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69
제169화 – 안 그렇소?
“큰일이라니?”
재수 없는 늙은이가 안진 못지않게 큰소리로 물었다. 안진은 늙은이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시선을 나에게 고정시킨 채 내용을 밝혔다.
“그이가, 그러니까 양 공자가 변했어.”
늙은이가 일순 어깨를 늘어뜨렸다. ‘큰일’이라기에 안진이 끔찍한 일이라도 당한 줄 알았다가 ‘별일’이 아님을 알고는 맥이 풀린 모양이었다.
나는 이미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기에 무덤덤했다.
우리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안진이 한껏 코를 찡그렸다.
“이해가 안 돼? 진짜 보통 일이 아냐.”
늙은이는 ‘일’ 자체보다 다른 데 관심을 보였다.
“양 공자가 누구더냐?”
안진은 늙은이의 질문을 묵살하고 나만 상대했다.
“놀라지 마, 선. 양 공자 안에 악귀가 들었어. 악귀한테 몸을 뺏겼다고!”
“안다.”
“뭐?”
“그자는 악귀가 아니라, 뭐 악귀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검룡이라는 놈이다.”
“검룡? 전에 우장평에서 그 뺀질뺀질한 년과 한판 붙기로 했다가 바람맞힌 작자 말이야?”
“그래.”
“그 작자가 어떻게 양 공자의 몸에 들어갔지?”
“서역의 이혼대법인가 하는 사술을 쓴 것 같더라.”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 설마 이미 만나본 거야?”
“그래.”
우리의 문답을 따라잡지 못하던 늙은이가 끼어들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게냐?”
늙은이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은 생각은 코딱지만큼도 없었지만 안진도 그에 관해 아는 바가 극히 적었기에, 그래서 어차피 설명을 해야 했기에 나는 두 사람에게 검룡의 태생부터 나와의 악연까지 한달음에 풀어놓았다.
안진의 차례였다. 하지만 그녀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고서 연신 도리질을 할 뿐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얼마간 기다리다 나는 매듭을 풀기로 했다.
“양천에게 그자가 빙의되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냐? 네가 알아서 눈치챘냐? 아니면 그자가 스스로 본색을 드러낸 거냐?”
“처음부터 좀 이상하긴 했어. 눈빛이 양 공자답지 않게 탁했으니까. 하지만 부상이 심한 탓이려니 여겼지. 정말 감쪽같이 속았지 뭐야. 외양도, 언변도 양 공자였으니까.”
“뭐라고 하더냐?”
“너를 찾아왔대. 하동에 가서 알아보니까 네가 서역으로 갔다며 거기를 알려주더래. 그래서 불원천리 달려왔대. 그러다 고르에 거의 다 와서 괴인들에게 습격을 받았대. 자기 판단으로는 밀궁의 밀사들 같더래. 간신히 뿌리치고 파리나 본부에 이르렀는데 그자들은 도시 안으로는 따라오지 않더라는 거야. 파리나 본부에 있을 너를 두려워해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안도했대. 나쁜 놈, 어쩜 새빨간 거짓말을 그렇게 청산유수처럼 늘어놓다니.”
나는 옆길로 새는 안진에게 주의를 줄까 하다가 자중했다. 그녀가 발끈할 게 빤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흐름이 더 엉망이 될 터였다.
“그런데 파리나의 본부에 와 보니 네가 없다기에 당황했는데 뜻밖에도 내가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나 뭐라나. 괴인들의 습격으로 짐작건대 거기 사람들 중에 간자가 있을 터이니 조용한 데서 따로 보자고 하더라고. 네 얘기도 있고 해서, 양 공자, 아니 그치가 뭔가 수작을 부리려나 싶어 가슴이 콩닥콩닥, 그게 아니라 이게 감히 누굴 넘봐 하는 마음을 갖고 나우가 안내해준 별실에 들었는데, 글쎄 너에 관해서만 꼬치꼬치 캐묻는 거야. 김이 팍 샜지 뭐야.”
“그자가 뭘 알아내려 했는데?”
“두 가지였어. 하나는 선인인 네가 어떻게 마기를 품을 수 있는지, 다른 하나는 무슨 수로 그렇게 단기간에 무력이 급상승했는지. 기분 나쁘더라고. 아르가 잘못 짚었나 싶었지. 나는 그치가 내가 아니라 너한테 관심이 있는 거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그자에게 내 비밀을 토설했냐?”
“미쳤어? 기분도 안 좋은 데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니까 반발심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당사자한테 물어보라고 했지. 그랬더니 나더러 나도 모르는 거 아니냐고 도발하더라. 너에 관해서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안다고 되받아쳤더니 갑자기 애원조로 나오는 거야. 꼭 알고 싶다는 둥, 가르쳐주면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둥 해가면서 말이야. 나중에는 눈물까지 질질 짜더라고. 짠한 마음이 들었지만 간청을 들어주진 않았어. 뭔가 찜찜했거든.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내 감이 딱 맞았어.”
대충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해한 나는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그자가 양천에게 빙의되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냐?”
“아무래도 너에 관해 묻기 시작할 때부터 급격하게 바뀐 태도 하며 눈알까지 희번덕거리는 것이 전에 어울렸던 양 공자하곤 너무 달라서 속을 들여다봤어. 심안(心眼)으로. 그러고는 깜짝 놀랐지 뭐야. 흑백이 태극처럼 맞물려있었거든. 너를 처음 본 날하고 똑같았어. 근데 조화를 이루었던 너하고는 달리 그치 쪽은 악기가 선기를 삼키는 모양새였어. 너무 징그러웠어. 좀 섬뜩하기도 했고.”
안진이 비 맞은 참새처럼 몸을 부르르 떨자 재수 없는 늙은이가 그녀를 다독였다.
우장평 방면을 흘긋 바라본 나는 진도를 나갔다.
“그다음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어. 너, 누구냐고. 그랬더니 히죽 웃는 거야.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고 절뚝거리며 창으로 다가가더니 창문을 열더라. 내뺄 심산인 줄 알고 얼른 잡으러 갔지. 그런데 뭔가 사이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앞이 캄캄해졌어. 그러곤 정신을 잃었지.”
안진은 기절시킨 건 밀왕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묻고 싶지 않은 걸 물었다.
“그자가 너를 어디로 끌고 갔어? 그리고 무슨 짓을 했지?”
안진의 콧잔등에 어김없이 주름이 올라왔다.
“몰라. 익숙하면서도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져서 본능적으로 이건 사부의 파멸천기 같은데 하고 눈을 떠보니 너하고 사부가 보이더라. 어리둥절했지. 깬 직후엔 악몽을 꾼 것 같았는데 무슨 악몽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났어. 그러다 물 마시고 토한 다음에 퍼뜩 그치의 얼굴이 떠오르더라고. 하필이면 마지막에 히죽거리던 모습이. 아무튼 그러니 그치가 나한테 뭔 짓을 했는지는 나도 몰라.”
나는 알 것 같았다.
재수 없는 늙은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어서 살펴보려무나. 어디 탈이 난 데는 없는지.”
안진이 쌍심지를 켰다.
“탈은 무슨 탈. 내가 그치한테 몹쓸 짓이라도 당했을까 봐서.”
“그게 아니라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거짓말하지 마. 잘하지도 못하면서.”
“…….”
흠, 내 누이와 재수 없는 늙은이는 원래 이런 관계였군. 용궁의 부녀가 떠오른 나는 괜히 흐뭇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다 멀쩡하다고. 배는 무지하게 고프지만.”
스무 날이나 굶었을 테니 허기질 만도 했다.
우장평이 계속 신경 쓰였기에 나는 마무리를 지었다.
“고생했다, 진아.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다.”
안진과 재수 없는 늙은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감상에 동의를 표했다.
***
파장 분위기였으나 우장평에 운집한 무인들의 태반은 그대로 들판에 남아있었다.
오지랖 넓은 오성 하가의 명숙 한 명이 이리저리 쏘다니며 열심히 집계한 결과 사망자는 사백 명 전후였고 부상자는 그 열 배에 가까운 삼천여 명에 달했다. 채 반 각도 진행되지 않았던 난전의 여파에 수천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었다. 그들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을 터였다.
죽고 다친 친인들을 수습하느라 들판은 난장판이었다. 하지만 내가 돌아가자 모두들 아우성과 동작을 멈추고 나를 맞이했다. 일시에 고요해진 기변에 놀랐는지 우장평을 둘러싼 숲들에서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나는 나에게 예를 차리느라 앞다투어 허리를 접는 사람들에게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이르고는 무후에게로 갔다. 마비가 풀린 벌판은 다시 북새통이 되었다.
무후는 여전히 운공 중이었다. 용왕이 내게 다가왔다.
“누이는 만났는가?”
“그렇소.”
“왜 안 데리고 왔는가?”
재수 없는 늙은이 때문이었다고 이실직고할 수가 없어 대충 얼버무렸다.
“번잡함을 싫어하오.”
다행히 용왕은 더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이제 어떡할 참인가?”
용왕이 원하는 답은 적들을 추격해 박살 내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십자무련으로 갈 거요.”
실망감을 감추지 않으며 용왕이 물었다.
“나도 말인가?”
“그래 주길 바라오.”
용왕이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나는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다. 과연 엄지로 무후를 가리키며 그가 수군거렸다.
“설마 같은 편이 되었는데 나한테 끝을 보자고 달려들진 않겠지? 저 꼴로 덤벼봤자 상대도 안 될 테지만. 그래도 워낙 독한 여자이니 안심이 안 되는구먼.”
“그녀와 싸울 일은 없을 거요. 내가 보장하겠소.”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굳었던 용왕의 낯짝이 풀어졌다.
***
해가 저물고서야 운공을 마친 무후와 함께 우리는 십자무련으로 향했다. 그녀는 원활한 경신을 펼칠 수 없는 상태였기에 내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극렬 거부할 줄 알았는데 무후는 의외로 순순히 내게 몸을 맡겼다. 체구가 열두어 살 소녀처럼 작은 데다 살이 거의 붙어있지 않아 좀 과장을 보태 깃털처럼 가벼웠다. 태산 같은 위압감을 발산하던 첫 만남 때를 돌이켜보니 느낌이 묘했다.
나와 용왕은 속도를 크게 낮췄다. 우리와 동행한 안진에게 맞추기 위해서였다. 아직 회복이 덜 된 데다 우리에 비하면 굼벵이나 다름없었지만 안진은 재수 없는 늙은이에게 안기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고 제 발로 가겠다고 우겼다.
그녀의 고집을 꺾으려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뜻대로 하도록 허락했다. 그녀를 어르고 달래느라 심력을 소모하기도 싫었거니와 십자무련 행이 화급을 다투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안진이 속도를 주도한 탓에 우리는 다음 날 아침에야 천하제일도 호원에 당도했다. 저자를 지나면 대소동이 벌어질 게 뻔했기에 나는 반강제로 안진을 껴안고는 공중으로 비상했다. 그러고는 곧장 십자무련으로 날아갔다.
***
안진과 재수 없는 늙은이를 건곤장의 처소였던 오죽채에 들인 나는 무후를 그녀의 지하 수련장에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벙어리가 된 양 마지막 순간까지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통로를 빠져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용왕이 마음 편하게 십자무련을 둘러보겠다며 떠났다. 그와 헤어진 나는 고월서각으로 갔다. 문상은 한참 후에야 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족히 한 시진은 지났을 듯싶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언니를 만나고 오느라.”
“그녀는 좀 어떻소? 특별한 외상은 없어 보이던데.”
“다 알면서. 내상이 심각해요. 그러지 않았다면 그 자존심 강한 사람이 오 공자 신세를 졌을 리가 없어요.”
문상의 면사가 앞으로 펄럭이더니 꽤 오래 그 상태를 유지했다. 깊은 한숨을 내쉰 문상이 전에 없이 도리질까지 했다. 면사만 없다면 영락없이 양 관주였다.
“십일월 십일일의 행사는 완전히 물 건너간 셈이에요. 올해 안으로는 힘들 것 같아요. 내년 초로 미루면 어떨까 싶어요.”
어이가 없었다.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않았소? 기어이 평생의 숙원을 풀어야 직성이 풀리겠답디까?”
설령 내가 무후에게 고의로 져주더라도 누가 믿겠는가? 우장평에서 우리의 무위를 목도한 이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다들 제 동네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고수들이었다. 내로라하는 강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내 패배를 납득하지 못할 터였다.
“언니가 아니라 내 뜻이에요.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여하간 이미 약조했으니 지켜주길 바라요.”
“침묵은 곧 동의와 수용을 뜻하잖소? 문상이야 그렇다 쳐도 무후가 헛된 명예에 그리 집착하는 건 적잖이 꼴사납소.”
“언니를 비난하지 말아요. 전부 내 뜻이라고 했잖아요.”
“이제야 실토하는군. 애초에 내게 그 빌어먹을 벌레를 심었을 때부터 무후와 무관하게 나를 부려 먹을 심산이었음을.”
“오해에요. 그날…….”
“변명은 됐소. 그보다 어째서 빙왕이 나타날 가능성에 대해 언질을 주지 않았소? 하마터면 경을 치를 뻔했잖소.”
“나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어요. 보고를 받고서 깜짝 놀랐어요.”
“그래도 이미 전후 사정을 알아냈을 테지. 안 그렇소?”
문상은 묵묵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