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62
제62화 – 배웅은 하지 않겠소.
공주는 유서 깊은 고장이었다.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그 고도(古都)는 고대 왕국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무림 태동 이후에도 당대의 주요 세력이 최우선적으로 차지하려 했던 요처였다. 오래전이긴 하나 공주의 주인이 곧 천하의 패자(霸者)라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요 일백 년간은 좀 과장을 보태 변방으로 취급받았다. 그 이전 이백여 년에 걸친 대(大)혼란기에 일어난 중심축의 이동으로 사통팔달한 요충지로서의 가치가 급락한데다 그 와중에 공주의 지배방파로 자리 잡은 선봉문(扇棒門)이 그다지 강대한 문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칠대 문주였던 양건(梁建)이 선봉문을 해체한 후 자기 친족을 중심으로 세가의 형태로 재편한 이후 오대세가는 고사하고 열두 개로 확장한 세가연대의 말석에도 끼지 못하던 양가가 일약 정파 무림 최고의 가문으로 우뚝 선 결과였다.
그들이 그런 기염을 토할 수 있었던 건 근래 집중적으로 배출한 고수들 덕분이었으나 가장 큰 공은 단연코 양천의 몫이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 희대의 천재는 십 대 초반에 이미 전 중원에 무재를 알렸고 십오 세에 이르러서는 동년배는 물론이고 그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은 선배들 중에서도 적수가 없음을 증명하며 한때 창제가 보유했던 ‘천년제일기재’의 명예를 이양받았다.
파죽지세로 정사 무림의 신성들과 중견들을 연파하며 위명을 떨치던 양천의 기세는 아홉 달 전 초절정의 강호인 황산일마 소영강을 꺾음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입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훗날 개세팔천의 시대가 저물면 천하는 십전제의 치하에 들 거라 떠들어댔다.
하지만 그런 소리는 이제 쏙 들어갔다. 그들을 침묵시킨 이는 다름 아닌 나였다.
***
강행군을 한 덕분에 우리는 서천이 황혼으로 물들어 갈 즈음 목적지에 당도했다.
공주는 전날 노인네와 세상을 주유할 당시 반나절도 머물지 않고 스치듯 지나간 곳이라 별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렇더라도 고색창연한 가옥들이 숲을 이뤘던 풍경이 기억에 남아있었는데 웬걸, 새로 넓힌 대로마다 신축 전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최근의 성세에 힘입어 마구잡이로 지어 올린 태가 역력했다.
십사 년 만에 상전벽해 같은 변화를 이룬 거리를 지나노라니 떨떠름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자아내게 했던 깊고 그윽한 맛은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고상한 노파에게 천박한 화장을 입혀 억지로 젊어 보이게 만들려 한 느낌이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나 나는 천년고도를 망친 양가의 처사가 못마땅했다. 그런 심사가 얼굴에 드러난 듯 안진이 검지로 옆구리를 푹 찔렀다.
“왜 죽상이야? 똥 마려워?”
“갑자기 웬 똥 얘기요?”
“방금 전에 방귀 뀌었잖아.”
“…….”
“측간 찾아줄까? 넌 코가 막혔잖아.”
“됐소.”
안진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양씨 일족이 모여 산다는 서동(西洞)으로 향하고 있는데 신경 쓰이는 미음이 잡혔다. 누군가 내 별호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다음엔 황급히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지 않아도 양가에서 언제 내 도래를 알아차릴까 궁금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눈썰미가 좋은 자가 우연히 나를 발견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양가에서 미리 내 방문에 대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어느 지점부터 공기가 바뀌었다.
북적거리던 인파가 듬성듬성해지더니 종내는 다 사라지고 휑뎅그렁한 도로가 펼쳐졌다. 그제야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안진이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주의를 환기시켰지만 나는 어깨만 으쓱해 보이고는 텅 빈 거리를 성큼성큼 나아갔다.
모퉁이를 돌자 나를 마중 나온 이들의 면면이 보였다. 스무 명 남짓했는데 전부 노인이었고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양가의 중역들이 죄다 쏟아져 나온 듯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피아의 전력을 분석했다. 사실 분석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한눈에 봐도 중과부적이었다. 설령 안진이 내 편에 가담한다고 해도 정면 승부로는 승산이 희박했다. 그럼에도 나는 노골적인 반감을 낯짝들에 공유하고 있는 노인들에게로 태연히 걸어갔다.
내가 십여 보 전면에 이르러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자 노인들이 술렁거렸다. 몇몇은 부채나 철봉을 꺼내 들 기세였다. 무리의 중앙에 있던 합죽이 노인이 내 접근을 가로막듯 손을 앞으로 뻗었다.
“거기 서라.”
나는 신경전을 벌이지 않고 노인의 요구에 응했다.
이가 다 빠져 입술이 오므라지고 주름으로 만면을 덮은 노인은 양가의 전대가주인 보화선(寶華扇) 양원(梁元)이었다. 최절정기의 무력도 초절정 초입에 불과하나 그는 환갑 잔칫날 급사한 선친의 뒤를 이어 무려 일 갑자 성상을 가주로 있으면서 자신의 가문을 오대세가의 수좌에 올려놓은 일대걸물이었다.
그런 연유로 공식적으로 은퇴한 지 십수 년이 지났으나 노인은 여전히 양가의 최고 실권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가 몸소 나섰다는 건 양가가 이번 일을 가문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로 간주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어쩌면 껄끄러운 상황을 맞게 될 수도 있음을 예상하긴 했으나 이 정도로 빡빡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지라 곤혹스러웠다.
양가의 노인들은 확연한 임전태세였다. 그들의 전의를 완화시키기 위해 나는 합죽이 노인에게 시선을 맞추며 천천히 포권했다.
“공공문의 문주이자 정의단의 단주인 오선이 공주 양가의 어른들을 뵙소.”
내 정중한 언사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은 불쾌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내가 저들보다 월등한 위상을 지닌 무영도수와 낙일쾌검에게도 평대를 썼음을 모른단 말인가.
왼편 끝 쪽에 섰던 장신의 노인이 내게 윽박질렀다.
“괘씸한지고. 어느 안전이라고 혀가 짧은 게냐! 알량한 명성을 얻고 기고만장…….”
합죽이 노인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을 들어 꺽다리의 뒷말을 막았다.
“내가 저 아이와 얘기를 나눌 터이니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는 한 아무도 나서지 말거라.”
분한 듯 콧김을 뿜어냈으나 꺽다리는 수장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재갈을 물린 노인이 두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축객령을 내렸다.
“돌아가라, 아이야.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마라. 이 경고를 무시하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너를 본가의 적으로 규정할 터, 어쩌려느냐?”
하아,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양가의 어처구니없는 처사에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나는 노기의 표출을 자제했다. 전력의 열세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양천을 곤경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정면충돌로는 초절정의 강자들이 여럿 포진한 적들을 감당치 못하겠지만 유인 후 각개격파하면 섬멸도 가능할 터였다. 안진은 제 한 몸은 건사하고도 남을 여자니 걱정할 까닭이 없었다.
양천을 배려해 분통을 터뜨리진 않았지만 나는 순순히 물러가지 않고 버텼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소. 정말 나와 절연할 셈인지 그 친구에게 직접 확인해야겠소.”
노인들이 발산하는 기운이 흉흉해졌다. 누구라도 병기를 뽑으면 급전으로 치닫게 될 일촉즉발의 순간 합죽이 노인이 양팔을 벌리며 가솔들을 진정시켰다. 그러더니 내게 응수타진했다.
“허락하지 않겠다면 어쩔 참이더냐?”
나는 노인의 질문에 답을 주지 않고 안진을 돌아보았다.
“시끄러워질지도 모르니 잠시 떨어져 있구려.”
안진에게 말을 하며 왼눈을 살짝 찡그렸다. 안진이 뒤편의 느티나무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이형환위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순간 가속을 발하며.
그녀가 과시한 초절한 경신에 양가 노인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장담컨대 그들 중 누구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것이었다.
기특하게도 말귀를 알아들은 안진 덕분에 나는 단숨에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나는 그저 친구를 찾아왔을 뿐이오. 결례를 범하고 싶지 않소. 하지만 방금 말했듯 수천 리를 달려왔는데 친구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소.”
합죽이 노인을 비롯한 양가 원로들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에둘러 말했지만 나는 명백한 일전불사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노인들은 조금 전이었다면 내 패를 받고는 바로 무력 행사에 나섰을 터였다. 그러나 꺽다리 같은 호전파(好戰派)조차도 개전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안진이 현시한 신술의 효과였다. 오늘만큼은 그녀는 짐이나 혹이 아니라 든든한 우군이었다.
나는 합죽이 노인의 결정을 기다렸다. 형세 판단을 마친 그가 침묵을 깼다.
“반각이다. 그 이상은 안 된다.”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으나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퇴로를 열어주어야 했다. 이 이상 압박하면 정말로 노인들을 상대로 난전을 벌여야 할지도 몰랐다. 사실 당장도 위험수위였다. 합죽이 노인의 양보를 굴욕으로 받아들인 일부 노인들이 살벌한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알겠소. 그럼 따로 만나게 해 주시오.”
노인은 일언지하에 내 요구를 거절했다.
“불가하다.”
다시 위기였다. 노인들이 있는 데서 대화를 나누면 양천이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솔직한 심정을 밝힐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래서야 그와의 대면은 무의미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독대를 관철시켜야 했다. 노인이 기어이 어깃장을 부리면 판을 깨버릴 참이었다.
합죽이 노인에게 재차 양천과의 독대를 요구하려던 찰나 안진이 소리쳤다.
“저기 오네.”
나와 노인들은 일시에 고개를 돌렸다. 나는 왼쪽으로 그들은 오른쪽으로. 양편 모두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그의 도래를 안진보다 한발 늦게 인지한 것이었다.
허공을 가로지른 양천이 멋들어진 공중제비를 선보이며 나와 노인들의 중간에 착지했다. 그러더니 나를 일별하는 겨를도 없이 합죽이 노인에게 절을 하며 호소했다.
“소손이 이이에게 제 결의를 알리도록 해 주십시오.”
부르지도 않았는데 양천이 나타나자 언짢아하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면서도 합죽이 노인이 즉각 허락했다.
“반각 이내에 끝내거라.”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노인의 뜻대로 되었다. 땅바닥에서 일어난 양천이 내게로 몸을 돌렸다.
고작 닷새만의 재회였으나 양천은 십 년은 늙어 보였다.
구룡장 혈전에서 입은 부상의 여파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마음고생 탓일 터였다. 저 완고한 노인들의 등쌀에 얼마나 시달렸을까.
“시간이 많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서신에도 밝혔듯 나는 폐관수련에 들 작정이오. 이제부터는 오로지 무공일도에만 전념할 터, 반드시 머지않은 장래에 당신에게 설욕하겠소. 그날까지는 볼 일이 없을 거요.”
양천의 뒤에서 노인들이 흡족한 미소들을 머금었다. 한편으로는 고소하다는 눈빛들이었다. 그 꼴이 얄미워 한마디 하려는데 다급한 전음이 고막을 두드렸다.
‘나를 이해해주구려. 부친께서 손가락을 자르셨소. 말을 듣지 않으면 다음엔 단지(斷指)가 아니라 단두(斷頭)를 보게 될 거라 하셨소. 한다면 하시는 분이신지라 나는 거역할 수 없었소. 미안하오, 단주. 제발 그냥 돌아가구려. 이 빚은 나중에 갚겠소.’
급류 같은 전음을 쏟아낸 양천이 다시 육성을 발했다.
“어째서 응답이 없소? 나는 할 말이 끝났으니 딱히 용무가 없다면 그만 가보시오.”
나는 양천에게 포권했다.
“만나서 반가웠소. 부디 폐관수련을 통해 큰 성취를 거두길 바라오. 다만 사람의 일은 알 수가 없는 법. 조만간 당신이나 저기 어른들의 마음이 바뀔 날이 올지도 모르오. 그러면 이전처럼 같이 어울리며 우정을 나눕시다.”
양천의 동공에 기쁨과 아픔이 동시에 어렸다.
“내 마음은 반석과 같아서 흔들리지 않을 거요. 실없는 소리는 그걸로 충분하니 이제 떠나주길 바라오. 미안하지만 당신은 불청객이니 배웅은 하지 않겠소.”
양가의 노인들은 박수라도 칠 듯한 분위기였다. 나는 방금 양천에게 미래를 암시하기 전 머릿속에 번개처럼 떠올랐던 복안을 그들에게 까발릴까 하다가 참았다. 그들의 속을 뒤집어놓으려다 복안의 실행에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서였다.