 발의 움직임도 멎는다.
구궁의 변화가 사라지니 평범한 힘겨루기가 되었다.
“크흐흐흐…… 흐읍!”
순간 벽궁도장의 입가에 비리한 미소가 걸린다.
동시에 맞닿은 손을 타고 내력이 노도처럼 흘러들어온다.
내공 대결로 싸움을 끌고 들어가려는 것이다.
‘되겠냐?’
헛웃음이 나왔다.
흡성대법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한 게 나다.
뭣보다 진심으로 내공 대결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공 대결로 들어가면 불리할 것이니 알아서 물러나라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어린 만큼 내공이 얕다고 생각할 테니 아주 틀린 판단은 아니다.
아니면 내가 손을 떼고 물러나는 틈을 타 나를 제압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을 노리는 것이든 상관없다.
헛된 망상일 뿐이니까.
“많은 것을 보여주십니다.”
“……?!”
벽궁도장이 경악했다.
내력 대결 도중 입을 여는 것은 금기다.
몸 안에 내력을 부풀려 맞닿아있는 상태이기에 작은 틈만 생겨도 바람 빠진 보자기처럼 되어버린다.
입을 여는 것만으로 내력이 흐트러지니 그만큼 불리해지는 것이다.
아마 벽궁도장 입장에서는 내 무공이 상상을 뛰어넘는 경지에 다다라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역시나 벽궁도장은 승산이 없다 판단했는지 먼저 손을 떼고 물러났다.
“크흡! 쿨럭!!”
내력 대결은 먼저 물러나는 쪽이 피해를 뒤집어쓰게 되어있다.
내상이라도 입었는지 벽궁도장이 각혈을 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벽궁도장은 끈질겼다.
“비, 비켜라!”
벽궁도장이 다시 한번 도주를 감행했지만, 이번에는 내 쪽을 향하지 않았다.
벽궁도장이 향한 방향에는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육영기?’
종남파 장로가 있는 쪽으로 달려드는 것을 보니 무슨 생각인지 훤히 보였다.
적당히 겨루는 척하며 놓아주려는 것이다.
겁도 없이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꼴을 보니 이기어검으로 발목을 날려버려야 할 것 같다.
허나 그런 내 판단이 행동으로 이어지기 전에 생각 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서걱!
가차 없이 벽궁도장의 목을 날려버린 육영기가 전혀 난처하지 않은 웃음을 흘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육영기!”
“이게 무슨 짓인가!”
사방에서 성토가 이어졌다.
하지만 육영기는 어깨를 으쓱이며 발뺌을 했다.
“모두 보지 않으셨소이까. 벽궁도장이 내게 살수를 펼친 것을. 내 잘못이 아니외다. 굳이 잘못이 있다면 사문의 일에 외인을 휘말리게 한 무당파에 있지 않겠소이까.”
책임을 돌린다.
다짜고짜 살수를 펼쳐 목을 날린 주제에 재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이죽인다.
“뭐, 생각보다 내상이 심했던 것 같소이다. 설마 천하의 무당파 장로가 이 정도도 받아내지 못할 줄이야. 쯧쯧쯧.”
대놓고 무당파를 비하한다.
육영기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갔다.
“그러게 진작 어른들에게 맡길 것이지. 경험도 일천한 주제에 나대기는…… 쯧!”
이제는 내 탓까지 한다.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나는 육영기를 무시한 채 목이 날아간 벽궁도장의 시신을 바라보며 내심 혀를 찼다.
사실 나 역시 벽궁도장을 죽일 생각이었다.
무당파가 개판이 된 것에 열 받은 장삼풍 사부의 지시도 있었고, 정보를 뽑아내는 것은 사부님들이 더 확실했기 때문이다.
살려서 취조를 해봐야 제대로 된 정보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다.
싸움을 어느 정도 길게 끈 것은 궁지에 몰리면 본성을 드러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감 때문이었을 뿐이다.
반대로 허도진인과 장문인은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벽궁도장을 취조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자들을 실토하게 할 생각이었을 텐데 계획이 흐지부지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주방에서 생포한 자가 있으니 정보를 뽑아낼 구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모자를 취조하는 것과는 정보의 급이 다르다.
그렇게 계획이 어그러진 분노는 육영기에게 향했다.
“이 일은 기억해 둘 것이다!”
“허허! 다시 말하지만, 내 잘못이 아니외다. 그럼 살수를 펼치는데 가만히 있어야 했소? 무당파도 예전 같지 않구려. 쯧쯧쯧.”
육영기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난 가겠소. 할 말이 더 있거들랑 어디 종남파에 와서 해보시구려. 하하하하하!”
마지막까지 긁으며 육영기가 자리를 떴다.
그렇다고 육영기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실제로 벽궁도장이 육영기를 향해 무공을 펼친 것은 사실이기에 명분이 부족했다.
이를 바라보며 제갈 가주가 혀를 찼다.
“오대세가에 이어 구파도 오래된 인연의 끝이 보는 것 같군. 분열될 시국이 아니건만. 쯧쯧쯧.”
정사간의 평화 협정이 깨졌다.
사파의 공격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판국에 오대세가와 구파가 분열되었다.
“할 일이 많겠군.”
제갈 가주의 말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해졌다.
오랜 세월 정파를 이끌어온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
무림맹(武林盟).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 비장한 얼굴을 한 오문도장이 내게 다가왔다.
“이제 우리가 대화를 나눠볼 차례인 것 같네만.”
***
선계 역시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안 놓친다!”
벽궁도장의 죽음을 확인한 장삼풍과 달마가 급히 저승으로 향했다.
목표는 벽궁도장의 영혼이다.
이번에는 이미 각 부처의 협조를 얻어놓은 상황이다.
“저승차사 놈들에게 전해! 이번에도 놓치면 축생 신청서에 도장 찍는 게 차라리 나을 거라고!”
혼(魂)은 불멸성을 가지고 있다.
지옥의 그 끔찍한 고문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버티는 것이 혼이다.
혈교의 대법과 관련된 혼들이 제대로 귀천하지 않는 건 소멸된 게 아니라 어딘가로 자취를 감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
누군가 손을 쓴 것이다!
“지상에서 손을 쓴 것이라 생각하는가?”
“가능성은 낮지만…… 수작질을 부리는 새끼가 현천궁의 진전을 이은 놈이라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만한 주술사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 정도로 술법에 통달했다면 어지간한 신령마저 부릴 수 있다.
“뭐, 확인해 보면 알 일이지.”
일손 부족이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 정신없이 바쁜 와중이라면 놓칠 수도 있다. 그랬기에 달마 역시 당시 저승차사의 변명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목표가 명확한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하물며 이번 일은 자오경을 통해 천상에 모두 알려져 있다. 높으신 양반들까지 모두 주시하고 있는 건이다.
저승차사들도 바싹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없다고?”
“예…….”
“진짜? 진짜로?”
눈앞에 밥상이라도 있으면 당장에라도 뒤엎을 것 같은 장삼풍의 행동에 저승차사가 쩔쩔맸다.
“……저도 미치겠습니다.”
저승차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삽이라도 한 자루 쥐여주면 당장에 자기가 들어갈 무덤을 뚝딱 만들어낼 것 같은 분위기다.
“협조 공문 못 받았냐? 그딴 소리 할 거면 축생 신청서 쓰라고 했지? 그래, 다음 생은 어떤 축생이 좋겠냐?”
“거북이면 좋겠네요.”
“거북이? 십장생일세. 왜? 지상에서 한세월 구르다 오게?”
“하아…… 축생 삶이 엿 같다 해도 여기만 할까요. 생각해보면 그게 차라리 휴가 아니겠…….”
“지랄을 한다, 이 십장생아아아아!!!! 너, 이 일 해결될 때까지 야근 확정이니까, 구를 준비나 하고 있어! 수당이랑 퇴근은 꿈도 꾸지 마!”
장삼풍이 저승차사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농담이 아니었는지 저승사자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아쉬워했다.
한숨만 쉬어도 땅이 푹푹 꺼질 것 같은 것이, 굳이 무덤을 만드는 데 삽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허! 골때리는구만. 저승차사가 차라리 축생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꼴이라니…….”
“진심이라는 게 더 문제일세.”
어이가 없지만, 이것이 천상의 현황이다.
눈앞이 깜깜해질 일이다.
그렇게 장삼풍과 달마는 저승차사들을 닦달했다.
그렇게 저승을 뒤집는데 장삼풍에게 걷어차인 저승차사가 다가왔다.
“왜? 축생도에 거북이로 태어나고 싶다고 신청서 넣은 거 아니었어?”
“……알아보니 거북이가 새끼일 땐 생존율이 극단적으로 낮다고 하더라고요. 선배 몇몇이 자유를 찾아 거북이로 탈주했는데, 하루 만에 죽어서 돌아와 말단부터 다시 시작하며 개처럼 구르는 중이라나요.”
“끔찍하네.”
지옥은 지옥이 맞나 보다.
가는 쪽도, 갈리는 쪽도.
“아, 그리고 축생도 쪽에 갔다가 들었는데요.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축생으로의 탈주를 포기한 저승차사가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 벽궁이라는 삐이이이이(자체 심의 삭제)가 죽었을 때 한 선배가 명계 입구에서 경보천선(暻寶天仙)을 얼핏 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 고고하신 대라신선급 대선님을 그런 곳에서 봤다니, 착각이겠죠?”
어떻게든 질책을 피하고자 일단 떠들고 본 이야기 같지만, 그 말을 들은 장삼풍과 달마는 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대라신선급의 대선.
신선 중에서도 꼭대기에 있는 꼰대들이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작자가 거하는 곳이다.
자미궁.
“허어…….”
“이거 진짜 그 양반이 개입한 일인가?”
옥황상제가 거하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