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84
83화 대수림
흑목림에 도착하기까지 이틀이 걸렸다.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당사연 소저가 무척이나 향학심(?)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간은 짜게 먹는 편? 아니면 담백한 쪽이 좋아요?”
“어떤 색을 좋아해요?”
거침없이 내 취향에 관해 탐구했다.
오죽하면 옆에서 지켜보던 백무호가 혀를 찰 정도였다.
“너네 지금 선보냐?”
“…….”
즉각 부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묘할 정도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이걸?
‘공략……당하는 느낌이랄까?’
‘공략당하다’라는 언어적 표현을 떠올리고 나니 더욱 기분이 복잡해졌다.
“보통 그런 건 남자가 하는 거 아냐? 너희 둘 뭔가 위치가 바뀌지 않았어?”
“……닥쳐.”
안 그래도 느끼는 중이다.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조만간 공주님 안기라도 당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하면 충분히 표현될 것 같다.
백무호의 빈정거림에 당사연 소저가 눈을 반짝였다.
“몸만 오면 돼요.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언젠가 제게 남자다움이란 게 실종되는 날이 오면 고려해 보도록 하죠.”
잠깐이지만 당사연 소저의 두 팔에 들려 신방에 들어가는 장면이 떠올라 고개를 휘휘 저어야 했다.
[얼굴 예쁘고, 몸매 좋고, 가문 빵빵한 여자애가 몸만 오라는 거구만. 부럽다, 망할 놈아.]“…….”
머갈통 따는 일이 기각당한 탓인지 삐져 계신 우리 화타 선생님이 긁어대셨다.
편작 선생 말을 들어보면 딱히 틀린 처방도 아니라고 했다. 같은 이유로 위왕에게 죽었던 오명을 씻을 기회가 날아간 꼴이니 이해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왜 흑목림이라 부르는지 알겠네.”
검은 나무 숲(黑木林)이라기에 검은 나무들이 잔뜩 자라는 곳인가 했더니, 나무들이 너무 울창해서 햇살이 잘 들어오지 않아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시간임에도 뭔가 음산한 음영이 짙게 깔려 있었다.
“울창하네.”
[독사와 독거미와 독지네 그리고 모기떼를 비롯한 온갖 해충들을 피부로 경험해 볼 수 있는 야생의 땅이지.]“…….”
갑자기 들어가기 싫어진다. 문명이란 것을 누리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지금 내 기분을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물론 잠깐 산속에서 살아보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오지는 아니었다.
특히 독거미나 독지네 같은 해충이 우글거리는 곳은 더더욱 아니었고!
“흑목림이라더니 대수림을 말하는 거였네요?”
당사연 소저는 여기에 대해 좀 알고 있는 눈치다.
‘당연하려나?’
이곳은 사천당가에서 이틀 거리다. 독물이나 약재가 넘쳐날 것 같은 이런 곳을 사천당가에서 내버려뒀을 리 없다.
“옛날 가르침을 바탕으로 배워서. 요즘은 그렇게 부르나 보죠?”
“몇백 년은 그렇게 부르긴 했지만……. 뭐, 요즘이라면 요즘이라 할 수 있겠네요. 정말 화타의 진전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럴 수 있겠네요.”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 성격이라면 말꼬리 잡고 늘어질 부분일 것 같지만 당사연 소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역시나 호탕한 성격이다.
“어떤 걸 찾으면 되죠?”
편작 선생이 하는 말을 그대로 언급하자, 당사연 소저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뭘 설명하는 것인지 알아차린 것 같다.
“으음! 무얼 말하는지는 알겠네요. 그게 약재로도 쓰이는 것이었군요.”
게다가 위치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채취를 서두르려면 흩어져야겠네요. 자생지들이 제각각이거든요.”
“그래야겠죠.”
한 시가 시급한 상황이니만큼 서두를 필요가 있다.
당사연 소저야 전문가로 보이고, 나 역시 편작 선생이나 화타 선생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 문제가 없지만, 역시 완벽한 초보인 백무호가 문제다.
“괜찮아. 완벽하게 이해했어.”
“진짜?”
“이끼, 버섯, 목피 챙기면 된다는 거잖아?”
일단 보이는 대로 챙기면 되는 거 아니냐는 소리다.
‘산에서 독버섯 먹고 죽는 사람들이 보통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래도 백무호가 가져온 물건은 꼼꼼하게 살펴봐야 할 것 같다.
***
내가 맡기로 한 약재는 버섯이었다. 아무래도 이끼나 목피보다는 구분하기 어려운 쪽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무호에게 버섯 채취를 맡길 용기가 없었다고 해야겠다.
나라고 약재들에 대해 해박한 것은 아니지만, 내 경우는 실시간으로 확인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니까.
“진짜 뭐라도 나올 것 같은 곳이네.”
흑목림. 요즘은 대수림이라 불린다는 이곳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 자체였다.
나무와 수풀 그리고 덩굴들이 어지럽게 난무해 있어 한 발, 한 발 움직일 때마다 걸리는 것이 있을 정도다.
“이해는 가네요.”
편작 선생의 언급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곳. 수풀이 우거진 저 어둠에서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곳처럼 느껴졌다.
“그 옛 신이라는 분 취향은 좀 별로인 것 같긴 합니다만.”
다만, 내 오감에 걸린 건 무척이나 껄끄러운 것들이다.
부우우우웅!
웨에에에엥!
예를 들어 이런 모기떼라든가.
버섯의 자생지로 추측되는 자리 부근으로 다가가자 끔찍한 소리와 함께 일어난 것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명계에 와서 참 다행이라 생각한 건, 여긴 규환지옥 같은 곳이 아니면 저 엿 같은 모기들이 없단 점이지. 이 망할 소리는 오랜만에 들어도 전혀 반갑지가 않구만.]“저만 하겠습니까.”
옅은 안개처럼 보일 만큼 들끓는 모기떼가 덮쳐오는 광경은 굳이 시야에 담고 싶지 않았다.
사람의 상상력은 무한하다고 하지만, 이런 걸 상상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심각한 정신력 낭비인 동시에 정신 건강에 해로우니 부디 삼가라고 조언할 자신이 있다.
문제는 저 모기떼는 현실이며, 간만에 만찬과의 만남으로 미쳐 날뛰고 있다는 점이다.
모기떼에 맞선 내 손은 어느덧 어느 방향으로도 뻗어낼 수 있게 팽팽하면서도 느슨한 감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강수.
상리에 맞지 않는,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괴리감을 어루만지는 듯한 무공.
장삼풍 사부가 작정하고 만들어낸 이 무공은 그야말로 상식 밖이다.
내 감각에 잡히는 모든 것을 누르는 무공이라니.
‘정해진 형(形)이 없이, 오로지 의(意)만 있다.’
흐르는 물처럼, 감각이라는 흐름에 몸을 싣는다. 그렇게 흐르는 물은 자연스럽게 틈새를 찾아 흘러간다.
어쩌면 감각도의 극의라 할 수 있는 무공이다.
허나.
파파팟!
파락!
“어렵네.”
아는 것과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해 내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감각에 모든 정신과 생각을 싣는 순간 이성이 흐려진다. 그렇게 이성을 놓아버린 사람은 단순한 짐승이다.
의식의 통제하에 감각과 무의식을 제어하는 것. 그것이 무공이다.
영강수는 분명 최고의 무공이다.
하지만 그를 통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웨엥!
덮쳐오는 모기떼를 때려잡는 사이 몸 안쪽으로 파고드는 몇몇 모기의 존재가 느껴졌다.
작은 안개처럼 보일 만큼 무지막지한 숫자의 모기떼 중 몇 마리가 안으로 파고든 것일 뿐이지만, 이게 만약 누군가가 펼친 무공이었다면?
‘당한 거지.’
영강수의 방위가 뚫렸다고 봐야 한다.
완전하게 감각에 몸을 실었다면 허락하지 않았을 결과다.
“칫!”
치밀어오는 짜증에 신경질적으로 일으킨 기운이 손끝에 어리자 파괴적인 힘이 내가 그리는 변화의 끝자락에 어린다.
콰가가가각!
모기떼를 단숨에 집어삼키고 퍼져나간 힘이 그 흔적을 남긴다.
그래도 나름 볼만한 광경이었는지 화타 선생과 편작 선생의 탄성이 나왔다.
[망할 벌레들을 시원하게 쓸어버리니 좋구만.]그냥 짜증 나는 모기떼를 짓뭉갠 것이 마음에 드신 것 같기도 하다.
반면, 역시나 장삼풍 사부님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제대로 다루려면 시간 좀 걸리겠구나.]“예.”
달마 사부의 극강격과 마찬가지로 영강수 또한 숙련되려면 적지 않은 수련이 필요하다.
덜 여문 지금도 굉장한 위력을 발하지만, 아무래도 무공 전수자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기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결국, 수련과 실전을 통해 완성해 나갈 수밖에 없다.
[뭔가 멋진 깨달음을 얻는 중에 끼어들어서 미안하다만, 방금 네가 펼친 무공에 박살 난 게 뭐였는지도 좀 확인해 보는 게 어떨까?]“예?”
[저기 잘게 부서져서 뿌려져 있는 파편 중에 뭔가 버섯같이 생긴 거 안 보이니? 내 눈엔 잘 보이는 것 같은데.]아무래도 기분이 안 좋으신 화타 선생의 푸념이라 치부하기엔 무시할 수 없는 지적이다.
“진짜네.”
그게 사실이기까지 하면 더더욱.
만독신군을 치료할 때 쓰일 약재의 특징이라며 귀에 박히도록 들은 버섯의 잔해가 주변에 뿌려져 있었다.
[다른 자생지까지 가려면 좀 더 깊은 곳으로 가봐야 할 거다.] [시간이 오래 지나긴 했지만, 특징적인 부분들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걸세.]정말정말정말정말 달갑지 않지만, 이 벌레와 독물들이 우글거리는 숲을 좀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할 상황인 것 같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응?”
숲에서 술렁임이 느껴졌다.
오랜 세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공간에서 인위적인 흐름이 느껴진다.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다. 그것도 그냥 인기척 정도가 아니다.
“이런 오지에서 말이지.”
사천당가의 배신자가 추적해 온 것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 경우라면 전해져 오는 감각이 이것과는 달랐을 거다.
이건 격돌 중에 나오는 소리다.
게다가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오랜 세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오지에 들어온 사람들이 치고받으며 이곳으로 다가오는 중이라니.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공교로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왔다.”
눈사태라도 일어난 듯, 대수림 전체를 진동시키는 힘이 거세게 몰아쳤을 때.
콰지지지직!
눈앞에서 숲이 찢어졌다.
조금 전까지 햇빛마저도 거부하는 짙은 울창함이 갈가리 찢겨졌다.
태풍처럼 몰아치는 검은 기운.
그런 검은 기운과 부딪치며 물러나는 붉은 기운.
숲의 일각이 붕괴되는 사이로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기척들이 튀어나왔다.
“여자아이?”
격돌을 피해 내가 있는 쪽으로 물러나고 있는 것은 선이 가는 체구의 여자아이였다.
게다가 그 소녀를 공격하는 것은 마인으로 보였다.
힘을 뻗어낼 때마다 요동치는 검고 어두운 마기가 그 증거였다.
“멈춰!”
바로 눈앞에서 마교의 마인이 어린 소녀를 뭉개려 한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성격이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저 마인이 소녀를 뭉개 버린 다음에 날 내버려둘 것 같지도 않고.
땅의 신력과 쇠의 신력까지 끌어올린 나는 위태로워 보이는 소녀의 앞으로 끼어들며 장삼풍 사부의 영강수를 펼쳤다.
그 순간!
‘……어?’
영강수를 펼치는 손끝으로 예상치 못한 힘이 스며들며 몸을 타고 흘렀다.
그것은 마치 불꽃처럼 뜨거운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