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21
제121화 – 대책이 없으니까요.
용왕은 나를 시험했다.
그를 쫓아가기 위해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야 했다. 칼리에서의 비무에서 나를 거세게 몰아붙임으로써 내 무력의 총합을 확인한 용왕은 동일한 방식으로 경공의 한계도 알아냈다. 그의 속셈이 빤히 보였지만 나로서는 응할 수밖에 없었다. 비무를 청한 이도 나였고 최대한 빨리 중원으로 가자고 요구한 이도 나였기 때문이었다.
용왕은 약을 올리듯 가는 내내 말을 걸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대꾸할 여력이 없었지만 오기가 생긴 나는 악착같이 그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화제는 당연히 용왕이 주도했는데 주로 아르에 관한 것이었다. 노골적으로 종용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집요하게 우리 관계의 진정한 회복을 바라는 언사를 내뱉었다. 매번 단칼에 끊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의 공세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만족스럽진 않았겠지만 더 물고 늘어지다간 부작용이 생길 것을 우려했는지 용왕도 한발 물러섰다.
신기한 게 말이 씨가 된다고 그때부터 아르와는 절대로 짝이 될 수 없을 거라 단정했던 내 마음에 극미하나마 변화의 가능성이 움텄다. 못내 찜찜했지만 달가운 구석도 아주 없지는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우리는 용궁을 출발한 지 다섯 시진 만에 남방과 중원의 경계인 자하(紫河)에 이르렀다. 원래도 검붉은색을 띤 강물이 때마침 지는 노을을 받아 거대한 핏물처럼 보였다.
자하를 건넌 우리는 이백 리쯤 더 나아간 후 도경이라는 소읍(小邑)에 들렀다. 용왕에게는 흑문의 첩인을 찾아 중원 소식을 알아본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은 용왕을 쫓느라 탈진한 내 육신에 조금이라도 휴식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첩인을 찾기도 전에 나는 강행군을 재개해야 했다. 첩인을 찾는 시늉을 하며 내려갔던 객잔 지붕에서 뜻밖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객잔의 손님들은 다들 근래 발생한 마원의 내란을 술안주 삼아 떠들고 있었다.
객잔에 들어가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려다 나는 생각을 바꿔 바로 마원으로 향하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서 들을 수 있는 건 소문 수준에 불과할 터였다. 대처의 첩인이라고 해도 마원의 사태에 관해선 풍문 정도의 정보만 쥐고 있을 게 뻔했다. 이리저리 돌며 시간을 낭비하느니 곧장 현장으로 가는 게 나았다.
***
사천 리가 넘는 장도였음에도 도경에서 마원의 남동쪽 경계인 태화강에 이르는 데는 네 시진가량밖에 걸리지 않았다. 현재의 나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세울 수 없는 기록이었다.
이러한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내가 용왕의 팔에 안겨 그의 비행에 편승한 덕분이었다. 그에게 신세를 지기는 싫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내 취향을 고집할 계제가 아니었다.
용왕은 그야말로 전속력으로 날았다. 내가 재촉해서가 아니라 아르가 마인들끼리의 전쟁이 발발한 마원에 들어있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아르는 강자였지만 마원엔 그녀를 능가하는 무력을 지닌 마인들이 여럿이었다. 이를 알기에 용왕은 똥줄이 탔을 터였다. 얼마나 초조했으면 아르의 신변에 이상이 있을 시엔 그녀를 사지에 몰아넣은 나를 용서치 않겠노라는 협박까지 일삼았다.
용왕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양 관주가 걱정이 되어 속이 타들어 갔다. 그녀가 전란에 휩쓸려 횡액을 당했다면 저승에 가서도 볼 면목이 없을 터였다.
다급한 와중에도 나는 새삼스레 용왕의 무한공력에 감탄했다.
용궁에서부터 치면 족히 일만 리는 날아왔을 터임에도 그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더 빨라지는 느낌이었다.
태화강을 건넌 후 칠백사십 리에 걸쳐 뻗은 오륜산맥을 길잡이 삼아 올라간 우리는 북쪽 끝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갔다. 멀리 하동의 불빛이 보였다. 불야성까지는 아니었지만 새벽임에도 꽤 밝았다. 나는 이것이 바람직한 징조이기를 바랐다.
하동에 근접하면서 나는 도시에서 일렁이는 소음의 크기로 평소보다 훨씬 많은 인구가 들어있음을 감지했다. 일순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구석이 있었다. 긴장감은 팽배하되 전란의 살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용왕이 내가 가리킨 지점으로 쏜살같이 하강했다. 그의 팔에서 풀려나며 나는 착지하기도 전에 소리를 질렀다.
“나는 마선이오. 현마는 어디 있소?”
현마에게서 수장 자리를 물려받은 털보 고춘이 벼락같이 삼 층 전각에서 튀어나왔다. 그에 뒤질세라 득달같이 달려 나온 이들의 면면을 본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검마, 장마, 독마, 그리고 기마.
그들에 고춘을 더하면 도마와 요마를 제외한 칠마류의 수장들이 모인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내란이 발생한 게 아니었던가.
고춘을 포함한 오마(五魔)가 분분히 자세를 낮추며 내게 예를 차렸다.
“어서 오십시오, 마종.”
“마종을 뵙소.”
내가 답례하기도 전에 용왕이 천둥 같은 고함을 질렀다.
“내 딸아이는 어디 있느냐?”
다들 용왕을 처음 볼 터이지만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바깥세상에 담을 쌓고 살아왔지만 개세팔천의 일인이자 천하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인간으로 유명한 용왕을 모를 수가 없었다.
용왕이 발산하는 가공스러운 기운에 움츠러든 오마를 구원한 것은 낯익은 목소리였다.
“아버지!”
육중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음성이 날아온 방향으로 전광석화처럼 쏘아져 간 용왕이 막 전각을 빠져나온 아르를 껴안았다.
“아이고, 혹시라도 네게 탈이 났을까 봐서 오는 내내 간을 졸였다, 얘야. 그런데 왜 이리도 말랐느냐? 설마 여태껏 식음을 전폐하고…….”
“아이참, 어서 풀어줘요. 숨 막혀 죽겠어요.”
“그래, 그래.”
딸에게는 양순한 강아지가 되는 용왕이 얼른 아르를 놓아주고는 요란스럽게 콧김을 뿜어냈다.
아르와 시선을 마주친 나는 양 관주의 안위부터 확인했다.
“양 관주는?”
“그녀는 안에 있어요.”
가슴을 쓸어내린 나는 고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다 무슨 난리요? 왜들 여기에 모인 거요?”
고춘에게 물었는데 답은 사마의 입에서 나왔다. 중구난방이었으나 나는 어렵지 않게 사태의 핵심을 파악했다. 한마디로 도마와 요마가 반역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갑자기 왜?”
내 질문에 두서없이 떠들던 사마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고춘도 내 눈치를 봤다.
그들의 뒤편에서 아르가 아리송한 해답을 주었다.
“그녀를 보는 게 어떨까요? 모든 게 그녀에게서 비롯되었으니까.”
도무지 이해난망이었다. ‘그녀’는 양 관주를 의미할 터였다. 그녀가 도마와 요마의 반란을 유발했단 말인가. 대체 무슨 수로?
나는 아르의 권고에 따르기로 했다. 의문을 해소하려면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게 최선이었다.
***
“미안해요. 도움이 되기는커녕 분란만 일으켜서.”
나를 보자마자 양 관주가 사과부터 했다. 이십일 만에 더 수척해졌고 눈 밑이 숯을 칠한 듯 거뭇거뭇했다. 마치 한 쌍의 시커먼 반달 같았다.
“어찌 된 일이오?”
양 관주의 맞은편 의자에 착석하며 물었다.
“전날 하동에 든 직후 내가 오 공자의 이름을 빌어 한 가지 금령(禁令)을 내렸어요. 그랬더니 그들이 반발한 거예요. 마지못해 수용하긴 했으나 밖의 마두들도 불만이 많은 모양이에요. 미안해요. 내 생각이 짧았어요. 하지만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도처에 백주에서 그런 만행이 자행되고 있는데 어떻게 모른체하고 지나갈 수 있겠어요?”
전날 나는 양 관주를 마원으로 보내며 필요할 시엔 나를 내세워 명을 내리고 일을 추진하라고 했다. 그녀는 이를 뜻밖의 방식으로 써먹은 것이었다.
평소와 달리 흥분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양 관주에게 부드러운 눈빛을 발하며 나는 차근차근 풀어나가기로 했다.
“금령이라니? 무엇을 금지했단 말이오?”
“겁간이요.”
일순 멍했지만 나는 대번에 전후 사정의 절반을 추론했다.
요마류의 요녀들은 노예 사내들을 강제로 취해 그들의 정기를 빨아들임으로써 마기를 키웠다.
그런 그들에게 느닷없이 떨어진 겁간 금지령은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을 터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주식을 끊으라는 것과 진배없는 폭압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보통은 다른 마류의 사내들이 거부감을 보였어야 할 명령에 요마들이 반기를 든 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도마류는 왜 그에 가세했을까. 그들도 마땅치는 않았겠지만 그 수위가 요마류를 제외한 다른 마류들보다 높았을 성싶진 않은데.
칠마의 좌장으로 공인받았던 도마가 겁간 금령을 빌미로 내게 각을 세우며 자존심도 세우려던 걸까. 하지만 뭘 믿고? 내가 이전에 현시한 무력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 텐데. 요마와 힘을 합친들 역불급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
옥쇄를 각오하고 저지른 일일까? 그렇다고 보기엔 납득하기 어려웠다. 내가 판단한 도마는 타고난 강골이되 무모한 위인은 아니었다. 자기 목숨만이 아니라 도마류 전체의 운명을 걸었을 때는 불만이나 자존심 이외에 다른 동기가 있었을 터였다.
그게 뭘까.
***
양 관주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경솔한 짓이었어요.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모두 내 불찰이에요. 정말 미안해요.”
나는 거듭 사과하는 양 관주를 달랬다.
“괜찮소. 응당 해야 할 일이었소. 그런데 그런 조치를 최우선적으로 취한 연유를 물어도 되겠소?”
양 관주가 두툼한 입술을 피가 터질 만큼 세게 깨물었다.
“나에겐 개인적인 아픔이 있어요. 어릴 때 짐승들에게서 몹쓸 짓을 당했어요. 그날 내 심혼엔 영원히 아물지 못할 상처가 생겼어요. 지금도 그 짐승들의 낯짝과 신음성이 떠오르면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찢어진 심장에서 피가 철철 흘러요.”
“…….”
“전날 천하를 일통하면 내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주겠다고 했죠? 그날이 오면 내가 무얼 제일 먼저 실행하고 싶었는지 아나요? 여인을 범하는 짐승들에게 그 악행에 걸맞은 벌을 내리는 거였어요.
거세는 너무 약해요. 내가 원하는 처벌은 그 짐승들이 피해자들의 고통을 만분지일이라도 공감하도록 무자비한 고문을 가한 후 만인의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것이었어요. 그런 일이 일정 기간 동안 일관적으로 반복된다면 누가 감히 그 짓을 범하려고 하겠어요? 미친 자들이거나 진짜 짐승들 말고는 아무도 엄두조차 내지 못할 거예요.”
“…….”
“용궁의 공주에게 안겨 이리로 오는 동안 숱하게 여자들이 무차별적으로 유린당하는 참극을 목격했어요. 너무 괴로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를 악물고 보아냈어요. 그러면서 다짐했죠. 당장 오 공자가 내렸다던 불살(不殺)의 금령에 겁간 금지를 추가하겠다고. 그게 내가 이 지옥에 온 이유라고. 하지만…….”
양 관주의 고통을 헤아리며 침묵하던 나는 그녀의 입에서 네 번째 사과가 나오기 전에 막았다.
“잘했소. 진심이오. 내가 진즉 했어야 할 일인데 양 관주에게 떠넘겼구려. 이번 금령은 유효할뿐더러 장차 전 중원으로 확대될 거요. 약속하겠소.”
양 관주가 눈물을 흘렸다. 그러더니 기어이 또 한 번 사과의 언사를 내뱉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앞뒤 가리지 않고 내 사심만 내세웠다가 오 공자에게 큰 폐를 끼쳤어요.”
“그렇지 않소.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소. 차라리 미리 반골들을 솎아낼 수 있어서 다행이오. 이번 사태는 내가 수습할 터이니 아무 걱정 말구려. 요마와 도마는 한주먹 거리도 안 되오.”
내가 주먹을 불끈 지어 보이자 모처럼 양 관주의 야윈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미소는 금세 사라지고 심각한 표정이 돌아왔다.
“그들이 문제였다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나는 말귀를 알아들었다.
“그들에게 뒷배가 있다는 말이오?”
“그래요. 그래서 그토록 노심초사했던 거예요. 대책이 없으니까요.”
양 관주의 말은 엄살이 아니었다. 실로 중차대한 위기였다. 반란군의 배경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불문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