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9
38화 괜찮아요. 다 잘될 거예요.
화성촌을 습격한 자들을 모두 잡아들인 우리는 불한당들과 진한 면담의 시간을 가졌다.
그 과정은 구 할 이상이 비명 소리와 죽여 달라는 애원이었다.
예를 들면 자진하겠다고 내공을 쓸까 봐 단전을 뭉개 놓는다거나, 되지도 않는 혀를 깨무는 자진 방법을 쓰려고 해서 이빨을 모두 뽑아 버리거나.
뭔가 돌아보니 무지막지하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느낌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저쪽은 지 꼴리는 대로 사고 치다 자살하려 하는데, 우리는 그걸 막으면서 정보를 뽑아내야 한다고.
아무튼, 쓸데없는 짓을 못 하도록 차단한 뒤 협조를 구한(?) 끝에 뽑아낸 이야기를 정리하자니 무척이나 허탈했다. 영양가가 없다고 해야겠다.
“누군가 독을 써서 중독시켰고, 화산파 주변 마을을 박살 내고 다니지 않으면 해약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할 것 같진 않으니 사실이겠죠?”
“그렇겠지. 그 누군가가 어떤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그게 문제네요.”
결국, 이놈들은 누군가에게 이용당한 소모품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놈들 사이에도 이름이 있는 녀석이 있었다.
적혈랑이라던가?
내가 박살 낸 놈의 별호다. 그런 놈을 대수롭지 않게 때려잡은 것에 정만족은 제법 놀란 눈치였다.
무림에서 별호를 얻어냈다는 것은 나름 실력이 있다는 의미다. 적어도 평범한 후기지수 수준에서는 상대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렇게 놀라는 게 더 웃기는 일이었지만.
내게 무공을 가르치는 분들이 장삼풍 사부에 달마 사부 그리고 천마 사부다. 그런 몸이 저 정도에게 고전했다고 하면 당장 접싯물에 코 박고 죽어야 한다.
“어쨌거나 화산 주변을 들쑤시고 다니는 놈들의 꼬리를 잡는 일은 요원해졌네요.”
“쓸모없는 새끼들. 얌전히 협조한다고 해약을 준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그래도 접촉한 놈은 있었을 테니 그놈 흔적을 찾아 뒤라도 밟아 봐야 하는 거 아냐?”
“네놈다운 사악한 생각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럼 역시 사파나 마교 짓이려나?”
정확한 정보가 없으니 막연한 추측만 남았다.
“남은 문제는 이건데.”
적혈랑과 부딪쳤던 곳에는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쓸 법한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
살아 있는 화성촌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있었다.
어차피 도망치다가 화산파 추격조에 뒤를 잡혀 죽임을 당하느니 마을 사람들을 인질로 협상을 하려고 했다던가.
“점혈에 대해서 좀 아냐?”
문제는 적혈랑, 이 돌돌 말아다 박박 갈아도 시원치 않을 놈이 마을 사람들을 점혈 수법으로 제압해 버렸다는 거지.
사람 몸뚱이가 박살 나는 살풍경한 소리와 비명이 만연한 와중에도 도와달라거나 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이유가 이거였다.
“그런 건 모르겠고, 저기 쓸모없어진 것들 목 써는 거라면 내가 해줄 수 있는데?”
“굳이 니가 손쓰지 않아도 조금 있으면 다 뒈질 것 같다만.”
“쳇.”
굳이 백무호가 직접 목을 썰지 않아도 상태들을 보면 조만간 이승에 작별을 고할 것 같다.
실제로 이미 뒈진 놈도 있었다.
다들 살려‘만’ 놓고 끌고 온 데다, 면담 과정에서 조금 거친 일이 있었다 보니.
“따지고 보면 네가 제일 나빠. 적혈랑인가 하는 새끼는 사지 멀쩡하게 살려뒀어야지.”
“…….”
하필 그 뒈진 놈이 적혈랑인가 하는 강아지였던 거다.
우리가 묻는 말을 듣고 사파와 마교 놈들에 대해서 고래고래 목이 터져라 저주를 퍼붓더니 꼴까닥 가 버렸다.
덕분에 그놈이 마을 사람들에게 한 점혈 수법은 알아내지 못했다.
점혈이란 것은 말 그대로 혈을 점거하고 잠그는 수법이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혈도에 자물쇠를 걸어 놓는 거라고 보면 된다.
당연히 자물쇠를 열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열쇠가 필요하다.
그게 아니면 열쇠가 없더라도 자물쇠를 열 수 있는 기술이 있든가.
애석하게도 나나 백무호는 그런 쪽으로는 지식이 없다.
정만족에게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화산파에서 가르치는 점혈 수법이라면 배운 적이 있지만, 이런 거라면 난 손 못 댄다.”
혈자리라는 건 대개 몸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지인 경우가 많다.
급소라는 거다.
거기를 우악스럽게 다루면 어떻게 된다?
병신 하나 만드는 거다.
위험한 급소에 아무렇게나 못질하는데 멀쩡하길 기대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사부님들이라도 계시는 상황이면 뭔가 여쭤볼 수라도 있을 것 같은데, 다들 뭔가 바쁘신 모양이다.
사부님들도 다들 신선으로서는 미관말직이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관리로 일하실 때 말단 서리들이 갈려 나가는 것을 직접 목도했었으니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의 점혈을 푸는 것은 다른 곳에서 도움을 받아야 할 판이다.
정만족 역시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함부로 손대서 위험한 상황을 만드느니, 어른들을 모셔 오는 게 낫다.”
“그럼 얼른 화산파로 달려가 보셔야겠네요.”
“그렇겠지.”
그런데 고개를 끄덕이는 정만족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왜 그런 표정인지는 다음 이어진 백무호의 말을 듣고 알 수 있었다.
“이야! 화산파까지면 탈진할 만큼 죽어라 달려도 반나절은 걸릴 텐데, 고생하시겠어요.”
화성촌은 화산파 지척이라곤 해도 외곽에 있는 곳이다.
천하제일 험산이라는 화산 꼭대기까지 전력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반나절도 후하게 준 것이다.
당연히 그 반나절이라는 기준은 정만족이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 달려야 가능할 정도의 시간이겠지.
백무호는 그래도 정만족이 반나절 안에 돌아올 거라고 못을 박고 있는 거고.
“족 같네?”
“……난 니가 싫다.”
스리슬쩍 이름 끝과 엮어서 말하는 백무호의 말에 정만족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하여간, 백무호 놈 인성도 참.
지금부터 고생해야 할 사람에게 저게 무슨 짓인지, 원.
“도와드릴까요?”
“됐다. 나 대신 너희가 가겠다는 소릴랑 집어치워라. 저놈을 화산파로 들여보내느니 내가 고생하고 말지. 너흰 마을 사람들이나 잘 지키고 있어.”
살신성인의 표본 같은 말을 하는 정만족이다.
역시 입은 좀 거칠어도 좋은 사람이 맞다.
그런데 내가 도와준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그냥 저는 동기 부여나 좀 해 드리려는 거라서요.”
“동기 부여?”
“제가 익힌 잡기 중에 태양 위치로 시간을 재는 방법이 있거든요.”
“…….”
반나절. 확실하게 재 드리겠습니다.
이것만큼 확실한 동기 부여가 또 어디 있겠어.
내 말에 정만족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정정하지. 난 니들이 싫다, 빌어먹을 놈들.”
한 번 태양의 위치를 흘낏 바라보며 확인한 정만족이 욕지거리와 함께 저 멀리로 튕기듯 뛰어올랐다.
“휘유! 빠르네.”
빠르긴 빨랐다.
저게 화산의 본산제자들이 배운다는 경공인 암향표(暗香飄)인 것 같다. 저 정도면 반나절보다 더 빨리 도착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동기 부여만큼은 확실하게 장착시켜 놨으니까.
***
정만족이 화산파로 출발하고 얼마 안 있어 제압해 두었던 덩어리들이 하나씩 명부(冥府)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한 짓을 생각하면 동정할 값어치가 없는 것들이지만, 독에 중독되어 이용당했던 처지를 생각하면 이해할 구석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적당히 묻어 줄 자리나 구해 주자 생각하고 시신들을 수습하는데 그 와중에 점혈 당한 채 누워있는 마을 사람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아…….”
눈을 깜빡거리는 마을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는 혼란과 분노가 가득했다.
평화롭던 생활이 무참히 짓밟혔다. 그 분노는 결국 원흉인 무림인들에게 향할 수밖에 없다.
무림인들.
내가 저지른 짓은 아니지만, 저들이 원망을 토해내는 무림인들이라는 표현 속에는 이제 나도 들어가 있다.
사부님들과의 인연과 내가 세운 목표를 생각하면 어차피 나는 평생 무림에서 살아가야 한다.
나는 옮기던 시신들을 적당히 처리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제가 이전에 괴로움을 벗어 던지고 마음을 편안히 하는 법에 대해 들은 게 있는데, 그를 이야기해 봐도 될까요?”
대답은 없었다.
그렇겠지. 대화라도 가능한 상태였다면 지금보다는 덜 힘들어했을 테니.
그런데 이게 잘 먹힐지 모르겠다.
반야심경.
예전에 이 경전의 내용을 듣고 마음에 작은 위안을 얻은 적이 있다.
“좀 더 힘을 빼고 마음을 편하게 하면 된다네요. 고통도, 괴로움도, 그저 모두 지나갈 뿐인 것들이라서. 별거 아니죠?”
화낸다.
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저러다 누군가 한 명 정도는 벌떡 일어나서 내 뺨을 후려칠 것 같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여기까지만 들으면 나 같아도 화를 낼 것이다.
“세상은 끝없이 변한다고 하니까요. 괴롭다가도 기쁜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슬프다가도 행복한 일이 있을 수 있다네요. 이렇게 안 좋은 일을 당할 때도 있겠죠.”
여전히 화내고 있다.
괜히 시작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미 시작해 버렸다.
그렇다면 끝을 봐야지.
“맞아요. 세상은 참 지랄맞아요.”
오! 그래도 이번 말에는 좀 동의하는 사람이 보였다.
“세상은 워낙 지랄맞아서 행복할 수만은 없어요.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요. 행복한 일들만 있으면 참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살다 보면 지금 같은 괴로운 일도 일어나요.”
지금 같은.
그 말로 나는 그들과 공감했다.
조금씩, 조금씩.
눈을 깜빡이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간다.
그러니까 이 말이 닿았으면 좋겠다.
“괜찮아요. 다 잘될 거예요.”
무책임하게 느껴질 정도로 희망적인 말.
내 목소리가 이 안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뚝. 뚝.
그리고 누군가 울었다.
점혈 당한 몸이라 소리조차 낼 수 없지만, 깜빡거릴 수 있는 눈만으로 울었다.
내 말이 닿았다.
“괜찮아요. 다 잘될 거예요.”
이 사람들은 누군가 그렇게 말해 주길 바라고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괜찮아요. 다 잘될 거예요.”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 말을 들려주었다.
***
“뭐냐, 그 어울리지 않는 말들은?”
마을 사람들이 누워있는 창고에서 나오는 중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무호가 슬쩍 다가왔다.
“반야심경 내용을 좀 각색해 봤는데, 이상했어?”
“꽤 좋았어. 잠깐이지만 머리를 빡빡 밀어 버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 비유하고는.
아무튼, 이걸로 마을 사람들도 좀 진정이 되었으니 느긋하게 점혈을 풀어 줄 화산파 고수들만 기다리면…….
“……응?”
내가 했던 말처럼,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생각하는 와중에 수상한 울림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무겁고 육중한 다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나는 즉시 등 뒤의 커다란 창고 위로 몸을 날렸다.
날렵하게 커다란 창고의 지붕을 향해 올라간 내 눈에 먼 곳에서 먼지구름이 이는 게 보였다.
호의적이지 않은 접근이 느껴진다.
“쉽게 가는 일이 없구만.”
저건 적이다.
***
화성촌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생각보다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집 하나를 통째로 태워 버릴 정도의 연기였으니 높은 곳에서 시야를 넓게 가지고 있을 사람이라면 멀리서도 희미하게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런 연기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어이가 없군. 처음부터 소모품으로 쓰다 버릴 것들이었으니 큰 기대도 안 했다만, 고작 마을 하나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할 놈들이었나.”
화성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한 목소리.
험상궂게 보일 만큼 표정을 잔뜩 일그러트린 이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퍽!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보이는 예쁘장한 수석 하나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허공을 격해 사물을 부순다.
장법 중에서도 상승 무공으로 분류되는 격공장이다.
그런 것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발휘하는 인물.
“숭산의 일에서부터 뭔가 하나씩 어긋나고 있는 느낌이다.”
외견과 달리 눈동자 속에 사나운 불덩이를 담은 그가 앞을 노려보았다.
“어떤 놈이냐!”
화산의 정상, 화산파의 한 귀퉁이에서 불을 삼킨 맹수가 뜨거운 숨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