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56
355화 짓밟힌 자들의 의지
사람에겐 인생의 전환점이라 할 만한 특별한 경험이 존재한다.
그중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이다.
자신의 핏줄을 잇는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을 때, 아이를 가진 사람들끼리만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겨난다.
제갈신무 역시도 그 순간을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잃는 순간은 아직 경험하지 않았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오죽하면 자식은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을까.
이 구설만으로도 얼마나 끔찍할지 가늠이 되었다.
그래서 거절하지 않을 것을 알고 제안을 했다.
진법은 그 범위 내의 모든 것에 영향을 뻗는다.
생문을 파악하지 못하면 헤맬 수밖에 없지만, 달리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단이 없다는 문제점도 있다.
적어도 준비가 부족한 현재 상황에서는 한계가 너무도 극명했다.
효율적인 덫인 동시에 불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설령 제아무리 효과가 높더라도 그 내부로 들어가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그렇기에 표적을 유인하기 위해 종남파 속가제자들을 투입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비수가 될 수 있는 무기를 주었다.
사천당가의 독.
사실상 종남파 속가제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계책이다.
그런 제갈신무의 계책을 들은 종남파 속가제자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감사합니다…라…….”
독심으로 계책을 짜냈으나, 종남파 속가제자들의 감사를 받자 가슴이 아려왔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들의 그런 반응조차 예상했던 범주 내에 있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자들.
하지만 그 복수를 해낼 힘이 없는 자들.
그런 그들에게 복수를 해낼 수단과 방법, 그리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막상 그들에게 감사를 받게 되자 제갈신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자식을 가진 부모들만이 공유하는 그 감정이 짜르르 울려왔다.
그 탓에 답지 않은 짓을 했다.
진법을 설치할 때는 필연적으로 생문(生門)과 사문(死門)이 만들어진다.
수로가 닫힌 수맥에는 물이 흐르지 않듯, 일정한 힘의 흐름이 유지되어야 하기에 양방향의 문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진법이 만들어낸 길을 따라 힘이 흐르며 작동을 한다.
제갈신무는 종남파 속가제자들에게 생문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마음이 바뀐다면 생로로 빠져나오라는 의도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종남파 속가제자들은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대인.”
복수에 눈이 먼 자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잔잔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마주하며 제갈신무는 다시 한번 눈을 지그시 감았다.
***
제갈세가의 진법이 펼쳐진 순간, 그 영역 안에 속한 자들은 감각이 뒤틀리게 된다.
손발의 감각은 무뎌지고, 귀에는 이명이 들린다.
심하면 시야가 흔들리게 되며, 환영까지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당연히 전투력은 급격하게 감소하게 된다.
하지만 진법에도 단점은 있다.
피아 구별이 없는 것이다.
진을 펼친 장소에 들어서게 된다면 설령 진을 설치한 제갈세가 사람이라도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보통 침입자를 막고 시간을 끌기 위한 방벽 정도로 활용한다.
진법에 종남파 장로들이 휘말렸다곤 하지만, 딱히 종남파 속가제자들에게 유리한 상황은 아닌 것이다.
서걱!
“제갈세가와 손을 잡았다고 버러지들이 뭐라도 될 것 같았냐!”
종남파 속가제자의 양팔을 가차 없이 잘라낸 육영기가 불을 뿜는 괴물처럼 분노했다.
벌써 십여 명이 넘는 종남파 속가제자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평범한 본산제자들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웠던 종남파 속가제자들이다.
머릿수만 따지면 열 배가 넘었지만, 장로급 고수들이 날뛰는 것을 종남파 속가제자들은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곱게 죽을 생각은 접어라.”
산에서 내려올 때부터 육영기를 비롯한 종남파 장로들은 절대 이들을 쉽게 죽여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팔다리가 잘려 쓰러진 종남파 속가제자들을 짓밟으며 침을 뱉었다.
“땅을 기는 꼴이 딱 어울리는구나.”
콰드드드득!
어떻게 죽게 될 것인지 보여주겠다는 듯 종남파 장로들은 천천히 종남파 속가제자들을 밟아 죽였다.
“흐으…….”
하지만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도 종남파 속가제자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들을 기쁘게 할 만한 것은 어떤 것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듯 치솟는 비명을 삼켰다.
대신 웃음을 흘리며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이 종남파 장로들을 더욱 자극했다.
“같잖은 것들이.”
“얼마나 허세를 부릴지 보자꾸나!”
종남파 장로들은 이를 갈았다.
종남파 속가제자들을 꺾고 부러트려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다.
종남파 장로들에게는 의지를 행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 진법 속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으음…….”
육영기는 한순간 눈앞이 핑 도는 느낌을 받았다.
진법 속에서 힘을 쓸 때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영향을 받았다.
종남파 장로급 고수가 취한 사람처럼 몸을 휘청거렸을 정도였다.
“흥! 그래 봐야 직접적인 해는 없다.”
제갈세가가 진법에 일가견이 있다지만, 타 문파라고 진법에 무지한 것은 아니다.
진법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긴 하지만, 제 발로 사문으로 들어서지 않는 이상 진법에서의 탈출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죽여.”
“그럴 생각이오!”
종남파 장로들이 검을 휘두르자, 속가제자들은 추풍낙엽처럼 썰려 나갔다.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일단 물러나서 제갈세가와 합류합시다! 이대론 개죽음이오!”
벌써 종남파 속가제자 절반이 죽었다.
그중 하나가 열세를 인정하자 기다렸다는 듯 종남파 속가제자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겁먹었군.”
제법 독종 흉내를 내던 종남파 속가제자들이 꽁무니를 빼는 것을 보며 육영기가 비웃었다.
이것이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차이다.
저것들이 본산제자가 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버러지들도 못 되는 것들.”
게다가 제갈세가와 합류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진법의 생문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놈들을 뒤쫓는 것만으로 이 진법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소리다.
“어디 얼마나 꼴사납게 울부짖는지 봅시다.”
일거양득이다.
한층 더 숙성시킨 공포를 주입하고, 덤으로 진법에서 빠져나갈 길도 찾을 수 있다.
“내친김에 제갈세가 놈들도 쓸어버려야겠군.”
육영기는 설령 제갈세가의 가주가 이 자리에 있다고 해도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많은 것을 버리면서까지 혈교의 대법을 받아들여 힘을 키웠다.
개개인의 무위만 놓고 보면 제갈세가는 종남파의 적수가 될 수 없다.
머릿수를 앞세운 검진이라면 좀 까다롭겠지만, 포위당해 퇴로가 막힌 상황이 아니라면 딱히 위협이 될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계산을 마친 육영기와 종남파 장로들은 여유롭게 속가제자들의 뒤를 쫓았다.
진법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졌지만, 생문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버티며 나아갔다.
한데 어느 순간 도주하던 종남파 속가제자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육영기와 종남파 장로들을 돌아봤다.
그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매경풍?”
육영기의 눈에 웃고 있는 종남파 속가제자들의 모습이 한순간 매경풍으로 보였다.
의심이 끝도 없이 부풀어 오를 때의 비열한 매경풍의 모습이 저들에게 덧씌워진 것 같았다.
“아니, 아니야… 난 흔들리지 않았어.”
진법의 영향력이 도를 넘었는지 이제 환각까지 보인다고 여겼다.
“다 베어버리면 그만이지.”
육영기가 검을 불끈 쥐었다.
***
사천당가에서 독을 전달받기로 했지만, 장일선은 독을 다룰 재량이 없었다.
독을 잘 모르는 이들은 하독술을 쉽게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독 역시도 어지간한 무공에 버금가는 연습과 수련이 없으면 능숙하게 다룰 수가 없다.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확실한 방법이라면 무기에 발라 사용하는 것이겠으나, 절망적인 기량 차이를 생각하면 사실상 성과를 내는 것이 불가능한 방법이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장일선은 한 가지 유력한 방도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에 대해 사천당가 고수와 상담을 했고, 가장 적합한 독을 받을 수 있었다.
‘미안해하지 마시구려. 이건 온전한 내 선택이라오.’
독을 건네주면서도 사천당가 고수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피신시킨 종남파 속가제자들의 식솔들은 무림맹에서 책임지겠다는 약조를 했다.
복수를 끝내고 어떻게든 살아만 남는다면 천금을 써서라도 살려낼 것임을 약조했다.
진법에 대해 설명하던 제갈세가 가주는 마음이 바뀌면 언제라도 생문으로 도망치라며 길을 알려주었다.
‘감사하오.’
하지만 누구도 생문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모두가 죽음을 택했다.
허망하게 죽어간 자식의 복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다.
‘감사하오. 이렇게 내 손으로 원한을 갚을 기회를 주었으니!’
모두가 각오한 길이다.
단 한 번뿐인 기회였기에 가장 확실한 상황을 만들고자 계획을 짰다.
진법이 작동한 직후에 곧장 독을 쓰는 것은 불확실했기에 시간을 끌었고, 상대를 자극해 감정적인 대응이 나오도록 유도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진법에 영향을 받도록 물고 늘어졌다.
그를 위해 벌써 절반이 넘게 죽었지만, 기어이 결실을 맺었다.
생문의 정 반대되는 곳.
사문에 발을 들인 이상 어지간해서는 빠져나가지 못한다.
이는 종남파 장로들 역시 매한가지다.
“원한이라면 우리가 더 깊다!”
벌써부터 흔들림이 보이기 시작한 종남파 장로들의 숨통을 끊기 위해, 장일선은 배 속에 담겨있는 독을 향해 내공을 집중시켰다.
내공을 빠르게 운영하며 흘러나온 독기를 온몸으로 퍼트렸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당장에라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지만, 필사의 의지로 참아내며 종남파 장로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시건방지다!”
구석에 몰린 쥐새끼들의 반항이 불쾌한지 종남파 장로들은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장일선은 기꺼이 그 검격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저들은 자신을 단번에 죽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하도록 유도했다.
서걱!
검을 쥐고 앞으로 뻗어내던 손목이 날아갔다.
후끈한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생각보다 약했다.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간 독이 고통을 느끼는 신경을 다 태워버리기라도 한 듯했다.
어쩌면 사천당가에서 일부러 이런 독을 골라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고통으로 몸이 경직되는 일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검을 쥐고 있던 손은 잘렸지만 그대로 팔을 뻗었다.
제대로 된 주먹질도 못되었다.
뺨을 후려치지도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런 버러지가… 뭐, 뭐야…… 으아아아악!!”
사천당가 특제 맹독이 담긴 핏물이 종남파 장로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피부를 중독시키고, 내부를 오염시켰다.
과연 사천당가!
장일선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종남파 장로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그런 장일선의 접근을 막기 위해 종남파 장로는 검을 휘둘렀지만, 장일선은 기꺼이 가슴을 내밀었다.
장일선의 생각을 알아차린 종남파 장로가 황급히 검로를 바꿨지만 이미 늦었다.
촤아아아아악!
몸을 긋고 지나간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으아아아아아악!!”
피를 뒤집어쓴 종남파 장로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다른 장로들도 같은 상황이었다.
고통스럽게 죽이겠다면 팔다리를 베어냈다가 피를 뒤집어쓰고 중독되었다.
바닥에 쓰러진 장일선은 죽어가면서도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복수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장일선에게 안식을 주었다.
“아들아…….”
곧 만나게 될 아들이 보고 싶었다.
사무치도록.
천천히 눈을 감던 장일선이 돌연 웃음을 지었다.
진법이 만들어낸 환영이 가장 원하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한 것처럼.
***
선택권을 주었음에도 종남파 속가제자들은 끝내 사문(死門)으로 향했다.
시신을 수습하면서 제갈신무는 종남파 속가제자들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만족했는가.”
적어도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죽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제갈신무는 그들의 업적을 고작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자네들의 역할은 큰 결과로 이어질 걸세.”
명주잠자리의 유충은 모래 구덩이(개미지옥)를 파고 함정을 만들어 영역 안으로 들어온 개미를 잡아먹는다.
제갈신무가 계획한 구상 역시도 같았다.
“어디 멸천회라는 놈들이 화산파와 종남파를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확인해볼 생각이라네.”
진법을 펼쳐놓고.
함정을 파고.
독을 깔아놓을 것이다.
그리고 천하에 선언할 것이다.
천리를 어긴 자들에게 사문을 팔아먹은 악적들을 징치했노라고!
이대로 천벌을 내려 굶겨 죽일 것이라고!
소문을 퍼트려놓으면 알아서 적들이 찾아와 들이받을 터.
“물론 그 전에 어느 정도 청소는 해놔야겠지.”
안팎으로 동시에 공격이 일어나면 성가셔진다.
“오래 걸리진 않을 터이니, 남은 잔재들이 불태워지는 것은 보고들 가시게.”
제갈신무는 백우선(白羽扇)을 들어 화산 정상을 겨눴다.
그 선두에는 자허진인의 검을 쥐고 산에 오를 준비를 마친 백무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